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122 . 유아세례에 대한 논란 |
|
|
질문 : |
|
세례에 대한 성경사전적 제시를 잘 읽었습니다.
연세가 어떻게 되신 분인지 잘 몰라 결례가 될 것 같아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감리교 목사라 밝힌 것은 인터넷에 익명이나 가명이 너무 많아 밝힌 것일 뿐입니다. 이제 이 땅에서 교파와 의견이 다르다고 교파의 신념을 가지고 교리 논쟁으로 교파를 말하는 것은 옳게 여기기 않습니다.
웨슬리 목사님이 세례와 성만칫에 대하여 성례라는 사실을 부정한 것이 아님을 일단 밝혀드립니다.
나는 오늘까지 40 여년간 3대에 걸쳐 감리교인으로 있으면서 성경을 강론하고 교역자들과 함께 연구하면서 오늘 한국교회 강단에 성경본문의 의도가 무엇인지 강단에서 말씀을 선포하면서 교회가 지향할 말씀의 방향을 살펴온 터입니다.
그 중에 우리 교회에 성경에 대한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문제는 성경을 문법적으로나 문자적으로 따지는 것은 외국에 누구보다 앞서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성경본문을 해석하고 그 말씀에서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나 문법적인 식견으로 생명을 잃은 논리만 따지게 되므로 이것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고 20년간 헬라어 성경본문을 연구하며 강단에서 강론하고 있는 목회자 입니다.
세례에 문제는 손세훈 전도사님의 글을 비판한 글이 아님을 독자들이 보시면 너무나 명백하게 알 수 있는 글입니다. 나는 손전도사님께서 정리를 잘하신 글을 보고 정리를 잘하셨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별로 문제하지 마십시오. 젊은 분이 아니고 목회 경륜이 저와 비슷한 분이라면 좀 더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다만 성경을 어느 구절 하나를 사전에서 모아 나열하시는 공부보다 성경의 한 본문 속에 있는 모든 말씀을 파악하기 위하여 문맥과 본문과 관계된 전후 말씀과 그 본문에 사용된 말씀이 성경 다른 본문에서 어떻게 인용하고 있는지 참고하는
본문들에 용법들을 익히고 본문을 해석에 노력 해보십시오.
사전식 내용은 킷텔사전이나 쎄이어 사전이나 바우어 등 유명한 사전을 찾으면 누구나 다 알 수 있고 그 글을 인용하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것으로 본문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는 영어가 문법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 듯이 헬라어 성경은 더구나 그렇습니다. 그러니 그 사전은 해석 현장에서 어떻게 적용하고 이해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많은 시간을 드리고 기도하면서 노력을 경주하여 보십시오.
나의 글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자의 것이니라'를 참고해 주심으로 본문에 예수께서 어떤 내용을 말씀하셨는지 밝혀보려고 노력한 내용을 더 보시고 반론을 펴 주십시오.
이 글을 올려 두린 목적도 성경본문을 연구하시는 불들에게 참고는 될 것이니 105번의 말씀에 다른 견해가 계시면 이에 대하여 더 좋은 해석을 하는 의견을 주십시오. 나로서는 그 본문을 해석하는 데 여러 주일 시간을 드려서 해석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해석한 글 중에 하나입니다.
전도사님이 제시하신 그 사전식 글은 성경본문을 해석하시는데 참고되는 글입니다. 그러나 본문해석은 그것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본인은 늘 느끼실 것이라 사려 됩니다.
전도사님으로 열심히 공부하시는 모습이 보여 매우 기쁨니다. 더욱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많이 읽으시고 연구하셔서 이 땅에 좋은 글을 많이 남기시기를 바랍니다.
김 익수 목사 |
|
|
|
답변 : 2003-05-12 |
|
목사님의 글을 읽고 경륜이 있는 분으로 생각했습니다.
저는 감리교에서 지칭하는 전도사가 아니라 전도자입니다. 이 칭호는 구세군의 경우 사관으로, 카톨릭의 경우 신부로 칭하듯 우리 그리스도의 교회에서는 전도자라고 칭합니다. 이점 양해 바랍니다.
제가 단순히 본문을 나열하였다고 말씀하셨는데, 이즈음 해서 저의 소개를 드리는 것이 이해를 돕게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자료비평을 비롯한 역사비평과 문학비평, 정경비평 등을 신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신학대학의 구약학 박사입니다. 다만 제게 성서를 나열식으로 표기했다고 말씀하셨는데 이러한 방법을 택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많은 해석학의 궁극적 지침서가 성서임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견해가 제시됨에 따라 교회 현장에서 유익함이 없다는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리고 저나 여타의 구약신학학들(저는 한국의 신학대학교 신학자 모임의 구약학 회원입니다)도 현재의 개역성서가 거의 완벽하다는데 의견을 일치하고 있습니다(히브리어나 헬라어를 몰라도).
다만 목사님께서 제게 해석학 문제를 거론하시는데, 저의 전공이 바로 해석학입니다(참고로 기회가 된다면 저의 박사학위 논문에 대하여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의 시편에 관한 논문은 기존의 여러 신학적 해석 방법을 택하지 않고 독특한 해석방법을 스스로 개척하였다고 인정받은 바 있습니다).
