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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4 .  피터 러크만을 비판한다 "원종호 저"
  질문 :
질문과 답변을 함께 두었습니다.
  답변 : 2003-05-12
Peter S. Ruckman을 비판한다[Ⅰ]
서론

필자는 피터 러크만의 "다섯 가지 이단 연구"라는 소책자에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이단에 포함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 첫 번째로 취급하였음에 대하여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다. 이제 그리스도의 교회의 한 목회자로서 그의 글 "다섯 가지 이단 연구"와 "일곱 침례"와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 제50호(96년 5월)를 근거로 비판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는 필자가 소속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와 관련된 부분에서 그러할 것임을 밝혀 둔다.

Ⅰ.교회의 명칭문제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가 그들만이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참 교회이며 다른 교회들은 교회가 아니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런 생각은 전적으로 로마 카톨릭을 흉내낸 것이다」
「즉 그들이 모이는 건물에는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부르지만 그것은 참된 그리스도의 교회와는 관계가 없으며 그 이름 자체도 성경 적이지 않다. 그리스도의 교회들(복수)은 성경에 언급은 되어 있으나(롬16:16)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단수)는 신구약 어디에서도 그리스도의 교회라 불려진 적이 없다. 이 용어는 로마 카톨릭이나 은사주의라는 말만큼이나 비 성경 적이다」
무슨 근거로 이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으나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교회의 명칭이 성서적이 아니라는 말인가? 그리스도께서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마16:18)라고 하셨으니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면 무슨 교회라는 말인가? 물론 성서의 지역 교회(갈라디아 교회, 에베소 교회 같은 것)를 나타내는 이름 말고 "하나님의 교회"(고전1:1) 등의 이름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롬16:16)가 로마에 문안한다고 바울은 말한다. 그렇다면 그 당시 존재하던 모든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이었음이 분명하여지지 않는가? 그리스도의 몸(단수)인 교회를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한 일이 신구약 성경에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교회들"(롬16:16)이란 교회 명칭이 성경에 엄연히 있음에도 그것을 비성경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담력은 아마도 성경에 대한 무지의 소치가 아니고서야 어찌 그렇게 말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문안한다'(롬16:16) 는 말을 '그리스도의 교회_들이 너희에게 문안한다'로 바꾸어 읽는다 하더라도 거기에나 무슨 잘못됨이 있는가? 러크만에게 묻는다. 여기의 "그리스도의 교회들"이란 그리스도의 몸은 아니라는 말인가? 필자는 그 모든 그리스도의 교회들이 다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믿는다. 복수인 건은 보이는 지역 교회들을 말하는 것으로서 교파가 존재하지 않던 그 당시의 "그리스도의 교회들" 즉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한다는 것은 그 당시 존재하였던 모든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이었음을 확증하는 것이 아닌가! 필자는 다른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고 생각지 않는다. 다만 교회의 명칭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교회"는 정녕 성서적 명칭이라고 확신한다. 십자가의 구속사역을 완성하심으로 메시아 곧 그리스도로 확증 된 그 분을 머리로 하는 그의 몸 된 교회의 이름이 그리스도의 교회만큼 타당한 이름이 또 어디에 있을 수 있겠는가? 더욱이나 그리스도께서 자기 피로 값을 주고 사신 교회(행20:28)가 아니던가? 그럼에도 이러한 교회의 명칭을 비성서적이라니 그 자체가 비 성서적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Ⅱ.매주 만찬 시행의 문제
다음으로 피터 5. 러크만은 매 주일 만찬 행하는 일을 이단적 행위로 규정하고 사도행전20:7은 그 근거가 될 수 없다고 한다. 즉 그는 행20:7의 떡을 떼는 것이 고전 10장과 11장에 나타난 것과 같은 "주의 만찬"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을 사사로이 해석한 결과일 뿐이라 한다 계속하여 그는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은 행20:7의 떡을 떼는 것이 성찬식 저녁 식사가 아님을 알고 있다면서 그 까닭은 행2:46에서 떡을 떼는 것은 매일 행하는 일이었고 교회 건물 안에서 행한 일이 아니라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행한 일이기 때문이라 한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께서 마14:19과 눅24장에서 떡을 떼셨을 때는 주의 만찬이나 성찬식이 성체나 미사는 없었다고 덧붙였다. 우선 "성찬식 저녁 식사"라는 표현으로 볼 때에 러크만도 주의 만찬은 단순히 작은 떡을 떼는 것이 아니라 식사도 겸하여 행하여 졌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보여 진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행20:7이 고전10장과 11장에 나타난 주의 만찬이 아니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바울 사도는 분명히 분쟁이 있는 고린도 교회는 "함께 모여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다"(고전11:20)고 말하기 시작함으로 "주의 만찬"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그들이 함께 모여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는 이유를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이는 시장하고 어떤 이는 취하기 때문이라"(고전11:21)고 하면서 바울 사도는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고전11:22)고 책망한다. 그러고는 주께로부터 받은 바 주의 만찬에 대한 의의를 다 설명하고(고전11:23~32) 결론으로 "그런즉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 찌니라"(고전11:33~34)고 말한다.
그러므로 밝혀지는 것은 초대교회 당시의 주의 만찬은 식사와 같이 행하여 졌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행20:7의 떡 떼는 것은 주의 만찬이 아니라고 하는지? 러크만의 이유는 행2:46이다. 물론 러크만의 주장처럼 그것은 매 주일 마다가 아니고 날 마다 뗀 떡이었고 교회에 모여서 뗀 떡이 아니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주의 만찬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행20:7의 떡 떼는 것도 주의 만찬이 아니라고 하는 러크만에게 묻는다 행2:46이 주의 만찬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어찌하여 행20:7이 주의 만찬이 아닌가? 왜 행20:7의 "떡 떼는 것"이 주의 만찬이 아니라는 근거를 행2:46의 말씀으로 드는가? 러크만은 행2:42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주의 만찬이라고 생각지 않는가? 여기의 "떡을 떼는" 일은 교제하는 것과 전혀 기도에 힘쓰는 일과 병행되었음을 말하는데 이것을 단순히 떡 먹는 식사로 볼 수 있겠는가? 더욱이나 그러한 일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시행되었던 일인데 이것이 "주의 만찬"이 아니고 무엇인가? 사도들이 처음 세례 받은 자들에게 "떡 떼는 법" 곧 식사하는 법을 가르쳤을 리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행20:7의 떡 떼는 것이 이 성구(행2:42)와 연결된다고 생각지 않고 어찌하여 행2:46과 연결시켰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흔히들 말하는 것처럼 행20:7의 "떡 떼는 일"은 그 이튿날 바울 사도가 그 에베소 지방을 떠나고자 하였기에(행20:7b) 그 송별연을 위한 잔치의 떡이라고 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데 결코 그렇지 않다. 그 까닭은 행20:7은 "떡 떼려 하여 모였더니"라고 함으로서 떡 떼는 것이 그 모임의 목적이었다는 사실이다. 바울 사도의 송별을 위한 모임이었다면 떡 떼는 것을 목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한 모임의 식사는 부수적인 것이지 그 식사가 모임의 목적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나 "안식 후 첫 날"이라는 말씀이 그 떡 떼는 것이 단순히 잔치를 위한 식사가 아니라 주의 만찬이었음을 나타낸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교회가 매 주일 모여서 예배 드리는 것은 이때로부터 즉 초대 교회 때로부터 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정말 순전히 바울의 송별연이었다면 그 날을 굳이 "안식 후 첫 날"이라고 밝힐 필요가 있는가? 그것이 개인적 서한도 아닌데 말이다. 영원히 이 세상 종말까지 읽혀져야 할 성경인데 거기에 어떤 사람이 어느 지방을 어느 날짜에 떠났다는 것 같은 기록은 전혀 없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 본문은 "안식 후 첫 날"이라고 즉 년, 월, 일, 시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안식 후 첫 날"이라는 예배 드리는 날짜를 밝히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날 모임의 목적으로 "떡 떼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이 "주의 만찬"이 아니라면 그 사람들이야말로 성경을 성경대로 믿지 않는 사람들이 분명하지 않는가? 아마도 이렇게 생각할 수는 있을 것이다. 바울 사도가 에베소 지방의 선교를 일단 멈추고 그 고장을 떠나려 하였을 때 마지막으로 주일 예배를 그 지역 성도들과 함께 드리고 떠나려는 계획을 세웠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래야 그 지방의 성도들도 다 한번씩 만나볼 수도 있고 주의 만찬과 더불어 교제도 하려하였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추측에 불과하다. 분명한 것은 "안식 후 첫 날"에 저희가 "떡을 떼기 위하여" 모였다는 이 성서 본문을 그 누구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러크만도 인정한 고전11장의 만찬에 대한 기록에 보면 주의 만찬을 "먹으려 모일 때"(고전11:33)라고 함으로써 주의 만찬을 먹는 것이 목적으로 표현되었다는 사실이 행20:7의 "떡 떼는 것"도 주의 만찬인 것을 또 한번 확증한다 또한 주님이 떡을 떼었던 그 주의 만찬에는 성체도 미사도 없었다는 러크만의 말은 지극히 옳지만 어느 누가 주의 만찬을 성체화 한다는 말인가? 이단 연구라는 제목 하에 그리스도의 교회를 제일 먼저 리스트에 올린 그가 이 대목에서 이런 말을 한 것은 근거 없는 거짓말이다. 러크만이 "이단"이라고 한다 해서 이단일 수도, 이단이 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근거 없는 거짓말로 성경대로 믿으려는 사람들을 이단 시비하는 자들이야말로 이단이 아닌가 한다.

