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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 세례, 악기, 목사와 전도자 문제에 대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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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 샬롬 ( 2003-10-2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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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주장하는 것 중 의문이 있어서 질문합니다.
1. 세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 것인지요?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믿습니다. 영접한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을 믿는 것 아닌지요?
그런데 믿고 세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고 하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세례가 구원을 받는데 필수조건인지요. 성경적인 답변을 부탁드립니다.
2. 예배시 악기를 사용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지요.
구약에서도 여호와께 예배드릴 때, 악기를 연주한 것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악기를 사용하지 않다보니 너도 나도 음정이 달라서 스트레오(?)가 연출되는 것 같아서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찬송가 악보도 악기의 산물이니까...어떤 의미에서 찬송가도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습니까?
3. 목사와 전도자라는 명칭입니다.
목사라고 하나 전도자라고 하나 명칭에 불과한데 꼭 전도자라고 불러야 하는지요?
4.성경대로 하는 교회라고 주장하는데, 그러면 고전11장에 여자가 교회에서 머리에 수건을 쓰라고 했는데 왜 그리스도의 교회에서는 예배드릴 때 머리에 수건을 안쓰는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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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 2003-10-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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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하다고 하신 신앙의 내용에 대한 답변들입니다. 다만 전제해야 하는 것은 저희 홈페이지에서는 신학적인 논쟁이나 이론의 전개를 지양하고 되도록 성경적인 입장만을 소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또 한가지는 신앙에 따른 교훈들이 인간의 이성으로 완전히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 또한 믿음의 문제로 받아드릴 문제라는 사실입니다.
Ⅰ.세례
저 자신이 그리스도의 교회 속에 와서 최초로 갈등했던 부분이 사실 이 세례의 문제였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고 상고하면서 역시 하나님의 진리가 인간의 생각보다 우선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동의하면서 이 문제를 받아드리는 데에 대한 갈등을 해결 받을 수 있었습니다.
1.세례는 믿음의 가장 구체적인 표현의 행위입니다.
우리는 예루살렘의 최초의 교회 속에서 말씀을 듣고 "우리가 어찌할꼬" 하는 구원의 요청에 응답하는 베드로 사도의 응답이 그 후의 모든 교회 속에 역시 그대로 유효하다고 확신합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2:38)
세례는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에 응답하는 가장 구체적이고 실재적인 순종의 자세요 모습입니다.
또 세례의 요청이 복음의 선포에 포함되어 진 것이 분명합니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16:16) 그러므로 '믿음'과 '세례'는 하나님의 사랑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믿음의 행위에서 "믿음" 이라는 것과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음의 사건에서 이를 분명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 이에 명하여 병거를 머물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주고 둘이 물에서 올라갈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지라 내시는 혼연히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행8:35-39)
위의 내용에서 빌립이 간다게의 내시가 읽던 이사야의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분명히 여기는 세례를 받으라고 명시적으로 포함되어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들은 내시는 물 있는 곳에 이르자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라고 요청하는 것을 보면 위의 마가복음16장 16의 말씀이 분명해 집니다.
그러므로 복음 속에는 세례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더욱 명료해 집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행전 속에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은 예외 없이 세례를 받는 것을 읽게 됩니다.
제가 다시 질문 드린 고넬료 같은 사람이 더욱 그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천사를 통해서 말씀하시기를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행10:5) 나중에 예루살렘에 올라간 베드로도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행11:15)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행11:17)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고 선행도 아신다고 하셨고 오순절 날 12 사도들이 받은 권능의 성령도 받았으면 끝난 것 아닐까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그를 비롯하여 그의 가족들에게 물로 다시 세례를 줌을 볼 수 있습니다. 필요도 없고 또 번거러운 일을 왜 했겠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었다는 확신을 얻게 됩니다.
베드로 전서3:21에서는 세례를 가르쳐 이르기를 "구원하는 표"라고 까지 표현하고 있습니다.
2.세례는 죄진 인간이 죽고 그리스도안에 거듭나는 가장 사실적인 모습입니다.
죄를 가진 인간은 반드시 죽고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거듭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들어갈 수도 없다고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습니다.(요3:3, 5)
바울 사도께서도 로마서 6장에서 이를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롬6:3~4)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6~7절)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 일체가 되는 것이며 다시 물에서 일으킴은 주님의 부활에 일체가 되는 행위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롬6:5)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8절)
하나님께서는 세례라는 행위를 통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죽고 거듭 남을 즉, 대속의 피를 흘리시고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주님의 구원의 역사를 각 개인의 삶 속에 적용하게 하는 은혜의 역사를 세례를 도구로 이루십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경계해야 하는 것은 "믿음도 없는데 세례라는 의식만 거치면 구원을 받는가?" 라는 데는 저 자신도 인정할 수 없습니다.
