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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 안수에 대한 소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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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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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과 답변을 함께 두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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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 2003-05-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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按手의 필요성(목적)에 대하여
지상교회는 밖으로부터 주어지는 시련과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혼란을 거듭하면서 시들다가도 다시 소생하면서 성장하여 간다. 한국 교회 근대사를 보더라도 지상교회는 신앙적으로 커다란 혼란을 겪으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진리의 말씀인 성경도 하나이고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도 한 분이신데 신자들의 신앙 형태는 다양하게 나타남으로써 신자들간의 갈등은 너무도 극심해지고 있다. 이러한 원인을 밝힌다면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그 가운데서 안수(按手)에 대한 신자들의 잘못된 관념을 하나 들 수 있겠다.
전통과 교세를 앞세워 허세를 부리는 교권주의자들은 안수가 마치 목사 권위의 상징인 양 허위 선전에 혈안이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안수를 구약시대 제사장들이나 왕들이나 선지자들이 받았던 기름부음과 같은 성질의 것으로 오해하여 안수 받은 목사는 제사장이나 왕이나 선지자의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믿고 그렇게 행세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가 하면, 성령운동 또는 오순절 운동가라고 자처하는 신비주의자들은 안수가 성령의 능력을 주거나 받는 수단으로 생각하기도 하고, 기적을 나타내는 능력의 수단으로 오해하고 있어 온갖 추태를 부리고 있는 실정이다. 손을 한 번 얹어주는데 몇 백만원의 돈을 요구하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안수 한 번 받기 위해서 산으로 들로 헤매는 허다한 무리가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뿐만 아니라, 요즈음 교파를 막론하고 한국 교계에 독버섯처럼 돋아나는 기복주의 신앙자들은 안수를 부자되어 잘 먹고 잘 살고 싶어하는 인간들의 본능적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복 받는 비법으로 잘못 알고 있기도 하다. 자기들이 손을 얹고 복을 빌면 복을 받고 저주를 하면 저주가 임한다고 가르치면서 많은 어린 성도들을 유혹하기도 하고, 두려움과 공포에 떨게 하여 자기들에게 맹종하도록 이끌어 가고 있다.
이와 같은 교회내의 신앙적 혼란은 신자들 개인의 영혼은 물론 한국 교회의 커다란 병폐가 아닐 수 없다. 인본주의와 사이비 신앙운동이 범람하는 상황 속에서 중병을 앓고 있는 한국 교회는 반드시 치료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병의 원인을 하나씩 제거해 나아가는 작업이 필요하다.
I. 성서 속에 나타난 안수의 필요성
1. 구약성서에 나타난 안수
가. 안수의 실례
① 축복(창 48:14)을 위한 안수.
② 희생제사(레4:14)때의 안수
③ 하나님을 모독한 자에게 돌을 던질 때(레 24:14)
④ 성직 취임식(민 8:10)-레위인들의 안수를 통한 제사장직의 계승
⑤ 특별한 임무부여(민 27:23; 신 34:9)-모세의 여호수아 안수.
나. 구약안수의 특징
① 오직 레위인들에게만 안수, 다른 지파에게 안수하지 않음, 태어나면서 정해짐
②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안수한 것으로 승계를 위한 안수는 끝났다.
③ 제사에 있어서의 안수는 속죄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구약에서는 치유과 관련된 안수의 예는 없다. 그러나 희생제사의식에서 불가결한 역할을 했다. 구약에서 예언자나 제사장이나 왕이나 혹은 장로들까지도 그 직책을 위임받을 때 손을 얹었다는 기록은 없다. 오직 구약의 제사의식 속에서 오직 관습으로만 실행되고 있을 뿐이나 오직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안수한 단 하나의 예외가 있다. 여기에서 안수는 모세의 손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구원의 도구가 되는 특별한 역할의 위임이었다 여호수아가 받은 안수는 중재자의 증표가 아니라 구속사의 과정에서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특별한 목적을 가진 것이었다.
2. 신약성서에 나타난 안수
가. 안수의 실례
① 예수께서 어린아이들에게 안수하심(마 19:13,15)
② 병 고침을 위한 안수(막 8:23; 마 9:18; 눅 13:13)
③ 임명(행6:6)-사도들이 칭찬듣는 일곱사람에게 안수함
④ 전도자 파송(행 13:2,3)-특별한 일(전도여행)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구별하여 세울때.