또한 목사님께서 눅 18장에 관한 해석을 하셨는데, 저 보고 이를 참고하면 좋겠다고 권면하셨는데, 오히려 목사님의 눅 18장에 대한 해석이 지나친 문자적임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목사님의 눅18장에 대한 저의 견해는 신학자들의 주석으로 답을 대신하였습니다. 좋은 참고가 될 것으로 봅니다. 왜냐하면 이분들은 신약계에서 인정하는 주석가(해석가)이기 때문입니다.
이점 양지하시고 앞으로 상호 좋은 교제가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손세훈드림.
----------------------------------------------------
유아세례(padobaptisim)
유아세례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많은 신학적 논의를 들어 그 당위성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가장 논점이 되고 있는 것을 살펴보기로 하자. 신약성경에 의하여(행 16:15, 31-33, 고전 1:16), 교회사적 전통에 의해서이다. 이 가운데 교회사적 전통은 본 장에서 논외로 하고자 한다. 그 이유는 두 가지 면에서 비롯된 것이다. 첫째는 교회사적 전통에 의하면, 유아세례를 지지하는 쪽(가령. 오리겐, 어거스틴)과 반대하는쪽(가령, 터툴리안)이 팽배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전통보다는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에 더 충실하고자 하는 이유에서다. 여기서 유아세례를 주장하는 자들이 근거를 내세우고 있는, 다음의 성경말씀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저(루디아)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행 16:15).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자기와 그 권속이 다 세례를 받은 후"(행 16 31-33).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고…"(고전 1:16).
이상의 세 본문에서 모두 '집'이라는 용어가 나타나고 있다. 그리스어로 '집'은 '오이코스'인데, 그 뜻은 '거처,' '도시,' '가,' '구,' '후손,' '나라,' '소유,' '재산'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본문들에 의하여, 과연 유아들까지 세례를 받았다고 말할 수 있냐는 것이다. 본문은 두 가지 점에서 유아세례의 가능성에 반박될 소지가 있다.
첫째,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인구를 계산할 때, 유아와 여성은 항상 제외되었다는 것이다.
가령, 출 17:37절 이하에 의하면,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의 숫자가 60만명인데 이 숫자는 여자와 어린이를 제외하였다고 한 표현이 있다. 그밖에도 오병이어의 기적기사에 의하면(막 6:44), 떡을 먹은 남자가 오천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전통적 숫자 계산과 관습에서 비롯된 듯하다. 따라서 본문들에서 유아가 있었는지, 그리고 있다면 모두 다 세례를 받았는지에 대하여서는 확실히 알 수 없다.
둘째, 이상의 세 본문에서, 세례받기 이전에 조건이 요구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먼저 루디아의 경우를 살펴보자. 행 16:15절은 루디아가 마음을 열었기(행 16:14) 때문에 나타나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루디아 한 사람에 의해 그의 가족 모두가 세례를 받을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가족들이 모두 세례를 받았다면, 모두 다 루디아처럼 주께 마음을 였었던 계기가 있었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이 때 과연 유아들도 루디아처럼 주께 자신의 마음을 열었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또한 간수의 경우이다. 행 16 31-33절에 의하면, 세례는 조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주 예수를 믿을 때, 세례가 거행되었다는 것이다. 간수 혼자서 믿음을 고백했기 때문에 가족 모두 세례를 받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따라서 가족 모두 가장(간수)의 신앙고백과 동일한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세례를 받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경우에도 유아들이 모두 주 예수를 믿었단 말인가? 그리고 스데바나의 경우이다. 고전 1:16절에서, 스데바나와 그의 가족들이 세례를 받기 이전에 어떤 형태로든 하나님 앞에 신앙고백이 있었다고 추정하게 된다. 왜냐하면, 바울은 '스데바나 집을 아가야의 첫 열매요, 또 성도를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지라"(고전 16:15)라고 말한 점에서 그 사실을 엿볼수 있다. 그것은 스데바나 집이 성도를 섬길 만큼 휼륭한 신앙이 전제 되었기 때문에 세례를 받았던 것이다. 따라서 스데바나의 유아들이 있었다면, 그들이 어떤 형태의 신앙 고백을 통하여 세례를 받았고, 이제 성도를 섬길만한 신앙적 결단까지 요구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세례에는 수세자의 자기 결단과 자기 증거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유아 세례에서는 수세자의 교회와 세상,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자기 증거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그 의미는 형식적으로 볼 수 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신앙은 무한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유한한 인간의 고백이다. 유한한 실존은 유한한 재료(물)를 통하여 유한한 고백의 결단(세례)을 할 수 밖에 없다. 유한한 실존이 성령에 감화됨으로서 무한한 존재에로 소망하게 되며, 그 소망은 영광 중에 실현되는 것이다. 이것은 성령과 함께 한 수세자의 자기 증거로서 가능한 것이다.
기독교가, 믿음의 종교가 아닌, 사랑의 종교로서 자리매김하기 위하여서는 세례를 통한 자기 증거/자기 결단을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믿음과 행함을 연결하는 중요한 증표며, 삶의 전환점이자, 기폭제가 바로 세례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유아세례는 아무런 의미를 가질 수가 없다.