앞에서 말씀 드린 것처럼 세례라는 행위는 믿음의 표현으로서의 행위이지 믿음이 결여된 행위로서는 의미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더불어 세례를 받을 수 있는 자격도 타의에 의해서가 아닌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할 수 있는 신앙의 고백이 가능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씀 드릴 수 있겠습니다. 물론 이러한 것들은 어린아이는 불가능할 것이고 또 사람마다 차이는 있다고 봐집니다.
Ⅱ.예배시에 악기 사용에 대한 문제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찬양과 함께 악기 사용은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사용하도록 명령되었습니다.
"왕이 레위 사람을 여호와의 전에 두어서 다윗과 왕의 선견자 갓과 선지자 나단의 명한 대로 제금과 비파와 수금을 잡게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 선지자들로 이렇게 명하셨음이라 레위 사람은 '다윗의 악기'를 잡고 제사장은 나팔을 잡고 서매, 히스기야가 명하여 번제를 단에 드릴새 번제 드리기를 시작하는 동시에 여호와의 시로 노래하고 나팔을 불며 이스라엘 왕 '다윗의 악기'를 울리고, 온 회중이 경배하며 노래하는 자들은 노래하고 나팔 부는 자들은 나팔을 불어 번제를 마치기까지 이르니라"(대하29:25-28). 참고(시150:1~6)
구약 시대의 모든 제사 행위는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명하신 것들이었습니다. 또 악기 사용의 문제는 다윗 시대를 거치면서 보다 분명해 지고 있음을 봅니다.
재미있는 한 군데의 표현을 인용하면 "비파에 맞추어 헛된 노래를 지절거리며 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며"(암6:5) 라는 표현입니다.
다윗은 대단히 목가적인 사람이었고 예술적인 성향이 대단히 풍부한 사람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향에 비추어 볼 때 다윗은 아직 왕이 되기 전에 사울의 정신 질환의 완화를 위하여 그의 앞에서 비파를 연주하기도 했지만 그보다 앞서서는 목동 생활을 하면서부터 악기와 노래를 즐겼던 사람이요, 이러한 성향은 당연히 그가 왕이 된 후에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 찬양과 더불어 쓰여진 것은 당연한 것 같습니다.
그 이전에 악기들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나팔'을 비롯한 기구들은 찬양의 연주를 위한 것이었다기보다는 "신호"를 위한 것으로 나타납니다.(레23:24), (민10:3, 7, 10)
이런 입장에서 볼 때 구약 시대에 악기가 쓰여졌던 것도 처음부터 율법으로 명령하신 제사 제도나 그 밖의 입장과는 다르다고 이해되어집니다.
그러나 이러한 제사 제도조차도 하나님께서 폐하시고 새로운 언약을 세우실 것을 예언하셨고(렘31:31~33) 히브리서 기자는 "제사 직분이 변역한즉 율법도 반드시 변역하리니"(히7:12) "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18)라고 말함으로써 이를 더욱 분명히 합니다.
신약의 예배는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짐승의 피로 드렸던 구약의 모든 제사를 완성하시고 비로소 동물 제사가 아닌 '신령과 진정의 예배'가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신령과 진정의 예배 속에서도 구약의 어떤 것들은 수용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것은 마치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 애굽을 그리워하는 것과 좀더 심하게 말하면 못쓰겠다고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던 것들을 뒤져서 다시 찾으려는 것에 비길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못쓰는 것이라고 던져 버렸는데 사람들은 계속 그것을 들추어내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서의 찬양은 악기가 명령되어 진 것이 없다고 하는 데는 누구나 다 동감하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찬양'이라는 말 자체가 희랍어에서는 구약 성경보다 더 독특합니다.