Ⅲ.세례의 중생설 문제
「이 교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사로이 해석해서 생긴 거짓 교리 중에서 많은 사람을 지옥으로 가게 하는 저주의 교리이다. 이 누룩은 실로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다. 물을 언급한(요3:3~6 참조) 모든 구절에 세례란 단어가 없음에도 세례와 연관 지어서 본문을 읽기 때문에 이런 거짓 교리가 생겨난 것이다. 성경대로 믿는 사람은 골2장, 엡4장, 갈3장에 나오는 세례는 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요3:3~5에 나오는 물도 세례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모든 믿는 자들은 예수그리스도 안으로 연합하는 것은 성령세례(고전12:13)이며 이것이 엡4:5에서 말하는 한 세례이다. 이 세례를 받아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믿는 사람들이 오순절에 있었던 유대인의 물세례(행2:38)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신약에 나오는 사도들 중 어느 누구도 행2장에 따라 세례를 받지 않았다. 바울에게 세례를 준 아나니아는 바울이 물 속에서 세례를 받기 전에 바울을 "형제"라고 불렀으며(행22:13) 세례를 받자마자 성령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사도들은 오순절이 되기 40일 전에 성령을 받았다(행 20:22). 바울에게 세례를 준 아나니아는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으로(행22:12) 여전히 유대인의 율법을 지켰다(행22:12). 바울에게 침례를 줄 때 아나니아는 갈1:8~12의 계시를 알지 못한 것이 확실하다. 아나니아는 구약의 모든 유대인들이 그랬던 것처럼(히9:19, 요2:6 참조) 정결례(행22:16)를 여전히 물과 연결시켰다」
먼저 요 3:3-6에 세례란 말이 없는데 거기의 "물"을 세례라고 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을 지옥에 가게 할 저주의 교리라고 한 러크만은 그 "물"을 무엇으로 해석하는지 사뭇 궁금해진다 "거듭난다"는 것이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임을 밝히는 그 본문에서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요3:6)이라 하심으로써 거듭난다는 것은 성령으로 나는 것임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거기의 "물"은 무엇이며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중생 곧 거듭남은 성령으로 나는 것이라 하여 성령의 중생 사역이라는 측면만 생각하고 강조하면서 "물"이라는 측면을 배제(도외시)하거나 약화시킨다. 분명히 중생은 성령으로만이 아니고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이라 하셨다. 따라서 어떤 사람들은 중생은 성령의 전적인 사역이기 때문에 거기의 "물"도 "성령"으로 해석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성령을 기름으로 말한 곳(요일2:27)이 있기에 기름은 물과 같은 액체이며 기름도 정화의 의미로 사용된 경우도 있다는 점을 들어 "물"을 성령으로 이해하려 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물과 성령이 아니라 성령과 성령으로 난다는 말이 됨으로 모순이다. 성령이 반복된 것은 그 만큼 중생은 전적인 성령의 사역임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전지전능한 삼위일체 하나님이신 성령께서 무슨 피조물처럼 반복 강조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므로 오류이다 또 어떤 이들은 이 성구의 "물"을 "말씀"이라고 한다. 까닭은 거듭나는 것이 말씀으로 된다.(벧전1:23이하)는 말씀 때문이다. 그리하여 "물과 성령"은 "말씀과 성령"으로 이해되는 것이 오늘 우리 시대에 가장 많은 지지를 받는 정설로 통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면 주님께서 '거듭남'이란 '말씀과 성령'으로 나는 것이라 하실 것이지 왜 "물과 성령"이라고 말씀하셨겠는가? 실로 여기의 "물"과 조화, 연결시킬 수 있는 성구가 벧전1:23이나 그와 같은 맥락 이외의 말씀이 성서 상에 전혀 나타나 있지 않다면 모르지만 말이다. 베드로는 "물은 세례"(벧전3:21)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이 상근 박사도 그의 주석에서 이 성구의 "물"은 "세례"로 봄이 가장 자연스럽다. 고 했다. 물론 여기에 이의를 제기할 자들이 있을 것이다. 세례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고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기 때문에(벧전3:21b) 물세례로는 그것이 불가능하며 그리스도의 할례로 묘사된 세례는 곧 손으로 하지 아니하는 할례로서 육적 몸을 벗는 것이니까(골2:11~12) 역시 물세례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유는 물이 어찌 육적 몸을 벗는 일을 하며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일을 하게 할 수 있겠는가? 함이며 또 요3:3~6과 관련하여서도 물이 어떻게 사람을 거듭나게 하겠는가? 는 것이다. 먼저 생각하여야 할 것은 중생에 있어서 "물"이 분명히 그 한 요소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인간들은 물은 우리를 거듭나게 할 수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주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것이 아닌가? 거기의 "물"은 실제로 물이 아니고 다른 그 무엇일 것이라는 발상 자체가 말씀을 말씀대로 받지 않으려는 분 신앙이다. 그리고 그 물은 세례라고 증거 하는 성경이 있는데 이것이 성경을 성경으로 풀고 해석하는 최고의 권위적 성경 해석법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해석을 억지로 풀었다거나 사사로이 풀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필자도 자연수로서의 물 자체가 우리를 거듭나게 한다든지 육적 몸을 벗게 한다든지 또는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게 한다든지 그렇게 믿지는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면 물을 통해서 그보다 더한 일도 하실 수 있음이 사실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물을 통해서라기보다 세례를 통해서 성령께서 거듭나게 하시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것이 주님의 말씀이요(요3:3~6) 명령인 것이다(마28:19). 그러므로 골2장, 롬6장, 엡4장, 갈3장에 나타난 세례는 거기에 물이라는 말이 없기에 물세례가 아니라면 거기 어디에 성령이라는 말이 있어 그것을 성령 세례라고 하는가? 이상에서 살펴본 바대로 그것을 물세례라고 하면 자연수로서의 물이 어떻게 거듭남 같은 영적 역사를 일으킬 수 있겠느냐는 인간적 생각 때문에 그런 것을 다 성령의 세례로 보려는 것이다 실로 인간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려는 인본주의의 전형이 아닐까 한다. 주께서 물로 거듭나게 하시겠다는 데 왜 물은 안된다고 생각하는가? 이제 여기서 한 가지를 더 짚어야 한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것이니라"(요1:12~13)는 이 말을 근거로 하여 중생이란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 곧 그를 믿는 것이라고 믿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즉 믿은 것이 하나님께로서 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같은 요3:3~5의 거듭남에 대한 말씀과 조화가 되어야 한다. 그것도 양편이 모두 주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다. 이미 앞에서 보았듯이 거듭남에 있어서 "물"이 세례라면 요1:12~13과 모순된다고 생각할 자들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까닭은 막16:16이 그 해답이다. 세례는 믿음의 표현이며 믿음 안에 포함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행19:1~6도 그 해답이다. 이에 대해서는 더 구체적으로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다만 막16:16을 도식화하면 믿음+세례=구원이고 믿음-세례=정죄이다. 믿지 않는 자에게는 세례가 불필요하다.

Ⅳ.사도들이 세례(행2:38)를 받지 않은 이유
다음으로 러크만은 신약에 나오는 사도들은 행2:38에 의한 세례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들어 그 세례의 죄 사함의 효능을 부정 또는 약화시키려는 것 같고 따라서 바울 사도가 받은 세례도 그 세례가 아니라 구약 시대에 시행하여 오던 "정결례"로 해석하려고 애를 쓴다 먼저 바울이 받은 세례를 어떻게 구약의 정 결례라고 할 수 있는가? 러크만을 이를 입증하기 위하여 바울에게 세례를 준 아나니아가 유대교로부터 개종한 사람으로 여전히 율법을 지키던 사람(행22:12)이라고 말할 뿐만 아니라 바울에게 세례를 줄 때 그는 갈1:8~12의 계시 곧 복음에 대하여 알지 못한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구약의 모든 유대인들이 그러하였던 것처럼 "정결례"(행22:16)를 물과 연결시켰다고 주장한다. 우선 유대교로부터 개종한 자이지만 여전히 율법을 지켰다는 러크만의 생각은 그 자체가 모순이다 어찌 여전히 율법을 지키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보내었을까? 여전히 율법을 지키는 사람을 하나님이 복음시대의 일꾼으로 쓰셨다는 말인가? 우리는 도저히 그렇게 믿을 수 없다. 더욱이나 그 곳 다메섹에는 상당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살고 있었으며 그들의 신앙적 영향력이 매우 컸기 때문에 그들을 결박하여 투옥하기 위하여 바울이 거기에 가던 도중이 아니었던가? 대제사장이 그같은 권세를 문서(공문)로 보장해 준 것은 이를 뒷받침하는 의미가 아닌가? 그런데 그 곳 그리스도인 가운데 여전히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 있었다 하니 그것도 대 복음 전도자 바울에게 보낸 하나님의 일꾼이 여전히 율법을 지키는 자였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다. 그 많은 다메섹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하필이면 여전히 율법을 지키는 자를 하나님께서 불러 쓰셨겠는가 하는 것이다. 성경본문 행22:12에도 여전히 율법을 지켰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다만 율법에 의하면 "경건한 사람"이라고 되어있을 뿐이다. 즉 "율법에 의하면" 그렇다는 것이지 그가 여전히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말씀은 아닌 것이다. 또한 그가 갈1:8~12의 계시를 알지 못한 것이 확실하다는 말도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기에 이해가 안 된다. 어쨌든 간에 그런 식으로 바울이 받은 세례를 子약의 정 결례라고 말하는 것은 더 오류이다. 한 마디로 묻겠다. 만약 세례가 구약의 정 결례라면 어찌하여 그것을 "결례"라고 부르든지 할 것이지 "세례"라고 말하며 또한 세례가 구약의 정결례 라면 어찌하여 새로이 세례를 명하였겠는가?(마28:19, 막16:15~16) 그러므로 바울이 받은 것은 확실히 세례이다. 성경 본문도(행22:16) 그것을 세례라고 말하지 정결례라고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약의 모든 사도가 세례 받지 않았다는 러크만의 말은 거짓으로 판명되는 것이다. 그 다음 베드로를 위시한 사도들(바울 제외)이 행2:38에 의한 세례를 받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이 사실이 이 세례의 의미를 약화시킬 수는 없다. 먼저 러크만에게 묻고 싶다. 행2:38이 유대인들에게 해당된다는 러크만은 유대인들인 사도들이 어찌하여 이 세례를 받지 않았는지 말이다. 그것이 유대인들 곧 너희와 너희 자녀와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적용되는, 다시 말해서 모든 유대인들에게 적용되는 말씀이라면서 쏴 12사도들은 이 세례를 받지 않았는지? 도리어 러크만의 견해를 묻고 싶다. 필자는 이 문제에 대하여 설명할 기회가 있는 것으로 보고 여기서는 한 마디로 12사도는 이 세례를 주라는 명령을 받았지 이 세례를 받으라는 명령은 않았기 때문이라는 말만하고 싶다.