유아세례문제를 성경에 어린 아이라는 말씀이 있기에 논란이
되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어린이들에게 세례를 주었다는 말씀
이 없는데 온 집이 예수를 믿으니 세례를 주었다는 말 때문이
지요. 이런 추측이 교회에 교리적인 문제를 낳게 한 요인중에
하나라고 보입니다.
이제 한국교회도 성경을 바로 보려는 근본적인 노력이 필요
합니다. 즉 우리말 성경은 '어린 아이'라는 말씀을 성장하지
않은 아이들로 말하지만 성경에는 한 본문에서도 어린 아이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헬라어 원문성경에
서 만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설명을 돕기 위하여 필자의
글을 읽어주시기를 부탁합니다.
바이블 잉글리쉬에 들어가셔서 김익수 이름으로 글을 찾으시
면 30여개의 글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자의 것이니라 란 제목을 살펴봐 주십
시요. 그 글에 예수께서 어린 아이에게 축복하는 말씀으로 이
해하고 있는 본문에서 어린 아이에 대한 본문 말씀이 자세하게
본문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우리말 성경이나 영어 성경에 의존하면서 헬라어
원문성경에 기록된 말씀의 그 깊고도 원론적인 말씀을 이해하
못하는데서 교회에 던지고 있는 문제가 한 둘이 아님을 새삼
느낍니다.
어린이에 대한 문제는 요한일서에 가시면 아이들와, 청년들아,
아비들아, 등으로 요한은 말씀합니다. 이것은 그 성장한 층을
말씀하고 있지 않음을 우리말 성경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김 익수 목사
----------------------------------------------
나도 유아세례에 동감한다.
신약시대라고 해서, 또는 신약성경에 없다고 해서
유아세례가 다 틀린 것은 아니다.
유아세례는 한시적 표시이다.
성인이 되어 입교의식을 치를 때까지
유아세례는 유효한 것이다.
유아들이 세례를 받는 것이 무엇이 문제인가?
자기 애들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남에게 구원을 말해...?
유아세례는 옳다.
그 이유는 구약의 할례의 전통이 일부분 신약으로 계승되었기 때문이다.
할례는 선민의 표시였다.
역시 유아세례는 성인이 되어 신앙고백으로 세례를 받기까지
인정되는 그리스도인의 표시이다.
한 가지 중요한 점을 알도록 하자.
구약은 전체가 다 부정되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그렇게 되어서도 안된다.
그러나 이 말이 율법을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로 오해되어서는 안되겠다.
윤여진
-------------------------------------------------
윤여진 님의 글에 한해 드리는 글은 아님을 말씀드립니다.
우선 이와 관련된 자세한 해설을 전개하신 글을 대하면서 저는 그렇게 말씀을 정리하지 못했다는 점 널리 양해를 드림니다.
세례에 대한 말씀이 복음서에 나오지 않았다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터인데 그 말씀에 이해문제가 많은 토론을 할 여지를 주었다고 생각하는데서 이 문제가 종교개혁 시대부터 논란이 되어 왔다는 것을 손세훈님의 자료에서 잘 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교회사에 있었던 세례 문제에 중요한 논쟁을 정리하신 글이 아닌가 합니다.
유아세례가 옳으냐? 잘못이다! 이런 논쟁에 휘말리기 보다는 오늘은 성경에 기록된 그 본문의 상황과 그 말씀의 본 의도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노력을 기울일 때라고 봅니다. 우선 성경에서 '어린 아기'라는 용어가 무엇인지 이해가 먼저 있어야 한다는 필자의 의견이 이런 취지입니다. 우리말 성경문자에 근본 원문의 뜻을 간과하고 그 글자의 권위를 두고 말을 그대로 옮긴다는 것은 이제 오늘 우리교회는 탈피할 때가 되지 않았나 봅니다.
마가복음 1장에 세례에 대하여 이해하지 못한 문장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입니다. 회개의 '세례를 베푸니'라고 했으면 세례에 대한 논쟁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 사려됩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이라고 한 말씀과 '세례를 베프니'라는 말씀의 '세례'라는 말씀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는 언어입니다.