신약성경에서 "찬양"이라는 말은 'psallo<쌀로>'[(psao<싸오>='문지르다' 에서 유래) 잡아당기다, 잡아 뽑다, 윙하고 울리다, 연주하다, 노래하다, 찬송하다.] 라는 말로 주로 쓰이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쓰임의 예를 들면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고전14:15)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엡5:19)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골3:16) 있는데 "마음을 연주하다"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특이한 다른 한군데의 표현은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 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13:15) 했는데 우리가 항상 찬양을 드려야 하고 그 찬양은 예수님의 이름을 증거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몇 가지 반박될 수 있는 논지를 생각하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당시의 긴박한 상황 즉 핍박 때문에 악기 사용이 어려웠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꼭 필요한 것이었다면 영광된 복음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며 증거 했던 것처럼 아무리 제한된 상황일 지라도 실천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옥중 서신을 보내는 상황에서는 바울 자신을 제외하고는 신앙의 행위에 있어서 해야 될 예배의 행위를 제한해야 할 정도로 긴박하지는 않았음으로 그 동안 복음에 있어서 다른 것들을 보충하라고 당부하는 것처럼 당부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너희가 여태껏 예배시에 악기를 쓰지 못했으나 구약 성서에 그러했던 것처럼 이제는 기회를 보아 그것도 하도록 하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데에 꼭 있어야만 할 것이다" - 비교:(딤전5:23) 라는 등등의 당부를 주지 않았겠는가 하는 것인데 악기의 사용의 당부를 지역마다 교회가 자리를 잡은 후 바울사도의 마지막 로마의 옥중서신이나 목회서신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악기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찬양에 은혜가 되지 않는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 속에도 모순이 들어 있다고 봅니다. 찬양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지 사람을 즐겁게 하는 성격의 것은 아닙니다. 물론 은혜로운 찬송을 저도 좋아합니다.
님께서 "악기를 사용하지 않다 보니 너도나도 음정이 달라서 스트레오(?)가 연출되는 것 같아서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하셨는데 이 말씀을 생각해 볼 때 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교회 속에서 믿음 생활을 하고 계시다는 이야기로 들립니다.
그리고 제 견해에서 이것은 악기 사용의 문제와는 별개의 사항이라 여겨집니다. 역사적으로도 교회의 예배에 악기가 포함되어 진 것은 10세기가 지난 후였습니다(J. W. McKinnon, "The church Fathers and Musical Instruments" Dissertation, Columbia University, 1965).
말씀하신 대로라면 이전의 예배들은 다 그렇게 듣기에도 거북했다는 말입니까? 또 열심히 찬양을 연습하고 찬송하는 교회들은 얼마든지 아름다운 찬송을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의 부분에서 다른 교회들은 다 하고 있는 것들을 안 한다는 이유로 억지를 부리기도 하고 잘되지 않는 것을 하지 못하는 것에 핑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자세는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도 옳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부디 찬양을 잘하도록 연습하여 "스트레오"가 아닌 영육의 스테레오가 되시기를 빕니다.
또 꼭 사람들이 찬양으로만 감동을 받습니까? 아름다운 선율의 클래식이나 일반 음악을 듣고도 눈물을 흘리기까지 감동하는 것을 목격하지 않습니다.
신앙에 있어서 한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명령은 우리의 감정보다도 우선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사회에서도 최근에는 아카펠라 음악이 상당한 호응을 얻고 있고 우리의 홈페이지의 '아카펠라 찬양'을 click 하시면 아름다운 찬양을 들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요즘의 대형 교회들은 사실 찬양반주를 위한 악기를 갖추는 데도 예산을 수억씩 들이는 것을 보는데 과연 그렇게 하는 것이 중요한가 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많은 말씀을 드렸지만 사실 답변은 단순한 것입니다. "성경에 명령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사실에 확신이 가는데 님께서는 그렇지 못하다는 차이 뿐입니다.
역시 믿음의 문제라고 생각되어집니다. 많은 교회들 중에 참으로 그리스도의 교회는 더 믿음이 필요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곳에서 말하고, 성경이 침묵하는 곳에서는 침묵한다" 이것이 이성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수용 안 된다면 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신앙을 떠나 양심이라는 기준에서 본다고 하더라도 각 교회의 전통은 지켜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교파 교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우리가 보기에 성경적인 지지를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서도 얼마나 큰 확신들을 가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저는 이점이 안타깝습니다.
"가장 성경적인 신앙을 견지하면서 왜 이토록 확신이 없을까!" 제가 늘 하는 말입니다만 "의심"은 곧 "죽음"입니다. 반대로 확신은 생기를 제공합니다. 우리가 진리를 지킨다는 이유로 독선적이어서는 안되겠지만 진리를 증거하고 지키는 데도 초대 교회의 사도다운 열정과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야 할 것입니다.