V.사도들이 오순절 40일전에 성령 받았다는 문제
이제 사도들이 오순절 40일 전에 성령을 받았다는 러크만의 주장에 대하여 말할 차례이다. 이 근거로 인용된 성구가 행20:22로 되어 있는데 아마도 요 20:22의 오기라고 보고 설명하겠다. 물론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요20:22)는 말씀의 헬라 원어의 시제로 볼 때 성령을 받은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만약 그렇다면 오순절에 와서는 성령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게 되면 성령을 두 번 받는다는 논리적 결과를 피할 길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요20:22에서 사도들은 성령 받고 오순절에 와서는 그 받은 성령이 충만하여 진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오직 너희에게 성령이 임하시면"(행1:8)이라는 말씀이나 행2:33같은 말씀으로 볼 때 오순절날에도 성령을 받은 것이 확실하다. 또한 요즈음 어떤 일각에서는 안으로 오는 성령과 위로 오는 성령을 구분하여 이런 문제를 설명하려 하나 성령을 이중으로 받는다는 입장을 면할 수 없다 성령은 한번 받는 것이다. 인격적 존재이시기 때문에 물이나 기름을 붓듯이 적게 부을 수도 있고 많이 부어줄 수도 있어서 몇 차례씩 부어주시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성령은 단 한번 믿는 자의 심령에 임재 하신다. 그렇다면 요20:22과 오순절을 조화시킬 문제이지 택일의 문제는 아닌 것이다 만약 성령 세례(행1:4~5, 2:1~4)를 어느 시점에 시행되다가 없어질 시한부적인 특별한 것으로 본다면 양자는 억지로라도 조화될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럴 경우에도 어느 하나는 성령 자체의 임재라고 보아서는 안되고 성령의 능력의 현상적 임재라고 하든지 하는 방식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따라서 그 양자를 다음과 같이 조화하는 것이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볼 때에 적절할 것이다. 예수그리스도는 새 창조주이시다(고후5:17). 십자가 구속 사역이 새 창조 운동의 결정적 완성이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처음 창조 때 하나님께서 "숨을 불어넣어"(창2:7) 인간을 생명으로 창조하였듯이 숨을 내어 쉬면서 "성령을 받으라" 하신 것은 새 창조의 시작을 알리며 그 새 창조에 있어서 생명은 "성령"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기에 이것은 성령 받을 것을 내다보시며 하신 말씀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까닭은 그리스도가 부활이후이긴 하지만 아직 승천하기 전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진정한 완성은 하늘에서 온 그가 하늘로 회귀하고 난 다음부터이기 때문이다.

1) P7 다섯 가지 이단 연구, 피터 러크만 저, 윤지영 역
2) Pl2 上同
3) P7-8 다섯 가지 이단 연구, 피터 러크만
4) P8-9 다섯 가지 이단 연구, 피터 러크만
5) P7O 요한복음 주석 이 상근 저



Peter S. Ruckman을 비판한다[Ⅱ]
유대인의 침례에 대하여
Ⅰ. 피터 러크만은 그의 작은 저서 "일곱 침례"라는 책자에서 네 번째 침례를 "유대인의 침례"라 하면서 이를 행전 2:38에 나타난 침례라고 주장한다. 그는 성경의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다고 말하면서 그러나 적용에 있어서는 구약 시대의 율법을 우리에게 문자적으로 적용하기는 어렵고 신약 시대의 구원의 방법을 구약 성도들에게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렵다고 한다(주P29-30 일곱 침례, 피터 S. 러크만 저). 이 말은 옳다. 또한 그는 물론 그 자신은 신구약의 모든 성구들을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고 하나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과 문자적으로 적용하는 것과는 분명히 다르다고 한다. 그는 특히 신약 성서 중에도 마태복음이나 사도행전이나 히브리서에는 오늘날 우리에게 교리적으로 적용될 수 없는 구절들이 종종 발견되는데 이러한 성구들을 잘못 해석함으로 사람들은 오류에 빠지게 된다고 한다(주P30 상동). 이것까지도 무리는 없다. 그런데 행 2:38이 그러한 성구 중의 하나라는 데에는 우리는 전혀 긍정할 수 없다.
"사도행전 2장에서는 아무리 눈에 불을 켜고 찾아보아도 신약의 구원을 찾아 낼 수 없다. 행 2:37의 유대인들의 질문은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이지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하여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를 물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계속하여 러크만은 "아무도 거기서 어떻게 해야 구원 얻는지를 묻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행 2:38의 대답은 전혀 구원 계획이 아니다. 그들은 '우리는 우리의 메시아를 십자가형에 처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라고 물은 것이다. 그리고 기기에 있던 사람은 모두 유대인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질문은 우리가 그를 못박았다는 견지에서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 이지 구원의 방법을 묻지 않았다"는 것이다(주P30-31 상동).
눈에 불을 켜고 찾아보아도 행 2장에는 신약의 구원은 없다는 러크만에게 묻는다. 그렇다면 행 2장은 구약시대에 해당된다는 말인가? 그리고 신약 곧 새 언약 시대는 과연 언제부터인지 말이다. '첫 언약도 피가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다'(히 9:18)는 말씀은 새 언약도 피로 세워졌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씀임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새 언약은 무슨 피로 언제 세워졌는가?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전날 밤, 소위 최후의 만찬 석에서 특히 "잔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제자들에게 마시라 하시면서 이 잔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막 14:24)라고 하심으로써 예수께서 흘리실 피가 "언약의 피", 그것도 "죄 사함을 얻게 하려는" 언약의 피라는 사실을 확증한다. 그렇다면 이 "언약의 피"는 과연 옛 언약의 피인가? 새 언약의 피인가? 물론 새 언약의 피이다. 역시 위의 성구들과 병행구인 최후의 만찬 석에 대한 누가의 증거를 보면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눅 22:20)이라고 선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의 피가 새 언약의 피이다. 이 피가 세상 죄를 지신 어린 양(요 1:29)으로서 예수께서 흘리신 십자가의 피라는 사실에 이의가 있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옛 언약도 피로서 세워졌으나 짐승의 피로서 세워졌으며(히 9:18-22) 새 언약은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피로서 세워졌다(벧전 1:18-19 참조). 그러므로 행 2장은 분명히 새 언약의 피가 흘려진 이후이기 때문에 거기에 신약의 구원은 눈에 불을 켜고 찾아보아도 없다는 러크만의 주장이 얼마나 허구인가 함이 밝히 드러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터 러크만은 "오순절 당시에는 단 한 명의 그리스도인도 없었다(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행 11:26에서 처음 나온다). 그때는 베드로를 포함해서 그 누구도 자신의 죄가 갈보리에서 제거되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베드로는 행 3:19에서 미래에 죄가 제거될 것이라고 설교했음에 유의하라). 즉 이 당시에는 그리스도께서 완성해 놓은 일(갈1:8-12)을 믿음으로서 은혜로서 구원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거기에 있었던 사람들 중 구원 얻는 방법이나 구원받기 위해 해야 할 일이나 거듭나는 일이나 영생을 얻기 위해 해야 할 일이나 하늘나라에 가는 방법을 묻는 사람은 없었다. 오순절 날에 모인 유대인이나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은(행 2:5, 14, 22, 36 참조) 그들이 메시아를 못박았다(행 2:36-37)는 사실에 입각해서 자신들이 죄 사함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물었을 뿐이다"(주P9-10 다섯 가지 이단 연구, 피터 S. 러크만 저). 즉 베드로의 메시지를 들은 그들이 던진 질문은 단순히 "우리가 어찌할꼬"이지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겠는가"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행 2:38은 구원에 대한 질문의 대답이 아니라 함이다(주P30, 31 일곱 침례, 피터 S. 러크만 저). 그러므로 행 2:38을 가지고 구원 계획을 가르치는 것은 참으로 사악한 일이라고(주P10 다섯 가지 이단 연구 피터 S. 러크만 저)까지 러크만은 말한다. 그러기에 행 2장에는 구원의 계획이 나오지 않으며 적어도 행 8장-28장에서 설명되는 것과 같은 구원의 계획은 없다(주P57,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 96년 5월호).