⑤ 사역자 임명(딤전 4:14)-장로회에서 디모데가 안수 받음(은사와 관련)
딤후 1:5-바울이 디모데에게 안수함(은사와 관련)
⑥ 성령을 받기 위하여(행 8:17,18)
나. 신약안수의 특징
신약성서에서 안수는 하나님의 특별한 능력의 발현과 특별한 사역을 위한 구별의 의미를 갖는다. 물론 구약에서의 축복의 의미도 그대로 나타난다. 그러나 구약성서와 다른 점이 있다면 치유의 안수의 예가 많이 나타나고 성령을 받게 하는 안수가 언급된다는 점이다.
신약성서에 나타난 안수의 예들은 흔히 오늘날 병고침의 안수와, 교직안수와 관련되어 있으므로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성서에 나타난 안수들은 그 목적이 여러 가지로 다양하다.
첫째는 복의 전달에 있다
구약성경에서 제일 처음 안수에 대한 기록은 창세기에 있는 것인데,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에게 축복할 때에 머리에 손을 얹고 한 것이다. 그러나 그 이전, 멜기세덱이 아브람에게 축복할 때,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할 때에는 안수를 했다는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
신약성경에서는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들에게 축복하실 때에 안수를 하신 일이 있다. 이와 같은 안수들은 모두가 복을 전달하려는 데 그 목적을 가지고 있다. 특히 구약 창세기에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을 그 후손에게 전달하는 뜻에서 안수를 했던 것이다.
둘째는 죄책의 전달이다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율법을 받을 때에 하나님께서 명하신 제사 규례 중에 제물에 안수를 하라는 말씀이 있다. 아론의 아들을 속하기 위해서나7), 백성들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8), 제물을 드리는 자가 제물의 머리에 안수를 하도록 명령하신 것이다. 이것은 제사장이나 백성의 죄를 제물에 전가(轉嫁)한다는 뜻으로 행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런 경우의 안수는 죄책(罪責; 죄에 대한 책임)의 전달이 그 목적이 된다.
셋째는 능력의 전달이다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대부분의 안수들은 주로 메시야 능력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고 있다. 그것은 대부분이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많이 나타나 있고 예수님 자신과 그의 제자들인 사도들에 의하여 행해졌다. 사도들은 메시야의 능력의 대행자(代行者)들이기 때문에 안수를 통한 능력이 나타났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능력을 제자들에게 위임(委任)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신약시대에 예수님 자신과 그의 제자들에 의해 행해진 안수는 메시야의 능력이 전달되어 여러 가지 기적적(奇蹟的)인 사건이 나타나게 된 것이기 때문에 그 당시의 안수는 능력 전달이 그 목적이 된다.
넷째는 은사의 전달이다
신약성경 중 특히 사도행전이나 서신서 가운데 나타나는 안수는 주로 은사들을 전달하려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오순절 성령께서 강림하셔서 지상에 교회를 세우시고 교회 중에 갖가지 은사를 주어 교회를 자라게 하시는데 사도들을 통하여 성도에게 각각 은사를 맡길 때에 안수를 하도록 하신 것이다.
그래서 사도들이 안수를 하면 성령을 받음과 동시에 여러 가지 은사를 받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복음 전도자나 집사나 다스리는 자를 세울 때 안수를 하도록 한 것도 성령께서 교회를 세우시는 데 필요한 은사를 각자의 믿음의 분량대로 전달받게 하시려는 의미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서에 나타나는 대부분의 안수의 목적은 복의 전달이나 죄책의 전달 그리고 능력과 은사의 전달이 그 목적임을 알 수 있다.
II. 역사속에 나타난 안수의 필요성(안수에 대한 오해)
1. 랍비들의 전통
초기의 랍비적 유대교에서 안수는 지적인 성숙의 정도에 따라서 랍비적인 학자들에게 시행됨으로써 그들에게 권위있는 사법적, 종교적 직무를 행할 자격을 부여해 준 하나의 의식으로 발전하였다. 안수에 의하여 학자들의 수가 증가하였고, 그들의 지위도 함께 증가하였다. 토라와 전승을 해석하는 사람들로서의 랍비들은 하나님의 뜻을 모든 이스라엘에게 전하는 중재자가 되었다. 바르 코크바의 반란(주후 132-135) 이 후 로마인들은 유대인의 안수식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유다 바바가 그 칙령을 거부하고 그 의식을 계속 행함으로써 모세로부터의 인위적인 승계권은 계속 유지되었다.