즉 세례 요한이라는 말씀은 '세례 자 요한'이란 말의 준 말입니다. 즉 그가 세례를 베풀었다는 말이 아니라 그는 예수께로 가도록 외치다가 간 사람을 복음서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10장 40절 이하에 제자들을 데리고 세례 자 요한이 처음 세례를 주던 장소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여기 말씀 또한 세례 요한의 세례 현장에 오신 예수를 보고 세례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신 그 일의 본질을 이해한 많은 사람들이 거기서 예수를 믿으리라 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곧 세례 자 요한의 일이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한 말씀의 의미는 요한복음에 세례의 의미를 분명하게 지시하고 있습니다. 즉 세례 요한이 예수에 대하여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선포한 내용과 일치하는 것이지 오늘 우리가 시행하는 세례와 같은 의식인 세례를 말하고 있음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의 이 말씀은 곧 마가복음 1장 4절의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라는 말씀을 해설해 준 중요한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가복음 1장 4절은 세례 요한이 죄 사함을 받는 세례를 베풀었다는 말씀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를 사하시는 그 분이 오시는 사실을 선포하면서 그가 죄를 사하시는 분이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누가복음 12장에 50절에 '내가 받을 세례가 있으니'라고 하심으로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서 어떤 의식적으로 베프는 세례를 말씀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하다 할 것입니다. 물론 사도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세례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들은 교회에서 의식적으로 행하는 세례의 의미를 강력하게 보증해 주는 말씀들이 아닙니다. 복음서에 나온 '세례'라는 말씀은 성경사전 스트링 코드를 보면 907번과 908번으로 분류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907번은 세례 자 요한의 명칭에 사용되는 말씀이고 908번은 '세례를 전파하니'에서 사용된 말씀입니다. 역시 사도행전 16장 33절에 기록된 세례는 907번의 세례 자 요한에게 사용되는 세례 용어를 누가는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성경용어의 의미가 복음서와 초대교회에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연구를 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감리교 목사입니다. 감리교회는 영국에서 웨슬리 목사에 의해서 시작되어 전 세계 13여 국가에 선교되었습니다. 웨슬리 목사님은 성경연구에 심혈을 기우렸으며 헬라어 성경 연구에 매우 조예가 깊었습니다. 그 당시 헬라어 성경연구의 대가인 벵겔 교수의 주석책을 높이 평가하시고 헬라 성경본문을 연구에 도움을 받으셨습니다.
웨슬리 목사님은 교회에서 베푸는 세례를 은혜의 수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곧 세례는 모든 성도들로 하여금 세례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가게 하는 일이란 말씀입니다. 이 문제는 사도 바을이 로마서 6장에서 분명하게 말씀한 바와 같이 교회가 의전으로 정하고 집행하는 의식에 무슨 구원이 있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헌신하는 그 내용과 같은 권위가 있는 것으로 주장한다면 지나친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교회의 자주성이 높아질 수록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본래의 자리에서 살펴보려는 수고와 노력 외에 어떤 의식에 권위를 두려는 경향이 있어온 것이 기독교사의 한펀 모습이기도 하다는 것은 부인하지 못하는 일이며 오늘 끊임없는 교회 개혁을 부르짖는 때에 과거의 전통을 그대로 답습하고 권위를 옹호하려면 더욱 성경을 상고하고 그 뜻을 밝혀서 현재인들에게 하나님의 원래의 의도하시는 뜻을 말씀에서 찾아 가르쳐야 할 것이라 믿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전통에 대한 주장을 한 번 접고 그 모든 것이 성경에서 말씀하는 용어의 선택이 얼마나 신중하고 그 말씀을 분명하게 말씀하셨는지 찾는 일이라 믿으면서 말씀을 끝입니다.
감사합니다.
더 좋은 말씀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김 익수 목사
-------------------------------------------------------
윤여진님께서 본 사이트에 깊은 관심을 나타내주시고 또한 이렇게 님의 견해를 피력하여 주신데 대하여 주님의 이름으로 감사드립니다.
저는 님의 글의 핵심을 잘 간파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님께서 유아세례의 유효성에 대하여 구체적인 증거를 제시하지 않은 점에 대하여 아쉽게 생각합니다. 다만 하나의 증거로 제시한 것이 구약성서의 할례인 것 같습니다. 특별히 구약전체를 부정하면 아니 된다는 말은 매우 지당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본 사이트에 관여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도 구약성서를 공히 신약성서와 함께 하나님의 말씀으로 귀하게 인정하고 있음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다만 님께서 "자기애들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남에게 구원을 말해...?"라는 표현은 공개적인 자리에서 그리스도인들로서 교감되기에 약간 지나친 언사가 아니었는가 감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님의 주장에 대하여 저의 견해를 말씀드리기 전에 먼저 할례를 잠깐 말씀드린 후, 세례에 대한 저의 본론의 입장을 말씀드림으로써 유아세례가 유효성이 없음을 자연스럽게 밝히고자 합니다.
할례는 고대 이스라엘의 족장시대에도 거행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창 17장). 할례는 고대 이스라엘의 고유한 제의 의식이 아님을 역사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집트 카이로 박물관 1층 중간에 고대 이집트의 목상들에서 남아들이 할례를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고대 이집트 무덤 벽화와 상형문자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할례는 안식일과 함께 개인신앙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즉 공동체 제의와는 구별되는 모습을 띠고 있다는 것입니다. 할례는 족장시대부터 거행된 것이었으나, 포로후기에 예루살렘성전의 파괴와 이방에로의 추방으로 인하여 공동체 제의가 무너지면서 그 위력을 맹위를 떨치게 되었습니다.
할례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 사이에 맺은 언약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그의 백성들의 순종을 표시하는 의식이었습니다. 이러한 영적 상징성이 이스라엘의 잘못된 선민 사상으로 말미암아 육적인 할례 그 자체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유효하다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관점에 대하여 예레미야는 신 10: 16을 인용하여 마음의 할례를 강조한 바가 있으며(렘 4:4), 신 30:6도 마음의 할례를 강조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도 육적인 할례가 아닌 그리스도의 할례를 말 한 바 있습니다(골 2:11; 참조 롬 2
:28-29; 4:9-12). 의미 면에 있어서 할례나 세례가 모두 죄에서 벗어나게 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대상의 연령에 있어서 님과 저의 관점이 다르게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할례가 태어난 지 8일째 되는 날에 거행되었다 하여서 유아세례도 무방하다는 논리는 설득력이 약합니다.