먼저 행 2장에는 구원 계획이 없으며 38절을 가지고 구원을 가르치는 것은 사악한 일이라고 까지 말한 러크만에게 묻는다.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박은 민족적 죄악을 사함 받는 것은 구원과 무관한가? 더욱이나 성령은 구원의 보증과 인 침으로 임하시는 것인데(고후 1:22, 엡 1:13) 구원과 무관한 세례(38절)를 받음으로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는 말인가? 더욱이나 38절에 이어 그 약속이 주어질 대상을 39절에서 설명한 베드로가 계속하여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40절)하였더니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3천이나 더하여 졌다"(41절)하신 말씀에서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는 말씀은 확실히 38절의 말씀이 구원과 직결되는 말씀임을 확증하며 그것도 단순히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박은 죄에서 만의 구원이 아니라 "이 패역한 세대"에서의 구원이라는 사실을 러크만은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또한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행 2:47)는 말씀은 행 2장에 나타난 말씀이 아니라는 말인가? 그러므로 행 2장에는 구원에 관한 말씀이 없다는 러크만의 거짓이 드러난다. 동시에 여기 "구원받는 사람"이란 유대인들만을 말한다고 할 수 없음은 그러한 근거를 그 본문에서 찾을 길이 없기 때문이며 설령 유대인들만을 말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 유대인들로써 구원받는 사람을 뜻하는 것이기에 러크만의 거짓은 확실하여 진다. 그리고 "제자"의 수가 더하여 졌다는 말씀도 구원받는 사람이 "더하여 졌다"(행 2:47)는 의미로 이해됨이 메시아를 못박은 민족적 죄악에서 벗어났다는 의미보다 더 본문에 가까운 것이 신약 성서의 맥락이다. 한 마디 더한다면 "그 말을 받는 사람들"(41절)이란 "회개하여 각각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38절)는 말씀을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받는" 말씀으로 받아들였던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이와 같이 베드로의 대답은 단순히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민족적 죄악에서의 벗어남이 아니라 "이 세대"에서의 구원을 말하는 것임이 확인된다. 그럼에도 "우리가 어찌할꼬"라는 유대인들의 질문이 구원의 방법에 대한 물음이 아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대답인 38절이 구원과 상관없는 말씀이라는 것은 너무 단편적이다. 즉 베드로의 메시지가 무엇에 관한 것이었는가를 러크만은 왜 묻지 않는지 모르겠다. 베드로의 메시지가 단순히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박은 죄만을 책망하는 내용이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까닭은 우선 "우리가 어찌할꼬"라는 유대인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베드로의 메시지가 선포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그 메시지의 내용도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행 2장에 나타난 베드로의 메시지의 내용은 무엇이었는가?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을 증거 하는 것이었으며 그렇기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행 2:21)는 구원의 메시지였다. 즉 오순절 성령세례의 의미는 예수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메시지에 있었다. 이것이 성령이 오신 목적이기도 하였기 때문이었다(행 1:8, 요 15:26, 16:14-15, 14:26 참조). 오순절주의 자들과 더불어 우리가 일반적으로 오순절에 대하여 가지는 관념, 곧 성령의 능력이나 황홀함 같은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증거 하는 것이다. 즉 오순절의 의미는 성령에 초점이 있지 않고 예수그리스도에 있다. 베드로는 자기들에게 임한 방언 현상을 새 술에 취하였다고 조롱하는 자들 앞에서 그것은 술 취한 현상이 아니라 자기의 영을 "모든 육체"에게 부어주시겠다 하시던 요엘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라는 사실을 선포하면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선언함으로서 요엘 선지자의 예언이 성취되는 날, 곧 모든 육체에게 성령이 오시는 때가 되면 그때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게 되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 없이 문자 그대로 "누구든지" 구원 얻는 시대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리는 메시지임에 틀림없다. 베드로의 설교의 요지는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예수가 바로 그들이 대망하여 오던 메시아"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셔서 이 사실을 증거 하였다고 하며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 곧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부어 주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증거 하시기 위해 오신 성령이(요 15:26) 말하게 하심을 따라 선포된 메시지는 역시 그리스도의 죽고 다시 사심을 핵심으로 하는 그의 구속 사역에 대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어찌할꼬"(37절)라는 유대인들의 질문이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라는 질문이 아니기 때문에 행 2:38은 구원받음에 대한 말씀(답변)이 아니라는 러크만은 얼마나 허구인가 함이 드러난다. 먼저 이미 지적된 바처럼 못박은 유대인들의 민족적 죄악을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겠는가? 하는 질문에 의한 답변으로서의 메시지가 아니라는 사실과 그 메시지의 내용도 그러한 민족적 죄만을 회개할 것을 촉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Ⅱ) 또한 행 2장에는 구원의 계획이 나타나 있지 않다는 근거로서 러크만은 행 11:26에 와서야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불리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선 그렇게 그리스도인이라 불리어진 것이 누구로부터였는가? 다른 사람들로부터였다. 즉 하나님께서 비로소 그들을 그리스도인이라 부르셨다는 뜻이 아니라 세인들로부터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호칭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로부터 그리스도인이라 불리어지기 이전에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말인가? 그럴 수 없다. 또한 그렇다면 행11:26 이전에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로 구원 받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는 말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러크만 자신도 행 2장에는 행 8장 - 28장에 나타나는 구원은 없다고 말함으로서 행 8장에는 구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니 자가당착이며 필자가 이미 지적한 바 있듯이 행 2:47에도 이미 구원 받는 사람을 주께서 날마다 더하여 주셨다 하심으로 구원은 행 11:26 이전에도 있었음이 확실하다. 또한 오순절 당시에는 베드로를 포함해서 그 누구도 자기의 죄가 갈보리에서 제거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면서 그 근거로 제시한 행 3:19은 죄가 미래에 제거될 것이라는 내용은 없다. 물론 이 때에는 신약성서는 그 어떤 것도 기록되지 않은 때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갈 1:8-12에 나타난 것 같은 복음의 이해가 불완전한 자들이 복음 사역에 쓰임을 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더욱이나 사도들의 경우에 말이다. 사도들에게는 특히 최후의 만찬 석에서 주님은 자신의 피가 "죄 사함"의 피(마 26:28, 눅 22:20)라는 것을 밝힌 바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에도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에 증인이라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 입히울 때까지 이성에 유하라"(눅 24:46-49)고 하심으로서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라는 사실과 그것이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라는 사실, 곧 유대인들에게만 아니고 유대인들을 포함한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며 사도들은 이 일의 증인인데 이것을 전파하기 위해서는 "위로부터 능력 입히울 때까지"는 "이 성", 곧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으라 하셨다. 그 위로부터의 능력 입히움이란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으로서 성령세례(행 1:4-5)이었다. 즉 이 능력, 곧 성령세례 받기까지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그러나 성령이 임하면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야 하는데(행1:8) 이것이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복음)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라는 바로 그것이다. 다시 한번 더 말하면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에 대한 증인들이었던 사도들은 "위로부터 능력", 곧 성령세례 받으면 그 다음부터는 이 "죄 사함 얻는 회개"를 예루살렘으로부터 모든 족속에게까지 전파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도들이 실제로 이 "위로부터의 능력", 곧 성령세례를 오순절 날에 받았는데 그들이 전파하여야 할 "죄 사함 얻게 함"에 대하여 아무도 알지 못하였다면 말이나 되는가? 또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복음)의 증인으로서(눅 24:48, 행 1:8) 증거한 설교(행 2:14-36)가 구원과는 상관없는 메시지이고 다만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민족적 죄와만 관계되는 것이라니 이것이야말로 억지 해석이 아니고 무엇인가? 다시 지적하거니와 베드로의 메시지는 유대인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서가 전혀 아니었으며 오히려 유대인들의 질문이 그 메시지를 들은 데 대한 물음이었다. 따라서 행 2:38이 그 메시지와는 관계가 없는 단순히 "우리가 어찌할꼬"라는 유대인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라는 이해도 문제가 있다. 베드로의 메시지가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 곧 구원에 대한 메시지가 틀림없다면 그 설교를 들은 반응으로서 "우리가 어찌할꼬"라는 물음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 우리가 어찌 하여야 하겠는가?" 라는 물음이 아닐 수 없다. 까닭은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 유대인들이 설교를 바르게 이해 못하였던 것이며 베드로 역시 자신이 증거한 메시지를 잘못 듣고 그 메시지와 상관없는 질문을 함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대한 답변으로서만 38절을 선포하였다고 우리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크만은 거기에 참여하였던 사람들이 다 유대인들이기 때문에 행 2:38은 유대인들에게 국한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 39절의 그 대상이 유대인들을 가리킨다고 한다.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라고 한 것은 유대인들이라고 하더라도 "모든 먼데 사람"이란 유대인만을 가리킨다고 보기는 어려우나 이 역시 공간적으로 멀리 있는 유대인들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이라는 말씀은 유대인 들만을 가리킨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까닭은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자들이란 어떠한 대상이 제한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제한성을 나타낸다. 더욱이나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약속이 38절이니 그것이 유대인들에만 제한 적으로 약속된 말씀으로 볼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더더욱이나 이미 지적되었듯이 위로부터 능력 입히움, 즉 성령이 강림하는 때로부터는 죄 사함 얻는 회개, 곧 복음이 "모든 족속"(눅 24:47)에게, 즉 여하한 민족적 한계나 제한없이 전파될 것이라 하였으니 베드로의 선포한 메시지는 확실히 유대인들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이는 베드로 자신의 설교 중에서도 성령강림은 "모든 육체"(행 2:17)에게 부어 주시는 것이며 이 예언의 본문인 요엘 선지자의 글에는 "만민"(욜 2:28-)에게 성령을 주신다 하셨으므로 어떤 민족적 한계가 없는 것인데, 또 다시 말하면 이 성령 받음의 시대가 이미 열린 것을 확증하는데 그 성령 받음에 대한 말씀인 행 2:38이 유대 민족에게 국한된 것이라는 러크만의 오류는 실로 막중하다.