Ⅲ.목사(자)와 전도자 문제
이것은 단순한 명칭의 차이가 아니라 직분의 차이를 이야기합니다. 또 성경에서 이 차이를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는 에베소서 4장 11절에 나타납니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그리고 12절에서는 이 직분을 세우는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사도'나 '선지자'는 현재적으로 존재하지 않은 직분으로 이해합니다. 이것은 제가 설명해야할 의무가 아니기 때문에 생략합니다. 여기에서 "복음 전하는 자" 또는 "목사"는 교회를 위해서 여전히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목사"로 번역된 명칭은 교회의 "장로"를 말하고 있는 것이 명확합니다. 그리고 "전도자"는 어원적인 의미에서나 나중에 바울 사도께서 디모데나 디도에게 당부하는 사명들로 볼 때 복음을 증거하고 가르치며 이단 사설을 규명하고 건전한 신앙을 바로 세우는 직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를 다음의 내용에서 각각 설명하겠습니다.
1.목사(자)
참고 말씀: (행20:17-28)
바울 사도는 17절의 말씀에서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한 것을 보면 분명히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불렀습니다. 다시 28절에서는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고 말함으로써 이 장로들을 향하여 교회의 "감독자"를 삼았다고 말하고 나서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다 말하고 있는데 여기 "치다"라는 말의 희랍어 명사형이 바로 에베소서 4장 11절에 나타나는 "목사"로 번역된 말씀입니다.
이 내용을 정리하면 꼭 같은 사람들을 향해서 각각 세 가지 명칭 즉, "장로(prosbyteros 프레스뷔테로스 - presbyter, elder), 감독(episkopos 에피스코포스 - overseer, bishop), 목사(poimen 포이멘 - shepherd, pastor)"로 부르고 있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 속에서 가장 자격이 상세하며 명확한 직분이고 거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신앙의 인격을 갖춘 자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1)장로(프레스뷔테로스). 신약 성경에 66회 언급되지만 대부분은 유대인의 종교 지도자들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본래 "prosbys"(노인)이라는 어원에서 왔고 늙은(elder), 나이가 많은(older), 선진(히11:2), 어른(요8:9) 등등의 의미를 가지는 말입니다. 신약 교회 속에서 언급되는 최초의 장로라는 명칭은 행11:30에 예루살렘 교회에서고, 이방 교회의 최초로 세워진 기록은 행14:23에서입니다.
2)감독(에피스코포스). 신약 성경에 명사형으로 5회(빌1:1; 딤전3:2; 딛1:7; 벧전2:25<이상은 KJV에서bishop>, 행20:28 KJV에서 overseer), 동사형으로 2회(히12:15; 벧전5:2) 나타난다. 이 말은 epi(에피 '~에, ~위에' 라는 뜻의 전치사에 skopos(스코포스에서 유래하여 '보초, 경비원, 정찰병, 목표, 표적, 의미)라는 말이 합쳐져서 이루어진 합성어로 '감독자, 검사자, 조사자, 감시자, 수호자, 감독(overseer)등등의 뜻을 가지는 말입니다.
3)목자<사>(포이멘). 신약 성경에 명사형으로 18회(특히 요10:2, 11, 12, 14, 16) 동사형으로 11회(요21:16; 행20:28; 고전9:7; 벧전5:2; 유1:12이상은 feed, 마2:6 rule, 눅17:7 feed cattle, 이외 계시록4회(물론 목사라고 번역된 곳은 엡4:11 한곳뿐입니다.
사도행전20장 28b에서 "치게 poimainein(포이마이네인)"은 "poimaino(포이마이노)"는 (목자 노릇하다, 먹이다, 치다, 돌보다, 감독하다, 지배하다, 지시하다)의 주격 능동태로 본래 "poimen"(목자pastor, 양치기shepherd, 감독bishop, 지도자, 경영자)에서 유래한 동사형입니다.
결국 바울은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을 불러 놓고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고 함으로서 이 세 가지의 헬라어로 쓰여진 직분이 같은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며 장로들은 신앙 인격이 갖추어진 믿음의 본을 가진 사람들로 교회를 감독하고 하나님의 양떼를 치는 영적인 목자로써 교회를 보살피며 보호하는 책임을 맡은 교회의 지도자들을 말합니다.
이 사실을 다시 베드로 사도의 서신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로라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벧전5:1-2) 여기에 우리말로 직접 번역되지 않은 "episkopyo<에피스코퓌오>"(임무를 수행하다-표준 새번역='그들을 잘 감독하십시오')라는 감독의 의미가 역시 나타나고 있습니다.