사실 할례와 세례를 비교하는 것보다는 유대교의 물을 통한 정결의식과 신약시대의 세례의 의미를 비교하는 것이, 님의 말씀처럼, 신구약을 통일성 있게 보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먼저 구약시대의 물을 통한 정결의식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이하부터 敬語를 사용하지 않음을 양지바랍니다).
유대교의 정결의식
유대교에서도 물을 이용한 예배 의식이 보편화되어 있었다. 모세 율법에 의하면, 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목욕재계하도록 규정한 바 있다.
이것은 곧 물이 불순물을 제거한다는 생각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민 19:1-22, 레 14, 15, 16:24-28). 포로기 후, 바벨론의 영향으로 침수 의식이 크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일부 예언자들은 내적 또는 영적인 정화의 상징으로 물을 통한 육체적 정결을 말한 바 있다.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겔 36:25-28).
구약시대에 물을 통한 의식은 대체로 淨化, 생명, 죄 씻음 그리고 개종의 의미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밖에도 신약성경에서는 구약성경에 나타나고 있는 "홍해사건"(고전 :10:2-11)과 "노아사건"(벧전 3:19-20)을 모형론적으로 해석하여 구원사건으로 규정하고 있다.
먼저, 물을 통하여 부정한 것으로부터 정화되는 경우를 살펴보자.
"그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슥 13:1).
"엘리사가 ……가로되 너는(나아만)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번 씻어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왕하 5:10. 참고. 왕하 5:11-14, 비교. 레 13:37-14:9).
이밖에도 제사장 직분과 같은 거룩한 임무를 맡았을 때, 물로써 정화의식을 치른 예가 있다.
"너는 그들에게 나를 섬길……제사장 직분을 위임하여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회막 문으로 데려다가 물로 씻기고"(출 29:1, 4).
왕하 5:10에서 '깨끗하리라'라는 히브리어 '타헤르'는 순수하지 못한 것에서 '깨끗해지다', '정결해지다'라는 의미가 있다. 본문에 이 말이 쓰여진 것은 병으로부터 깨끗해지는 것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사용된 '타헤르'라는 말은 물과 관계없이 '깨끗하다'라는 의미로 많이 나타나고 있다. 구약성경에서 '타헤르'가 물과 관계없이 사용된 경우를 살펴보자.
도덕적으로 깨끗해짐을 의미하는 경우이다.
"내가(하나님) 너의 간음과 사특한 소리와 들의 작은 산 위에서 행한 너의 행한 행음의 비루하고 가증한 것을 보았노라. 화 있을찐저 예루살렘이여 네가 얼마나 오랜 후에야 정결하게 되겠느뇨"(렘 3:27
, 비교. 17:15-16).
완전하게 깨끗해짐을 의미하는 경우이다.
"사람이 어떤 때는 궁창의 광명을 볼 수 없어도 바람이 지나가면 맑아지느니라"(욥 37:21).
다음으로, 물이 생명을 상징하는 경우이다. 이스라엘의 지역적 특성에 비추어볼 때 물이 곧 생명과 직결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왜냐하면 과거 팔레스틴 지역은 물이 귀한 곳으로서 일부는 샘을 통하여 물을 얻을 수 있었으나(신 8:7-9; 33:13-14; 비교. 신 11:10-11) 대다수의 물을 강수량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대저 내가 갈한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사 44:3).
"바닷물이 태에서 나옴같이 넘쳐흐를 때에 문으로 그것을 막을 자가 누구냐"(욥 38:8).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시 73:13).
시편 73:13의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라는 표현은 이어서 나타나는 15절의 '주의 아들들의 시대,' 19절의 '전멸하시리다' 그리고 27절의 '멸하셨나이다'라는 내용으로 볼 때, 생명과 관계있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즉 무죄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멸망당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숨어있다.
다음으로, 물의 비유적 표현을 빌어 죄사함을 받는 경우를 보자.
"그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슥 13:1).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시 51:
2).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51:7).
"이는 주께서 그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으시며 …"(사 4:4).
마지막으로, 물을 통하여 이방인에서 유대인으로 개종하는 경우이다. 구약성경에는 나타나고 있지 않지만, 구약시대에 유대교로 개종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의식을 거쳐야만 했다. 그것은 할례, 물을 통한 정결의식, 그리고 희생제의였다. 탈무드에서는 세례받은 개종자를 갓 태어난 어린이로 간주하고 있다. 이것은 개종자가 새롭게 거듭났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원래 이교도에서 유대교로 개종하기 위하여 서는 할례만이 유일한 의식이었다. 그러나 이교도가 제의에 참
여하기 위하여 물을 통한 정결의식이 새롭게 규정된 것이다. 이런 이유는, 앞서 밝힌 대로, 물로써 불순물을 제거한다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 물을 통한 정결의식에는 두 가지 의미가 견지되었다고 할 수 있다. 첫째는 생활에서나 종교적으로 불결한 것들을 제거하고자 하는 목적이었으며, 둘째는 제의를 거행하고자 할 때, 정결한 몸가짐으로 참여하고자 하는 목적인 것이다.