(Ⅳ)『교회시대의 복음(고전 15:1-4)은 물 침례(고전1:17)를 전하는 것이 아니다. 구원의 복음(고전 4:15)을 통해서 거듭나는 것이지 물 침례를 통해서 거듭나는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교회시대에는 회개하고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음으로서 성령을 받는 것이 아니다. 사도행전이 끝나기 전에 이방인들은 물침례를 받지 않는 상태에서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성령을 받았으며(행 10:40-44) 그들이 물 침례가 아닌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다고 성경은 갈 3:14에서 말씀하신다(주P10? 다섯가지 이단 연구). 캠벨주의자들은 향상된 계시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이단 사상을 만들어 내게 된 것이다(요 16:12-13). 그들은 교회시대에 맞는 올바른 성경적 교리로서 바울의 계시(갈1:8-12)를 받아들이지 않고 대신 오술절 베드로의 설교에 비중을 두었다. 그러나 이때는 단 한 권의 신약 성경도 기록되지 않았으며 신약의 구원에 관한 계시가 너무나도 불완전한 상태였기 때문에 시몬 베드로는 토끼나 돼지고기를 먹는 것이 죄라고 생각했다(행 10:1-6). 현대의 캠벨주의의 진정한 영적 성숙도는 이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베드로는 고넬료(행10장)를 만난 후 곧바로 은혜에 곤한 교리를 알게 되었고(행 15:11) 그 이후에는 구원받은 자들에게나 구원받지 않은 자들에게나 두 번 다시 행 2:38을 거론하지 않았다. 신약에서 물침례는 참된 구원의 모형으로 정의되어 있으며(벧전 3:21) 사람의 죄들은 주의 이름을 부름으로(행 22:16) 씻겨진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오순절 이후 물 침례를 받아서 성령을 받은 사람은 있다. 유대인의 오순절 메시지에(행 2:38)의해 구원 받으려는 자들은 자기 의의 참 가련하고 불쌍한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일 뿐이다. 캠벨주의자들이 전하는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 아니다(주P10-11 다섯가지 이단연구).』
교회시대의 복음은 물 침례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는(고전 1:17) 러크만의 견해에 동의하기 어렵다. 먼저 러크만이 인용한 고전 1:17의 말씀과 그 문맥과 배경을 살펴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바울 자신을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함이라는 이 말씀만 보면 세례를 주는 일은 하지 앟아도 되는 것처럼 보일 뿐 아니라 오히려 바울 사도 자신은 전혀 세례를 주지 않은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바울 자신도 세례를 주었고 다만 적은 수의 사람에게 세례준 것을 감사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 까닭은 아무도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받았다고 말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였다(고전 1:14-16 참조). 다시 말하여 보면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보내심이 세례주려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면 바울 사도 자신은 세례를 주지 않았어야 하는데 실제로 세례를 주었다는 사실이 이 말씀(1:17)의 의미가 세례는 완전히 무시하거나 무의미하다는 말씀은 결코 아니 것이다. 그렇게 말하게된 배경을 보면 더욱 명백히 알 수 있다. 고린도 교회에는 분파분쟁이 생겼다.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가 그것이었다. 아마도 세례를 누구에게 받았는가에 따라서 자기들은 그 사람에게 속하였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기에 바울 사도는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고 힐책한다. 따라서 세례의 무용론이거나 의미를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세례가 분파의 이유가 되었기 때문에 세례주게 함이 아니라 복음 전하게 함이라 말한 것이다. 즉 복음을 들어야 믿고 세례 받아도 받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이같은 사실은 다음의 말씀에서 확인된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자는 정죄를 받으리라"(막 16:15-16) 우선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부활 이후 승천 직전에 하신 명령이기에 향후 역사의 종말까지 선포될 말씀이다. 그 다음으로 그 대상이 유대인이라든지 하는 어떤 한 민족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온 천하 만민"이라는 사실인데 그 복음 전파 후에 "믿고 세례를 받는 자"라고 하심으로써 세례는 믿는자에게 수반되는 그러니까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어디를 막론하고 세례도 시행되어야 함을 나타내는 말씀이기 때문에 고전 1:17의 바울 사도의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확실하여 진다. 다음으로 "그리스도안에 일만 스승이 있으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내가 너희를 복음으로 낳았음이니라"(고전 4:15)는 말씀으로서 복음으로 거듭나는 것이지 물 침례로 거듭나는 것은 아니라는 러크만의 말은 문제의 소지가 있다. 거듭난다는 것은 어떤 사도나 목회자와 같은 사람의 영적 아들로 난다는 뜻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로 난다는 의미인데 본문 고전 4:15을 바울의 영적 자녀들을 두고 하는 말이나 러크만이 잘못 인용하였다. 어옇든 복음으로 거듭난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벧전 1:23-25). 그러나 물 침례로도 거듭나는 것은 확실하다. 까닭은 물 침례도 복음이기 때문이다(행 8:35-39).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시대에는 회개하고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음으로(행 2:38) 성령을 받는 것이 아니라고 전제하면서 러크만은 고넬료 가정의 예를 들어(행10:40-44) 행전이 끝나기 전에 세례받지 않은 상태에서 이방인이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성령을 받았다면서 그들이 물 침례가 아니라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다고 성경은 갈 3:14에서 말씀하신다고 강변함에 대하여 전혀 긍정할 수 없다.
먼저, 교회시대에는 행 2:38에 의해 성령 받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은 행 2장은 교회 시대가 아닌 교회 이전 시대라는 말인데 과연 그런가? 결코 그렇지 않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면서 세워진다. 육체로 오셨던 그의 몸은 떠나가시고 교회라는 그의 몸으로 현존하시기 때문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그가 부활승천 하셔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신다는 것은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들과 이 세상뿐만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되는 것이며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케 하시고 그 자신은 만물위에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엡 1:20-23, 빌 2:5-11참조).
다음으로, 고넬료 가정의 경우를 교회시대 구원의 기본으로 보는 것은 성경과 거리가 멀다. 그것은 특별한 경우이다(행10, 11장을 자세히 고찰하라). 이에 대해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논할때가 있을 것이다. 다만 여기서는 믿음으로 성령을 받는다는 성구(갈 3:14)들에 대하여 고찰하겠다. 결론부터 내린다면 믿음으로 성령받는다는 것은 거기에 세례가 배체되어 있음이 아니다. 이같은 사실은 행 19:1-7에서 확인된다. 갈라디아서도, 에베소서도, 골로세서도, 로마서도 다 바울 서신이다. 행 19:1-7의 사건도 바울이 주도한 사건이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2절)라고 바울 사도가 물었다. 이는 믿을 때에 성령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바울이 성령이 있다는 사실조차 들은바 없다고 대답하는(3절) 그들에게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라고 물음으로써 성령받는 것은 세례받음과 관계 있음을 보여주며 동시에 어떠한 세례를 받았느냐에 따라서 성령을 받을수도 그렇지 않을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결국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았다는 그들에게 다시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 성령을 받게 하였다. 그러므로 폐일언하고 "너희가 믿을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라는 말씀은 믿을때에 성령을 받는다는 것을 나타내는 동시에 "믿을때에"라는 그 말씀속에 세례 받는 일 까지도 포함된다는 것을 확증하여 준다. 이것이 바울이 시행하였던 사건이며 오순절 이후 그것도 고넬료 이후의 사건이며 이렇게 세례를 주어 서열을 받게 하였던 바울이 세례없는 믿음만으로의 성령받음을 증거하였다고 우리는 믿지 못한다. 이것이 또한 행 2:38이 오늘날도 유효한 가장 강력한 성서적 근거가 아니고 무엇인가?