안수식이 주후 3세기에 기독교적인 의식으로 채택되자 팔레스타인 유대인들은 손얹는 행위를 버리고 그 대신 그 이름을 선포하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 후 유대인들은 안수의식을 회복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으나 기독교적인 방법의 모방이라고 간주되어 한동안 사라지기도 하였다. 오늘날 유대교의 강화로 다시 세네카(안수의식)은 유대교 신학교 과정을 수료한 사람들에게 주어지고 있다. 랍비적 유대교 안에서 모세-여호수아의 세미카는 그것이 본래 가지고 있던 성격을 상실했고, 그 대신에 직책과 권위의 상징이 되었다.
2. 중세 및 종교개혁시대 이후의 안수의 필요성
교회가 생긴 후 200년 동안 안수를 행했다는 증거가 전혀 없다. 안수의 관습은 유아세례와 군주적인 교권제도가 발생한 다음에 생겨난 것들이다. 교회 내에 엄격한 권력구조가 발달된 큰 이유는 이단 혹은 초대교부들이 이단이라고 생각한 것들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교회가 살아남으려면 그 자신의 구조를 세속사회의 중앙집권적인 정치구조와 같이 만드는 것이 필요했을 것이다. 안수의식의 손을 얻는 행위가 지도력을 강화시켜 주고 명확히 해 주는데 이바지했음은 의심 없는 사실이다. 유아세례자들을 위한 견진성사를 위해 안수의식이 사용되었다. 가톨릭은 구약시대의 제사장직을 모방하여 주교 사제, 부제의 직책을 만들어 냈으며 구약의 어휘로 이 직책을 구분하였다.
종교개혁 후 개신교 목사들은 교육수준의 향상으로 자신의 위치가 불안해지자 안수의식을 통해서 국가와의 결탁을 의도했고 교단의 위계질서 속에 안정과 확신을 제공할 수 있었다. 그들은 신앙고백과 안수의식으로서 그들의 신학적인 입장의 주위에 담을 쌓기 시작했다. 성직자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사도적 권위를 주장했는데 그중의 한 방법이 장로 혹은 목사의 직책을 사도직 속에 포함된 것으로 보게 했다. 그 결과 직책들 사이의 차이는 단순한 종류의 차이를 넘어서 권위의 정도의 차이로 발전했다. 이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성경을 샅샅이 뒤져 조직제도의 규범이 될 만한 것들을 찾아냈다. 성경 본문들이 이렇게 산산 조각으로 흩어져 버리자 그 본문의 배후에 있던 상황적인 요소와 맥락은 무시되고 말았다. 마치 술객 시몬이 비난을 샀던 것과 똑같은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행 8:20-24) 교회는 술객 시몬의 잘못을 되풀이해 왔다.
안수의식에서 손이 얹혀짐으로써 성직자들이 받는 권위는 사도들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것이며 그것을 받는 자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주장된다. 그리스도를 대리하는 일이 모든 신앙인의 책임이라는 인식 대신, 구원을 믿는 집단내의 특정한 계급의 직분이라는 가정은 결국 세계 내에서의 교회의 활동을 제한시킨다.
오늘날 여성들은 안수 의식을 통하여 교회의 권력구조 안으로 들어오려고 압력을 가하고 있다. 만일 그들에게 성직의 권리가 허용된다면, 이는 단지 비 성경적인 계급조직을 강화하는 데에만 도움이 될 것이다 일단 얻어진 권위적인 지위는 쉽사리 포기되지 않는다. 안수 의식에서 손을 얹음으로써 얻어지는 인정, 특권 그리고 안정성을 여자들이라 하여 남자들보다 덜 원하리라고 믿을 근거는 전혀 없다. 교회의 궁극적인 권위는 그리스도의 영 안에 있는 것이므로 주권적인 성령 자신에 의하지 않고서는 분배되거나 이양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다수결 투표, 안수의식, 손을 얹는 행위, 혹은 그것들의 복합행위로써 그리스도께서 하나의 몸으로서의 교회에 부여하신 권위를 이양시킬 수 없다. 교회는 회중 가운데서 한 사람을 택하여 그를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지명할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다. 효과적인 하나님 나라의 사역은 유능한 지도력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 목적을 위하여 마련된 의식이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권위를 침식시켜서는 안되며, 신자들의 공동체 속에서 성령이 작용하는 것을 방해해서도 안된다. 손을 얹음으로써 행해지는 안수의식은 교회의 행정을 활성화하기 위하여 교회가 사용해 온 제도였다. 안수를 받은 직책 수임자만이 사면과 구원을 베풀 수 있었다. 비록 이 권위의 일부는 박탈되었지만, 종교개혁 후의 교회들에 의하여 안수 의식은 지속되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교회의 권위를 의식을 집전하고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한사람에게만 집중시켜 주었다. 교회의 교직자들은 신앙공동체 안에서 구원을 중재하는 의무를 수행하였다. 하나님의 권능과 권위의 이전의 상징인 안수가 계속 남아 있는 한, 교회의 직책들이 그러한 역할을 맡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안수의식이 하나님께서 어느 한 개인에게 목회직을 위한 어떤 은사를 부여했다는 승인으로만 생각된다해도 손을 얹는 행위는 성서적으로, 역사적으로 또한 상징적으로 부당하다. 이런 경우 안수의 사용은 교회에 속한 권위를 통채로 하나의 개인에게 집중시켜 줄뿐이다.