유대교에서 개종자들에 대한 의식을 물로써 치러졌다는 것은 대체로 학자들 사이에 일치한 견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그런 의식이 언제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견해는 매우 다양한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이런 주장들 사이에 대체로 그 시기를 두 가지로 크게 나눌 수가 있다. 그것은 기독교의 세례의식과 비슷한 때라고 하는 주장(McKnight)과 기독교 이전에 이미 존재했었다는 주장(Beasley -
Murray)이다. 그 시기에 대한 다양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나만 기사(왕하 5장)에서 물을 통해 정결케 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지정학적 위치로 볼 때, 고대 바벨론과 이집트에서의 물을 통한 정결의식이 있었다는 사실에서, 기독교 이전에 유대교 개종의식에서 물을 통한 의식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부인하기 힘들 것이다.
기원적으로 볼 때, 고대 근동 국가들의 물을 통한 종교의식이 기독교 세례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이상의 특징들을 염두에 두고 기독교의 세례에 나타나는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자. 이를 위하여 신약성경에 나타나고 있는 세례 유형을 살펴보기로 하자.
신약성경에 나타난 세례.
신약성경에 의하면, 세례를 크게 세 가지로 특징 지울 수 있겠다. 첫째, 최초의 세례 모습이 세례 요한에 의해 시작된 점이며, 둘째, 흠 없는 예수가 세례를 받았던 점이며, 셋째, 오순절 이후 믿는 자가 세례를 받음으로써 기독교 공동체에 가입하는 보편적 의식이 되었던 점이다. 따라서 본 글에서는 이상의 세 가지 유형에 나타나고 있는 세례의 의미를 살펴보기로 하자
세례요한의 세례
세례요한의 세례가 신약성경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근거는 예수가 그로부터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다(마 3:16-17, 요 1:31). 세례요한의 세례는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였다(막 1:5). 그리고 그의 임무는 주의 길을 예비하는 것(막 1:2, 3)으로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증거 하는 것(요 1:34)이었다.
세례 요한에 대한 서언적 표현이 나타나고 있는 막 1:2, 3(참고. 마 3:3)은 각각 말 3:1과 사 40:3을 인용한 것이다. 먼저 말 3:1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리니 저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막 1:2).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 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말 3:
1).
말 3:1 바로 앞 내용(말 2:17)에 의하면, 사람들은 여호와를 괴롭게 하며, 행악을 일삼으면서도 그 행악이 여호와 앞에 서는 선한 것으로 생각하며 그를 기쁘게 한다고 믿으며, 하나님을 공의의 하나님으로 보지 않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3:1에 의하면, 여호와 외에 세 인물이 등장하고 있다. 즉 '내 사자,' '주,' 그리고 '언약의 사자'이다. 이 때 '사자'는 여호와의 사자로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는 자이다. 히브리어로 사자의 뜻은 '사자' 외에 '사신'(사 33:7, 렘 7:3
), '천사'(창 19:1, 호 12:4), 그리고 '파견자'(나 2:13) 등의 의미를 갖고 있다. '주'는 여호와를 지칭하는 것으로서, 본문의 그가 홀연히 임재한다는 기사는, 종말론적인 표현으로서, 사 40:3-5(참고. 겔 43:2, 학 1:8)에 기초하고 있다. '언약의 사자'라는 표현은 전자의 사자와 동일한 의미이며, 이 때 나타나고 있는 '언약'에 대해 학자들 사이에 견해가 대체로 두 가지로 나누어지고 있다. 하나는 이 언약이 기존 이스라엘의 신앙적 규범이 되었던 '시나이 언약'이라는 것이며, 또 하나는 기존 시나이 언약과 다른 '새 언약'(렘 31:31)이라는 것이다. 후자의 입장에서 보면, '새 언약'은 장차 도래할 메시야에 대한 종말론적 표현임을 알 수 있다.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사자의 임무란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며, 그는 여호와와 사람들 사이에 맺는 언약을 증거하는 것이다. 이 때 나타나는 언약은 인간들의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과 악행이 일어나는 가운데서(말 2:17) 나타남을 주목해야만 한다.
다음으로 막 1:3에서 인용되고 있는 사 40:3을 살펴보자.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막 1:3).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사 40:3).
본문의 내용을 이해하기란 매우 어렵다. 특별히 '외치는 자의 소리'에 대해 규명하기란 쉽지가 않다. 다만 본문 앞에 나타나고 있는 '위로하라,' '말하라' 그리고 '외쳐 고하라'라는 표현(40:1-2) 등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를 추정하게 한다. 즉 '외치는 자의 소리'
는 이스라엘을 위로하면서 나타나는 것이다. 이제 이스라엘은 하나
님 앞에서 범죄한 탓에 겪는 인고의 시간이 사라질 것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여호와의 길'이다. 본문의 저자(제 2이사야)가 활동한 시기는 예루살렘이 멸망(주전 587)하여 바벨론 제국이 패망(주전 539)한 사이이다.