(Ⅲ)『발톤스톤과 알렉산더 캠벨이 로마 카톨릭에서 붙었었던 세 번째 교리는 침례가 중생의 수단이라는 이단 사상이었다. 이 교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사로히 해석해서 생긴 거짓 교리 중에서 많은 사람을 지옥으로 가게 하는 저주의 교리이다. 이 누룩은 실로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다. 물을 언급한(요 3:3-6참조) 모든 구절에 침례라는 단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침례와 연관지어서 본문을 읽기 때문에 이런 거짓교리가 생겨난 것이다.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은 골 2장, 롬 6장, 엡 4장, 갈 3장에 나오는 침례는 물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이 무지한 이단들은 이런 식으로 성경을 변개하면서 그들의 거짓말을 성경에서 찾고 있다. 모든 믿는 자들을 예수그리스도안으로 연합하는 것은 성경 침례(고전 12:13)이며 이것이 바로 엡 4장에서 말하는 한 침례이다. 이 침례를 받아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주P8 다섯가지 이단연구)』
우선 발톤스톤과 알렉산더 캠벨이 침례가 중생의 수단이라는 교리를 케톨릭 교회에서 붙들었는지 그것은 필자가 알 바 아니다. 과연 성서가 어떻게 증거하는가가 문제이다. 그러나 필자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세례관과 그리스도의 교회의 세례관은 다르다고 확신한다. 우리는 세례의 필수적인 선행 조건이 믿음이라고 믿는 반면에 로마 카톨릭 교회는 설령 믿음이 없더라도 세례 자체가 죄 사함의 효능을 발생시킨다고 믿는다(주 필히기록). 따라서 우리는 세례란 어떤 것과도 관련없이 독립적으로 자충족적 효능을 발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필히 믿는 자에게 베풀어지는, 그러니까 넓은 의미에서 믿음안에 포함되는 믿음의 한 요소나 믿음의 표현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동시에 우리는 이를 가장 성서적이라고 믿는다. 또한 러크만은 요 3:3-5에 언급된 "물"에 침례란 단어가 없음에도 그것을 침례와 연관지어서 읽기 때문에 그러한 거짓 교리가 생긴다고 했다. 그렇다면 러크만은 그 성구의 "물"을 과연 무엇으로 해석하는지 묻고 싶다. 물론 거기의 물은 중생케하는 한 요소이니까 자연수로서의 물을 의미한다고 말할 사람은 없(있?)을 것이다. 동시에 그 "물"을 "물과는 동떨어진 다른 어떤 것"의 의미로 해석할수도 있을 것이다. 까닭은 "불"이란 의미를 나타내려 하는데 "물"이란 낱말을 사용했을리는 없겠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성구의 "물"은 물 자체가 아니라 하더라도 물로 행하여지는 어떤 것 곧 물과 관계되는 어떤 것일 것임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성서안에서 중생과 관련된 "물"을 무엇이라고 언급하는가? 그러한 성구가 있는가? 있다. 그것은 "물은 세례"라고 증거하는 벧전 3:21이다. 물론 여기에도 어떻게 "물"이 즉 "물 세례"가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게 할 수 있겠는가?라는 의문과 이의가 제기 될 수 있으나 거기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얼마든지 된다. 하나님께서 하시겠기 때문이다. 세례가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이 틀림없다면 물을 통해서라도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역사를 얼마든지 이루실 것이며 그 이상의 역사도 이루실 수 있으시다. 그럼에도 그럴 수 없다는 사고 방식은 지극히 인간 자기 중심적인 불 신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은 골 2장, 롬 6장, 엡 4장, 갈 3장에 나타난 침례는 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고전 12:13에 근거하여 예수그리스도 안으로 연합하는 성령침례(성령세례)에 의하여 되는 것이기에 이 성령세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 것이며 엡 4장에 나타난 하나의 세례도 이 성령세례라고 말하는 것은 역시 성령세례와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베풀어지는 세례와의 관계성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결과라고 생각한다. 먼저 러크만에게 묻는다. 골 2장과 롬 6장과 엡 4장과 갈 3장에 나타난 세례를 왜 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믿는가? 또한 그렇다면 그 세례들은 성령세례로 보는 것인데 거기에 성령이라는 말은 어디에 있기에 성령세례로 보는지?
성령세례와 예수께서 명하신 세례는 근본적으로 같은 것이다.
첫째, 그 대상이 같다(욜 2:28, 행 2:17, 마 28:19, 막 16:15-16).
둘째, 그 기간이 같다(행2:14-, 마28:20)
셋째, 꼭 같이 성령 받는 것이다.
넷째, 공히 십자가의 구속에 근거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를 많은 사람을 지옥으로 가게 하는 저주의 교리, 거짓교리, 성경을 변개하는 사사로운 해석 등으로 표현한 러크만의 입술은 정죄를 좋아하는 너무 거칠은 입술이 아니면 그 자신이 거짓교리의 주인공이 아닌가 싶다.



Peter S. Ruckman을 비판한다[Ⅲ]
유대인의 침례

"회개하라. 그리고 죄들을 사함 받은 것으로 인하여 너희 각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라"고 러크만은 이 성구를 번역 해석한다.
『행 2장은 십자가 사건이 있기 전에 세례 요한이 이스라엘에게 준 세례와는 다르다. 본문은 십자가 사건 이후에 시몬 베드로가 이스라엘에게 준 세례를 다루고 있다. 이 세례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신약적인 구원을 찾을 수는 없다. 행 2장에 있는 시몬 베드로의 세례는 천성에 도달하려고 애쓰는, 비참하게 지옥을 향해 달려가는 잃어버린 죄인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 세례는 메시아를 죽인 그들의 민족을 위한 것이다』(주 P32 일곱침례).
『만약 이 시대를 사는 이방인인 누군가가 구원을 받기 위해 이 구절을 붙들고 있다면 그는 성령의 선물을 받기는커녕 자기의 죄들 가운데서 죽어 지옥에 갈 것이다』(주 P33-34 Ibid). 행전에는 세 가지 질문이 있다. 이 질문들은 행 2장과 16장과 9장에서 발견된다. 행 2장에서는 이스라엘이 묻는다. "형제 여러분 우리가 어찌하여야 하리이까" 행 16장에서는 유대인이 아닌 구원받지 못한 이방인인 간수가 묻는다. 당신이 행전에서 당신의 자리를 찾고자 한다면 행 2장이 아니라 16장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당신이 구원받는 방법은 행 16장에 있다. 16장에 있는 간수는 들어와 엎드리며 "형제 여러분!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내가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묻는다. 그 때 바울은 그에게 회개하라, 자백하라, 믿으라, 세례를 받으라, 항금률을 지키라는 식으로 말하지 않고 다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고 하였으니 이것이 구원을 위한 약속이다. 세 번째 질문이 있다. 행 9장에서는 구원받은 어떤 사람이 엎드려 말한다. "주여 내가 어떻게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라고. 그리고 주께서 말씀하셨다. "일어나서 성읍으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네가 행할 일을 말해 줄자가 있을 것이다"(주 P35 Ibid) 거기서 그는 세례를 받았다. 이와 같이 세 가지 질문에 각각 다른 답변을 듣는다. "우리가 어찌해야 하리이까"라고 묻는 구원받지 못한 유대인들에게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처형한 것을 회개하고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하였고 구원받지 못한 이방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고 하였으며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에게는 일어나서 "성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라 그들이 당신이 할 일을 말해줄 것이다"라고 하였다는 것이다』(주P36 Ibid).
먼저 구원받지 못한 유대인과 구원받지 못한 이방인들에게 적용되는 구원의 방법이 다르다고 하는 것은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복음적이 아니며 성서의 말하는 바도 아니다. 물론 러크만은 유대인들에게 적용된다고 하였던 행 2:38과 같은 것은 과도기적인 것이라고 한다(주 P58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 96년 5월호). 다음으로 러크만은 행 2장에는 신약적 구원이 없다면서 시몬 베드로가 선포한 세례는 십자가 이전의 세례요한의 세례와는 다르다고 한다. 물론 십자가 이후에 명하여 지고 시행되기 시작하였던 행 2장에 선포된 세례가 십자가 이전까지만 시행된 세례요한의 세례와는 같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세례요한의 세례를 십자가 이전의 것이라고 말하는 러크만에게 묻고 싶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에게 적용되는 세례는 세례 요한의 세례가 아니었던가? 고 말이다. 물론 이 세례가 십자가 이전의 것이기에 십자가에 그리스도를 못 박은 죄를 회개한다든지 하는 문제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지만 이 세례의 목적이 그리스도를 이스라엘 곧 유대인들에게 나타내려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십자가에 그리스도를 못 박은 죄를 별도로 사함 받아야 한다는 것도 너무 이상하다. 그것도 십자가에 못 박은 당사자들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그 죄에 대하여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 전체에 그것이 적용된다고 러크만은 생각하였던 것 같다. 만약 그러하다면 바로 이것이 러크만이 말한 "왕국 복음"(주 P10 다섯 가지 이단연구) 개념일 것 같다. 즉 메시아는 본래 이스라엘 민족만을 위하는 것이었는데 그 민족이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죄 때문에 교회시대가 생겼다는, 소위 세대주의의 입장이 러크만에게도 있다면 그것은 오류이다. 이방인들로 구성된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그리스도는 그들을 위하여 창세 전에 예정되었다"고 하였다(엡 1:4). 다시 말하면 "창세 전에 그리스도안에서 너희를 예정하였다"는 말씀은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이방인들까지도 그리스도안에서 구원받을 것이 이미 창세 전부터의 계획이라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따라서 본래 구원 계획은 이스라엘 민족만을 위한 것이었다는 식의 사고는 실로 비 성서적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구원받는 은총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차별이 전혀 없는 것이라면 어찌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원의 방법이 차이가 있을 수 있겠으며 그것도 구원이 공식적으로 유대인의 한계를 넘어서는 십자가 이후 시대에 있어서 이겠는가? 필자는 이미 새 언약의 피가 흐른 십자가 이후부터,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오순절서부터는 새 언약 시대라는 사실과 믿는 사람 모두에게 성령을 부어 주는(행 2:17)시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행 2:21) 시대가 열린 것이 오순절에서부터라는 사실을 밝힌바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특별한 죄가 있으니 거기에 따른 특별한 사죄의 방법이 있어야 한다든지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오류이다. 죄가 많던지 적던지 혹은 특별한 죄가 있던지 없던지를 막론하고 모든 죄는 꼭 같이 십자가의 피로 구속 곧 죄 사함을 얻는 것이기에 오직 하나의 사죄의 방법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것의 첫 시행이 행 2:38에 의하여 3천명이 세례를 받은 것이다. 다음으로 러크만은 행 2:38은 유대인들에게만 적용된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행전에는 세 가지 질문이 있다는 사실을 들어 말하려 한다. 행 2:38은 37절에서 유대인들이 제기한 "우리가 어찌 할꼬"에 대한 대답이기에 유대인들에게만 해당된다는 것이다. 즉 그것은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 는 질문도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 참석한 사람들은 다 유대인들이었고 그 유대인들의 질문이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메시야를 십자가형에 처한 죄를 회개하라는 민족적 죄에 대한 방책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이미 충분히 고찰하였다고 생각되어 필요할 때에 아직 거론되지 않는 부분들을 논할 것이므로 여기서는 일단 멈추겠다. 그 다음 행 16:31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은 30절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기에 이것이 오늘날 이방인인 우리들에게 적용되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행 2:38이 유대인들의 질문임에 비하여 이 말씀은 이방인인 빌립보 간수의 물음이라는 것이며 행 2:37은 구원이라는 말이 없음에 비하여 여기서는 확실히 구원의 방법에 대하여 물었다는 것이다(행 16:30). 실로 대단한 변증이다. 그러나 필자의 눈에는 대단한 오류이다. 이제 우리는 그 사건의 본문 전후 문맥을 고찰해 보겠다. 바울과 실라가 어떻게 되어 빌립보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는가? 하는 경위 설명이나 어떻게 하여 손과 발의 쇠사슬이 풀렸으며 감옥 문이 열렸는가? 하는 것 같은 설명은 생략하겠다. 우리의 주제와 관련하여 핵심적 문제는 30절-34절에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첫째로,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이 문자 그대로 이방인에게 적용되는 것이라면 빌립보 간수만 믿으면 그와 그 집은 다 구원을 얻는다는 말인가?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와 그 가족이 다 믿을 때에 구원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여기서의 구원의 조건에는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말씀은 없고 오직 "주 예수를 믿으라"고만 되어 있기 때문에 이방인들에게 있어서는 세례는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다는 러크만에게 묻는다. 그런데 어찌하여 밤 그 시에 그 간수와 그의 권속이 다 세례를 받았는가(33절) 그것은 이미 믿어서 구원받은 자에게 구원의 상징으로서 주어지는 것이라고 러크만 당신은 대답할 것이다. 그렇게 믿고 있으니까(주 P11 다섯 가지 이단연구) 말이다. 그렇다면 다시 묻는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하였으니 믿음의 여부만 확인하였으면, 즉 그들이 믿는지, 그렇지 않는지만 확인하였으면 되었을 터인데 어찌하여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였는가?(32절) 그것은 "주의 말씀", 곧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바꾸어 말하면 그와 그 집의 모든 사람들이 복음을 듣지 않고는 믿음의 여부가 결단될 수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나 복음에 대하여 들은 바 없었을 이방인들에게는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이 사건을 주도하는 바울 사도는 롬 10:17에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그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하였다. 즉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문맥에서 바울 사도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롬 10:14B)라고 말함으로서 복음을 듣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을 강력히 시사한다. 이렇게 성서를 기록한 바울 사도가 단순히 "주 예수를 믿으라"고만 말하고 끝났을 리 없었다. 분명히 그와 그의 모든 가족들에게 주의 말씀을 전하였던 것이다. 특히 우리말 성경에는 "하고"라는 말이 있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과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의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32절)는 말씀을 연결시킬 뿐만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하고 즉시 주의 말씀을 전하는 일이 계속되었음을 나타낸다.