하나님께서 애굽으로부터 한 백성을 구속해 내셨을 때 그 분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요구하는 바를 상세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음을 느꼈다. 그분은 제사장을 세워 그의 다스림을 중재케 했고 그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셨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고 모든 신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신 지금, 제사장과 예언자와 왕의 중재역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신자들의 공동체 안에서의 중재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완성되었다. 그러나 교부들은 교회조직을 유지한다고 하는 핑계와 교권을 장악하고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욕심으로 구약의 제사장제도를 교회에 가져왔고 안수의식은 그 매체가 되었다.
예수그리스도는 교회에 대한 그의 주권과 신자들 가운데 내주하시는 성령의 권위에 바탕을 둔 권력구조를 교회에 주셨다. 시내산에서 주어진 세부지침과는 달리 예수도 바울도 새로운 이스라엘에게 어떤 고정된 조직형태를 주지 않으셨다. 그들은 안수에 대한 가르침도 전혀 주지 않으셨다. 사실 예수님 자신의 사도들조차도 단순히 세워졌다. 신약성경의 지도권에 대한 어휘는 피라미드적인 조직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것은 수평적인 용어이다. 이끄는 자와 따르는 자, 모범을 보이는 자와 따르는 자(고전 11:1; 살후 3:9; 딤전 4:12; 벧전 5:3),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상호봉사-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생각이다. 안수의식은 이런 체계 속에서 아무런 기능도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있어서는 안 될 장벽을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세우기 때문이며, 교회의 사명인 상호봉사를 저지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세례를 통해서 왕같은 제사장이 된다. 이 말은 세례 속에 보이지 않은 하나님의 손이 영으로 안수한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세례 받을 때에 영으로 안수 받게 하셨다. 그러므로 그 외의 안수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III. 맺는 말
성서에 나타난 안수는 모두가 '전달'한다는 의미를 가지면서 그 목적이 다양하고 그 성질 역시 단순하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주로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복이나 죄책의 전달을 목적으로 행해진 예표로서의 성질을 가진 안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와서 다 성취되었고, 주로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능력과 은사 전달을 목적으로 행해진 표적으로서의 성질을 가진 안수는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시대(계시시대)에만 있을 수 있는 것이었다.
오늘날 한국에서 안수에 관한 오해를 부르는 특별한 문제점 중 하나는 "안수"라고 하는 한문어휘가 주는 특수한 뉘앙스에 기인한 것 같다. 만일 한문을 사용하지 않고 원문의 뜻을 그대로 풀어서 사용했다면 보다 그 본래의 목적에 가깝게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안수"는 한문에서의 의미처럼 손으로 누르거나 문지르는 것이다. 그러나 이 표현 자체가 성서 본래의 의미를 이탈한 오역처럼 보인다. 성서에서의 안수는 그냥 손을 얻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주가 되는 것은 손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손은 능력이며 그 능력의 원천은 바로 하나님이었다.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며, 속죄의 은총을 베푸시는 분이며,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며 모든 사역의 주관자이시다. 이러한 차원에서 손은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이며, 하나님은 우리들의 손을 통해서 일하신다. 그러나 욕심 많은 사람들은 이런 하나님의 능력과 임재하심을 몇몇 소수에게만 국한시키려고 노력했고, 그러한 노력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하나님의 은총과 능력은 결코 특별한 손에만 주어진 것이 아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세례를 받음과 동시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성령의 손에 이미 안수를 받았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손을 얹었다고 해서 그것이 특별한 신앙적 의미를 갖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명백히 잘못된 일이다. 혹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은 마치 그런 외면적인 행위가 특별한 결과를 초래할 것처럼 생각하게 하여 성서와 하나님의 계획을 오해하게 만들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손을 얻는 행위를 하는 것은 성서에서 금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므로 개인의 자유에 속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에게나 쉽게 안수하지 말라고 한 바울의 경고는 아마도 우리의 자유 때문에 타인의 믿음에 손상을 주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이해할 소지를 주어서는 안된다고 하는 강한 권면을 담고 있는 것이다.
(함동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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