따라서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여호와의 길'은 바벨론의 시대의 길과 비교되며, 한편으로 독특함을 갖고 있다. 본문에서의 '길'이란 大路를 말하며, 문자적 의미로 대로는 '왕의 대로'를 말하는 것이다. 왕의 대로는 팔레스틴 동쪽(요단강 동편)을 중심으로 하여 남북으로 연결되어 있는 길이며, 이 말은 성경에서 인용된 것이다(민 20:17, 21:22). 이 길은 대상 무역의 중심지로서, 이 길의 주도권은 곧 중동
의 맹주로서의 권위를 상징적으로 말하는 것과 같았다. 바벨론 제국이 중동의 지배권을 갖고 있을 때, 이 길은 바벨론의 권위와 영광을 상징적으로 대변해 주고 있다. 따라서 '여호와의 길'이란 표현은 곧 여호와의 권능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권능은 여호와의 영광과 직결되는 것으로써(참고. 사 40:5), 인간의 역사에 깊숙이 관계되는 것을 말한다. 이런 맥락에서 본문을 통해 외치는 자의 임무는 여호
와의 길을 예비하는 자, 여호와의 권능을 알리는 자, 여호와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로 말할 수 있다.
이상을 근거로 하여, 다음과 같은 교훈을 발견할 수 있다. 세례요한의 역할은 예수의 길을 예비하고, 그를 증거하며, 하나님과 죄인들 사이에 맺게 되는 새로운 언약(예수)을 말하며,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를 염두에 두고 세례요한의 세례에 대한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자.
종말론적 의미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 3:2).
본문에서는 세례에 대한 언급은 없으나, 전후 문맥과 상황을 고려할 때, 세례와 관련된 선포였음을 알 수 있다. 본문은 경고와 심판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는 회개하지 않는 자를 심판하실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메시야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회개가 절대 요구되고 있다. 요한의 선포는 세례를 통해 곧 도래할 하나님 나라의 현존성에 참여할 것을 의미하고 있다. 즉 회개의 세례를 통해 주의 날에 동참할 것을 말하고 있다.
도덕적 의미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마 3:7下-8).
세례요한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향해 회개할 것을 말하고 있다. 회개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회개는 그 열매를 통해 진위가 가려지게 된다. 진정으로 회개한 자는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믿음을 보일 것이며, 사람들 앞에서는 도덕적으로 善하게 행동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세례요한은 가식과 위선으로 가득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에게 회개의 열매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회개한 자가 신실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그 열매는 거짓된 것이며, 그 회개는 바른 회개가 아님을 역설적으로 말하고 있다.
죄사함의 의미
"요한이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눅 3:3).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마 3:11上
).
두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세례는 물로써 거행되는 것이며, 회개한 자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죄를 용서해주는 것이다.
지금까지 세례 요한의 세례를 살펴보았다. 세례 요한이 거행한 세례의 특징은 죄사함을 위한 회개의 세례를 통하여 합당한 열매, 즉 도덕적 삶을 촉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예수 수세
예수가 세례를 받음으로써(막 1:9-11, 요 1:32-34), 믿는 자의 세례받음이 신앙적 당위성을 지니게 된다. 즉 예수의 수세가 기독교 세례의 전거(典據)가 된다. 요한의 세례가 앞서 보았듯이 회개의 세례였다고 할 때, 흠 없는 예수가 세례를 받은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의 죄인을 구원하고자 친히 죄인들의 삶의 자리에 왔음을 말하는 것이다(빌 2:7,8). 예수가 세례요
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고자 할 때, 세례요한이 망설였던 장면을 보게 된다(마 3:14). 그러나 예수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수세의 필요성을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 3:15).
예수는 자신의 수세가 합당하다고 말하고 있다. '합당하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프레포'인데, 이 때 프레포는 '적당하다,' '알맞다,'
'마땅하다,' '합하다' 그리고 '옳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와 같은 의미로 볼 때, 예수는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세례를 받음으로써 자신의 사역의 출발점을 삼고자 하는 면이 엿보인다.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는 그 시점이 자신의
사역이 시작되는 적당한(합당한) 때로 본 것 같다. 이런 점에서 예수의 수세는 공생애의 출발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요 1:31에 의해 더욱 지지받고 있다.
"…내(요한)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그(예수)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
또한, 예수가 세례를 받은 후, 본격적으로 전도활동에 돌입하는 것(행10:37-38)에서도 잘 엿볼 수 있다.
여기서 예수가 세례를 받을 때 나타난 증언을 살펴봄으로써 그 의미를 찾아보고자 한다.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막 1:10-11).
이상의 본문에서 세 가지 중요한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성령이 예수에게 임했다는 것이며, 예수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것이며, 그리고 하나님께서 예수를 기뻐하는 자로 본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를 중심으로 예수의 수세 의미를 살펴보기로 하자.