셋째로, 그런데 세례를 전하였다거나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말을 하였다는 기록이 없고 단순히 주의 말씀을 전하였다고 하였을 뿐인데 그들이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무엇을 우리에게 시사하는가? 먼저 주의 말씀을 전하였다는 말씀 속에는 세례까지가 포함된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즉 "복음"에는 세례도 포함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세례는 단순히 구원의 상징일 수가 없고 따라서 받아도 안 받아도 무방한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넷째로, 그것도 "밤 그 시에" 세례를 받았다. 세례란 그렇게 급하게 받아야 하는 것인가? 학습 같은 것을 받지 않고도 말이다. 혹자는 죄수의 몸으로 잠깐 감옥 밖으로 나온 바울과 실라이기에 그날 밤 안으로 감옥 안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니까 밤 그 시에 세례를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세례의 중요성을 희석시킬 수는 없다. 까닭은 세례는 단순히 상징이어서 안 받아도 되는 것이라면 바울과 실라를 그대로 감옥 안으로 들여보내고 세례 받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렇지 않고 "밤 그시"에 받았다는 것은 세례란 필히 받아야 하는 것이며 그것도 믿는 것과 동시에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확증해 준다.
다섯째로, "세례를 받은 후", "저와 온 집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크게 기뻐하였다"(34절B)라는 말씀은 하나님을 믿었다는 그 의미 속에는 세례를 받은 일까지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는 "믿음"이라는 개념 속에 포함되는 믿음의 표현이며 복음의 내용인 것이다. 다시 말한다. 믿고 세례까지 받은 상태를 하나님을 믿은 것이라고 본문은 시사한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 받아야 죄 사함 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행 2:38)는 말씀은 유대인들에게만 적용되고 이방인들은 세례를 받지 않아도 되고 단순히 믿으면 된다는 러크만의 주장은 명백한 오류임이 밝혀지는 것이다.
여섯째로, 이 빌립보 간수의 가족이 받은 세례가 어떤 방식의 세례인가? 하는 문제다. 그것은 물론 침수세례였다고 확신한다. 까닭은 밤 그 시에 간수와 그의 가족이 세례를 받고 난 다음에 바울과 실라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올라갔기(행 16:34A) 때문이다. 즉 이것은 그들이 집 밖에서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말하여 주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그 간수가 저희를 데리고 나갔다(행 16:29)는 말씀이 바울과 실라를 감옥에서 데리고 나갔다는 말씀임으로 34절의 말씀은 그와 같이 감옥에서 데리고 나가서 자기 집으로 데리고 올라갔다는 의미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본문 성서가 시사하는 바는 그렇지 않다. 즉 그렇게 감옥에서 "데리고 나가"(29절)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30절)라고 간수가 물었으며 이에 대하여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31절)고 바울은 대답하고 계속하여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였다"(32절) 하였으니 이 "주의 말씀"을 전한 곳이 어디이겠는가? 그것은 두 말할 필요 없이 그 간수의 집이 아니었겠는가? 이유는 간수 그 사람뿐만 아니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말씀을 전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이란 말은 말씀을 전하던 거기가 그의 집이었음을 확증한다. 그러하였는데 "밤 그 시에 자기와 그 권속이 다 세례를 받은 후 저희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올라갔다"(33-34절)는 것은 그들이 그 집밖으로 나갔던 것이 분명하여 진다. 생각하여 보라 말씀을 듣던 곳이 그 간수의 집이었는데 그 곳에서 세례를 받았다면 어떻게 "세례를 받은 후 자기 집으로 올라갔다"는 말이 성립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들은 세례 받기 위하여 집밖으로 나갔던 것이 확실하다. 이 사실을 더욱 입증하여 주는 말씀은 말씀을 들은 다음 "밤 그 시에 저희를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기고 자기와 그 권속이 다 세례를 받았다"(33절)는 말씀인데 특히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겼다"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주의 말씀을 듣던 곳이 그 간수의 집이었는데 어디서 어디로 데리고 가서 그 맞은 자리를 씻겼다는 말인가? 이는 바울과 실라를 데리고 집밖으로 나가서 어느 물가에로 갔던 것이 확실함을 입증한다. 따라서 33절의 "데려다가"라는 표현으로 볼 때 집밖으로 나갔던 것이 분명한 것은 34절의 "자기 집으로 올라갔다"는 말이 입증한다는 것이며 동시에 맞은 자리를 씻겨준 장소와 그들이 다 세례를 받은 곳도 같은 곳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도 이를 입증하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우리는 러크만이 세 번째 질문이라고 하는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 무엇을 행하여야 할 것인가?" 라는 문제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다. 러크만은 이를 행 9장이라고 하였으나 그 질문 자체는 행 22장에 나타난다. 물론 바울의 경우이다. 소위 '다메섹 도상의 사건'이라 불리우는 바울의 경우인데 그는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 태양 빛 보다 더 강렬한 하늘에서 비추는 빛을 받고 타고 가던 말에서 떨어 졌으며 주의 음성을 들었다. 이 같은 일련의 사건을 일반적으로 바울의 개종, 혹은 바울이 구원받은 사건으로 이해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행 22:10)라는 바울의 질문을 구원받은 자의 질문으로 보며 따라서 그 이후에 받은 세례(행 22:16)는, 그러기에 이미 구원받는 자가 받는 것이지 구원받기 위한 조건은 아니라는 것이 러크만의 입장이다. 필자는 이에 대하여 길게 논하고 싶지 않다. 이유는 이미 이방인과 유대인에 대한 구원의 방법이 다르지 않다는 사실과 세례가 죄 사함과 관련되며 성령 받음의 필수 요건임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 바울의 경우에 있어서도 세례를 받기 전에 이미 구원받은 것이라면 구원은 죄 사함도 받기 전에 받는 것인가? 왜냐하면 바울을 향하여 아나니아는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행 22:16)고 하였기 때문이다. 다시 강조한다. 세례는 죄 사함과 관련된다. 바울도 세례를 받음으로 죄가 씻겨졌다면 그 이전에 구원받는 일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러크만은 "사람의 죄들은 주의 이름으로 부름으로 씻겨진다"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를 사도행전 22:16을 든다. 따라서 여기에도 러크만의 자가 당착이 나타난다. 그는 이미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행 22:10)라는 바울의 질문을 구원받은 자의 물음이라고 하면서 그의 죄는 주의 이름을 부름으로 사하여 졌다(행 22:16)고 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주의 이름을 부름으로 죄도 사하여지기 전의 바울을 이미 구원받은 자로 간주한다는 사실이다. 러크만은 계속하여 말한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사실은 행 2장에서 어떤 사도도 행 2:38에 따라 침례를 받음으로서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열 두 사도는 모두 눅 3:4-16에 따라 침례를 받았으며 그들 모두는 행 2:1-5에서 자동적으로 '성령의 선물'을 받았다. 그 일이 있은지 3년 동안 물은 나타나지 않는다』(주P58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 96년 5월호).
『마술사 시몬도 "믿고" 침례를 받았지만 선물을 받지 못했으며 신약적 의미의 구원도 받지 못했다』(주P58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 96년 5월호).