2.전도자
참고 말씀: (딤후2:1-13)
[1]어근
"전도자, 복음 전도자"는 희랍어 euangellistes <유앙겔리스테스>로 행21:8; 엡4:11; 딤후4:5에 대표적으로 나타납니다. 이 말은 다시 "euangellizo(유앙겔리조) '좋은 소식을 전하다, 복음을 전하다'(마11:5, 눅1:19, 롬15:20, 갈1:8, 23, 엡2:17, 계10:7 14:6, 행14:21, 17:18,살전3:6 등 신약 성경에 55회) 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또 하나의 단어는 "keryks(케뤽스)" 선포자, 보도자, 반포자, 공포자, 널리 알리는 자, 사자, 전도자[딤전2:7 전파하는 자<선포자-표준 새번역>; 딤후1:11 반포자(선포자-표준 새번역); 벧후2:5 전파하는(부르짖던-표준 새번역)] 등등에서 전례를 찾게 됩니다.
이 낱말의 보다 근원적인 말은 "kerysso(케뤼쏘)" 왕의 명령을 전하다(통보하다), 반포하다, 선포하다, 전파하다, 가르치다, 설교하다 등(마3:1, 막1:4, 7, 눅3:3, 롬2:21, 고전1:23, 갈2:2, 고후1:19, 빌1:15, 딤전3:16, 벧전3:19, 계5:2 등 신약에 61회)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2]전도자의 사명.
(1)빌립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은 ①복음 증거(행8:5, 35, 40)와 ②세례를 주었습니다.(행8:12, 38)
(2)디모데와 디도를 통해서 ①복음 증거와(딤후4:2-5). ②장로를 세움으로 교회 조직을 완성하며(딛1:5). ③경계하고 권면하며(딤후4:1-2) ④전도자와 교사를 양성하고(딤후2:2). ⑤진리와 믿음을 수호(거짓 교훈으로부터)(딤전1:3-4, 딤전4:6, 딛1:13-14)하는 일을 합니다.
위에서 살핀 바대로 목사와 전도자는 근본적으로 다른 직분입니다.
차제에 알아야 할 것은 에베소서 4장 11절의 말씀 한 군데만이 "목사"라는 명칭이 있을 뿐 성경에 어디에도 이 "목사"라는 이름으로 일한 사람의 흔적이 전혀 없으며 오늘 날 이 말씀은 더 이상 목사라고 번역하지 않는 대신 "목자"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명칭은 장로가 분명하고 또 일반 교파 교회들도 "목사"는 장로라는 것에 동의합니다.
여기에서 문제는 일반 교회의 목사는 장로 위의 장로 즉, 치리 장로라고 헌법에 나와 있으나 성경에서 살피는 대로 개(個)교회의 장로를 언급할 때는 언제나 단수로 나타나(행14:23, 15:2, 4, 6, 15:22, 23, 20:17; 빌1:1; 살전5:12; 살전5:12)고 있지 않고 반드시 복수로 언급되어지며 장로들 중에 특별히 군림하는 장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일이나 직분의 성격상으로 볼 때 목사 즉, 장로는 교우들을 돌보고 관리한다면 전도자는 진리를 선포하고 가르치는 면이 주임무입니다.
장로와 전도자의 높낮이를 말하는 것은 성경에서 볼 때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입장에서 높낮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장로가 높다, 전도자가 높다, 목사가 높다'라는 논쟁은 참으로 유치하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반드시 없어져야할 세속적인 모습입니다.
오늘 날 전도자라는 이름을 쓰면서도 장로들 위에 군림하려 하고 성숙된 신앙의 사람들이 있음에도 교회를 치리 하는데 어렵다는 이유로 장로를 세우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경거망동입니다.
이런 세속화 된 모습을 버리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교회로 회복하고자 하는 진리에 바탕 한 신앙 의지에 섰다면 모든 면에서 세상적인 것을 교회에서 몰아내야만 합니다.
Ⅳ.고린도 교회 여자들의 머리에 쓰는 문제
같은 장 16절의 "변론하려는 태도를 가진 자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규례가 없느니라"는 바울 사도의 말씀은 이것이 모든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행해져야 할 신앙의 과제가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이와는 반대로 조금 뒤의 14장 34절의 말씀은 모든 교회에 적용되어야할 교훈입니다.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많은 말을 썼지만 이것이 님을 이해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믿음으로 살자는 것입니다.
님께서 사용하신 "그리스도인(christianos <크리스티아노스>)" 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것이 된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졌다는 사실을 아시는지요...
부산에서 무딘 연장이 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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