성령이 임함
예수가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임했다는 사실은 예수에게서 삼위일체적 권능이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 성령, 그리고 예수의 삼 위격이 함께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예수는 삼위일체적 권능을 통해 세상의 죄를 몰아내는 사역에 돌입하게 된다. 그리고 본문에서 성령의 역할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성령이 예수에게 임함으로써 하나님과 예수 사이에 교통함이 나타나고 있다. 즉 성령은 역할 중 하나가 하나님과 성도 사이에 교통을 위한 것임을 교훈적으로 알 수 있다. 성령의 이와 같은 역할은,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반응을 요구하는 것이라 하겠다. 하나님의 반응은 곧 예수가 그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구약 시대에도 나타나고 있다. 특별히 하나님과 다윗 사이에 맺는 계약에서, 다윗이 하나님의 아들로 표현되고 있다(삼하 7:14). 또한 시 2:7에 의하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사상은, 소위 '養子사상'으로서, 구약 시대뿐만 아니라 고대 팔레스틴 지역과 그 주변국에 넓게 퍼져있던 것이기도 했다. 즉 군왕과 신과의 계
약이 군신의 관계에서 父子의 관계로 발전하게 되었으며, 이 때 그 아들은 신의 양자가 되는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양자가 됨으로서 '천사와 같이'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지혜를 갖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삼하 14:17,20).
본문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로 증언되어 있다. 여기서 '사랑하는' 표현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예수가 하나님의 친아들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과 예수는 여타의 계약을 통해 父子관계가 된 것은 아니다. 예수는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하였으며(요 1:1), 이 땅에서 와서 세례를 받을 때, 그는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자"(요 1:14)로 드러났던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자신의 독생자에게 성령을 주었고, 성령을 받은 아들의 모습을 보고 기뻐하고 있다.
하나님의 기뻐하는 자.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의 말씀은 이사야 42:1에서 인용된 것이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본문은 "고난받는 종"을 말하고 있다. 이 때 종이 겪게되는 고난의 절정은 사 53:4-9에 잘 나타나고 있다. 그 종은 하나님께서 붙드는 자이며, 기뻐하는 자이며, 택한 자이다. 그 종은 성령(神)을 받았고, 만방(이방)에 공의를 베풀 자이다.
종은 먼저 하나님의 택함을 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은 후, 공의를 베푸게 되는 특권을 갖게 된다. 여기서 공의는 히브리어로 미쉬파트이며, 그 뜻은 재판, 판결, 올바름, 판단, 공의 등을 지니고 있다. 이 뜻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 택한 종이 만방을 다스리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에게서 고난받는 종의 모습이 나타남과 동시에 만왕의 왕으로서 영광을 함께 지니게 된다는 이중적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여기서 고난의 의미가 곧 영광의 의미로 이해되는 파라독스를 발견하게 된다. 이 말은 한시적인 고난을 거친 후 영원한 영광이 나타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의 像은 고난을 받는 자이며 영광을 함께 받는 자의 모습이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고난을 당하여 죽게 된다는 사실이 함축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곧 고난의 길로 접어드는 아이러니를 발견하게 된다. 이 때 고난은 하나님의 뜻에 부응하고자 할 때 나타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죄인들이 고난받는 예수를 보고 믿음으로써 구원에 이르는 것이다(요 6:40). 예수는 자신의 고난을 감수하면서까지 하나님의 뜻에 부응한 자였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수세는 그의 구원 사역을 알리는 서곡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예수의 수세 의미를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그런데 예수가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서도 '세례'로 표현했음(눅 12:50; 막 10:38)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예수의 공생애가 세례로 시작하여 세례로 끝을 맺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예수는 요단강에서의 첫번째 세례를 통해 고난스러운 전도활동을 시작하였고 갈보리 동산에서의 두번째 세례(죽음)를 통해 시공을 초월한 영속적인 전도활동이 현재까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세례는 전도의 출발이며, 고난이며, 죽음이며, 그리고 영원한 영광의 보증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예수의 수세에서, 세례의 교훈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하나님께 택함을 받는다 ----------+
둘째,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 --------------+---→ 하나님의 아들,
기뻐하는 자
셋째, 전도 활동을 요구받는다 ------------+
네째, 고난을 받는다 ---------------------+
다섯째, 공의로 세상을 다스리게 된다.
첫째와 둘째는 수세자의 특권이며, 셋째와 넷째는 수세자의 의무이며, 다섯째는 수세자의 영광이 된다.
예수의 수세와 성도의 수세를 다음과 같이 도식해 보았다.
성령의도우심 고난의종
예수:세례---------> 전도활동------>세 례----> 부 활
요단강 십자가사건 공의로 세상
을 다스림
성령을 받음 고난
성도:세례----------> 전도활동-----> 죽음 ------> 완전한 부활
불완전한부활 연단 두번째세례 천국에이름
도덕적삶이요구됨 영광 중에 거함
이상의 내용에서 보면 세례에는 유아세례의 요소가 들어있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님께서 저와 다른 신앙적 시각이 있다면 성서의 구체적 실례로 그 증거를 제시해 주기를 바랍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
|
|
|
|
|
|
BCC 소개 |
뉴스레터 |
찾아오시는 길 |
개인정보 보호정책 |
TOP ▲ |
|
|
BCC | 서울시 강서구 방화1동 180-14 7F | 비영리법인번호:109-82-03052 | Tel (02) 2662-0793, 2662-8081 | Fax (02) 2662-8082
Portions are Copyrighted 1964-2026 BCC. Contact us for more information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