결국 본문(행 2:38)은 구원을 위한 조건으로는 사용될 수 없으며 침례는 구원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의 의미는 물로 침례를 받지 않으면 '성령의 선물'을 얻을 수 없다고 가르치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행 10:44-47에서 믿을 때에 성령이 임하게 될 때까지 과도기적인 기간에 펼쳐졌던 일시적인 해결책이었을 뿐이다. 본문에서는 침례 받은 이후에 성령의 선물이 임했으나 10장에서는 침례 받기 이전에 임하신 것이다(주P58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 96년 5월호).
피터 러크만은 죄 사함과 관련해서 성경의 본문, 곧 행 2:38을 해석하는 것을 주목하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즉 막 1:4을 "죄들을 사함 받는 것으로 인하여"라고 해석하고 있으며 행 2:38도 "죄들을 사함 받은 것으로 인하여"라고 한다. 러크만은 이것들 중에서 "인하여"(for)가 "때문에"(because of)라는 의미 말고 다른 뜻으로 쓰인 적이 있는지 보라. 없다. 창 4:1-4부터 요 1:29 사이의 기간에는 죄들이 "사해졌으며"(Rimitted, 이것은 일시적으로 덮는 것을 의미한다) 죄들은 황소와 염소의 피를 근거로 용서되었다(히 10:4).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율법을 주실 때 그렇게 말씀하셨다(출 34:7) 헬라어 학자들은 "사함"(Remission)을 "구속"(Redemption)으로 오해했으며 히 9:22을 너무나 오랫동안 그리스도의 피로 적용시키는 바람에 히 9:22의 피는 율법에 따른 것임을 잊어버렸다. 신약 어디에도 "죄들을 사함 받은 것을 인하여"가 하나님께서 죄들을 이미 용서 하셨다는 것 외에 다른 의미로 쓰인적이 없다. 그러므로 그러한 관점에서 죄인은 무엇인가를 해야만 했다.
(1)"사함 받은 것으로 인하여"(막 1:4)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스라엘을 용서하였다. 이스라엘의 그러한 관점에서 이스라엘은 그들이 회개하고 있음을 증명해야 하고 물 아래로 가야 했던 것이다.
(2)"죄들을 사하심으로 인하여"(마 26:28)
4천년 동안 하나님께서는 "죄들과 불의"를 용서해 오셨다. 그러나 그 죄악은 결코 깨끗케 되지는 못하였다(출 34:7). 이제 과거에 "사함 받은" 이 죄들은 깨끗하게 되고 구속되어야(히 9:15) 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러한 사실과 연관해서 자신의 피가 흘려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근거를 가지셔야 했다. 황소와 염소의 피는 불완전한 근거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죄들을 제거하는 것이" 불가능하기(히 10:4)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세상 죄를 제거하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오신 것이다(요 1:29 참조). 우리는 러크만의 3번을 생략한다(주P59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 96년 5월호).
(4)"죄들을 사함 받은 것으로 인하여"(행 2:28)
이 문제에 관해 다른 해답은 전혀 없다. 성경 스스로가 독자들에게 진리를 제시한다. 모든 참조 구절들을 볼 때 "for"는 "그것들이 이미 용서되었기 때문에"로 정의된다. 이 구절에 대한 알렉산더 캠벨의 해석은 완전히 빗나갔다. 성경 어디에서도 "죄들을 사함 받기 위해 침례 받는 것"을 말하고 있는 구절은 없다(주P60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 96년 5월).
이상의 러크만의 견해에서 오류를 지적하고 자한다. 먼저 열 두 사도는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은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자동적으로 성령을 받았다는 사실도(행 2:1-5) 행 2:38에 의거한 세례를 받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긍정한다. 그러나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다른 세례를 받을 필요 없이 자동적으로 성령을 받은 것이라는 뜻이라면 받아들이기 어렵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세례요한의 세례가 마치 성령을 자동적으로 받는 조건이란 의미로 이해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미 지적한 바 있듯이 사도들의 경우 어찌하여 행 2:38에 의한 세례를 받지 않았는지는 밝혀질 것이다. 언젠가 제기한 바 있는 물음을 다시 한번 러크만에게 묻는다. 행 2:38이 유대인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라면 어찌하여 열 두 사도들은 그 세례를 받지 않았는지 말이다. 까닭은 그들도 분명히 유대인들이며 그 세례(행 2:38)가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 박은 민족적 죄에 대한 것이라면 그 세례를 받지 않고도 사도들은 어떻게 사도직을 받았으며 수행할 수 있었는지 말이다. 다음으로 유대인들에게만 적용된다고 하였던 행 2:38은 과도기적인 것이라고 하는데 만약 그렇다면 러크만 자신에게 자가 당착이 있다. 즉 그는 행 2:38의 적용대상을 나타내는 2:39의 해석에서 "너희와 너희 자녀"라는 말을 그들 유대인과 그들의 후손으로 이해하였는데(주 P32 일곱 침례) 행 2:38이 짧은 기간에만 있다가 없어질 과도기적 현상이었다면 그들의 후손들에게는 적용될 수 없다는 의미이니 모순이 아닌가? 더욱이나 그 과도기적 기간을 러크만은 행 2장으로부터 행 10장의 고넬료 가정의 사건까지로 본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이라 하더라도 그 후손들에게는 도저히 적용될 수 없고 오직 그 당시에 이미 출생되어 있는 자녀들에게만 적용된다는 뜻으로 이해하여야 하는바 그 자녀들 가운데 행 2:38에 나타나 있는 대로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회개할 수 없는 유아들의 경우는 어떻게 되는지 의문이며 또한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을 러크만은 역시 공간적으로 흩어져 있는 이 지상의 모든 유대인들을 가리킨다고 하였는데 이들에게도 적용될 수 없는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또 다른 모순은 행 2:38은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에게 적용되는 민족적인 것이라 하였다. 그런데 그것은 짧은 기간동안에만 적용되는 일시적인 것이라면 유대 민족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적용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뜻이니 어찌 그것을 민족적인 것이라 할 수 있겠는가? 더욱이나 오순절 날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우리가 어찌할꼬"라는 반응을 보인 유대인들은 "천하각국"으로부터 모여 온 자들일 뿐 아니라 직접 메시아를 못박는 일에 가담한 자들도 아니지만 러크만은 민족적인 것이라 하여 유대인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라 하였는데 또 다시 그것은 과도기적인 것이라 하면 이것이야말로 자가당착이 아니고 무엇인가? 메시아를 죽인 죄가 민족적인 것이라 하면서 오순절 당시 존재했던 일부의 유대인들이 그 대표적으로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다는 말인가? 왜 그것은 일시적으로 적용되다가 끝났는지 러크만은 설명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행 2:38이 과도기적인 기간 안에만, 그것도 유대인들에게만 적용되었던 것이라는 의미는 그 과도기가 지난 다음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이 없이 구원의 방법은 꼭 같다는 것인데 그럴 경우 메시아를 죽인 유대인들의 민족적 죄악은 이방인과 아무런 차이 없는 방법으로 처리되고 용서받는다는 의미가 아닌가? 그렇게 이방인과 차이 없이 용서받을 수 있는 죄가 왜 오순절 당시에는 특별한 방법으로 용서함을 받는다는 것인지? 반드시 설명해야 할 것이며 러크만은 왜 그 기간을 과도기라 하는지 성서적 근거를 들어 설명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세례를 받고 성령을 받은 3천명(행 2:38-41)의 경우에 비해 세례 받기 전에 먼저 성령을 받은 고넬료 가정의 경우(행 11-11장)를 그 이후 역사의 종말까지의 기준으로 보기 때문에 그때까지를 과도기라고 본다. 그러나 필자는 이 같은 러크만에게 대단한 오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부터 그것을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로, 고넬료 가정의 경우는 특별한 경우이었다. 즉 이방인에게도 구원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일반화 할 수 없는 특별한 경우였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고넬료 가정의 사건 후 예루살렘에 올라간 베드로에게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면서 힐난하였다. 그 까닭은 그들이 이방인들인 고넬료의 가정에 복음 곧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것이 왜 힐난을 받아야 할 일인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다만 사도들이나 믿는 유대인들 모두가 이방인들에게는 구원이 없는 줄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 베드로를 힐난한 말 가운데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도다"라는 말도 무할례자 곧 이방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 수 없다는 정신이 베여 있는 것이며 특히 "이방인들도"라고 하여 "도"자를 붙였다는 것이 이를 더욱 확증한다.
둘째로, 하늘에서 내려온 동물 보자기의 환상(행 10:11-16) 속에서도 "내가 깨끗게 한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행 10:15)하신 말씀도 이방인들을 속되다 하지 말하는 의미이며
셋째로, 고넬료에게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를 청하라(행 10:5)는 말씀이나 고넬료가 보낸 사람이 베드로의 우거하는 집에 도착하였을 때에 성령께서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 내가 저희를 보내었다"(행 10:20)는 말씀 등은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였음을 확증한다.
넷째로, 이 사건(행 10장, 11장) 속에 이와 같은 의미를 나타내는 많은 말씀이 있으나 생략하고 결론적인 말씀만을 소개하고자 한다.
즉 베드로를 힐난하던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베드로가 겪은 일들을 차례대로(행 11:4) 설명하는 것을 다 듣고 난 다음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행 11:18)고 한 말씀으로 볼 때에도 더욱 분명하여 진다. 즉 "생명 얻는 회개, 곧 구원을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주셨도다"라고 말하는 것은 이방인에게는 본래 구원이 없는 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분명히 나타난다. 그러므로 고넬료 가정의 경우는 특별한 경우이기에 보편화하여 우리들의 표본으로 삼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증거를 주심으로서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는가? 그것은 성령을 주심으로써 였다. 이 같은 사실은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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