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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1 .  죽으면 어디로 갈까요?
  질문 :
죽으면 어디로 갈까요? 인생을 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답변 부탁드립니다.
  답변 : 2003-05-12
① 죽으면 어디로 갈까요?
인류 역사 이후 지속되어 온 질문이요 철학의 역사를 이끌어 온 질문이기도 합니다. 또 이 질문에 해답을 갖고 있지 않다면 삶의 진정한 의미를 잃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한 질문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갈까? 여기에 일반적인 답변은 대단히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 안에서 성경이 말하고 있는 부분은 우리 사회에서 말하는 일반적인 답변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죽으면 어디로 가느냐는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누가복음 16:19-31)에서 답변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 내용은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아주 익숙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을 참고하면 어떤 상황을 그림으로 보는 것처럼 상상이 되는데 거지 나사로와 부자가 다 세상을 떠났고 거지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쉬고 있으나 부자는 불꽃 가운데 고민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지막 심판의 때까지 육신을 떠난 사람이 또 다른 장소에 가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상황을 통해서 죽은 상태의 사람들을 생각할 수 있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나사로가 있는 지내기 편한 낙원이든 고민하고 뜨거움으로 고통 하는 부자의 장소(음부)이든 정해진 장소가 있습니다.
둘째, 육체를 떠난 두 사람이 의식을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셋째,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존재로 있습니다.(신경을 가진 육체가 아닌 상태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이 육체와 영혼의 분리라고 이해되고 있음에도 말입니다 (눅 16:24)
넷째, 여기서도 땅에서의 삶에 대한 보응을 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눅 16:25).
다섯째, 서로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큰 구렁이 끼어 있어 서로가 오갈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v26)
여섯째, 나사로에게는 모르겠으나 부자에게는 세상에 오갈 수 없는 구속(拘束) 상태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라는 부탁을 보면 자신이 오갈 수 없는 상태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v 27)).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람이 죽어 우리 주변에 와 있거나 구천을 떠돈다는 말은 의미를 잃게 됩니다. "죽은 사람은 오갈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조상 숭배나 무당들을 통해서 대화나 제사를 받는 것은 마귀들의 속임수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듭니다.
첫째, "이것은 사실이 아니라 비유다" 라는 논리인데 분명한 것은 예수께서 사용하신 비유는 전혀 근거 없는 내용을 말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주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서 오히려 죽음 저편의 일을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계시하셨다고 믿습니다.

둘째, "이 비유에 나오는 나사로는 신앙인 이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본문 속에서 보는 대로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22) 라는 말씀 속에서 대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 신앙의 사람들과 관련되는 인물이라는 데서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라는 말씀은 그가 신앙의 사람이라는데 의문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궁금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이상의 것은 말 할 수 없다고 봅니다. 더 알고자 하는 우리의 욕구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이 부분을 침묵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죽었다가 살아 난 사람들이 몇 몇 있기는 하지만 그들의 경험에 대하여 일체 침묵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의 침묵에도 의미는 있다고 믿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의 미래를 알고 싶어 하고 운명을 점치기를 좋아합니다. 마귀는 이러한 인간의 심리를 이용하여 속이고 그러한 사람들 속에 군림하려 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신경 써야할 부분은 미래보다도 '현실'이라고 사료됩니다.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게 산다면 미래의 미지의 세계는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나의 삶에 따라 미래가 결정된다는 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또 세상 속에서도 진리입니다. 오늘에 충성치 못하면서 보다 좋은 내일을 기대한다면 그것은 아름답지 못한 욕심일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다시 오심에 대해서도 경계하시는 말씀이 도적의 비유(마 24:42~51)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비유라고 믿어집니다. 오늘에 말씀 따라 최선을 다한다면 언제 이 세상의 마지막이 온다고 해도 자신 만만하지 않겠습니까?

②인생을 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귀하의 두 번째 질문은 보다 철학적인 질문이라고 봅니다. 실존주의 철학자인 마틴 부버는 사람을 가리켜 "자신의 의도에 상관없이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고 평가했습니다. 물론 인본주의의 입장에서 볼 때 의미가 있는 말이지만 그렇게 인생을 다룬다면 얼마나 비참한 존재입니까?

성경에서 사람을 향한 시각은 전혀 다르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의 대상으로 창조된 존재'가 바로 사람이라고 생각됩니다. 최초의 인간인 아담도 그러했고 이런 하나님의 의지 때문에 성경은 계속 거역하는 인간을 향하여 "나는 너희들을 사랑한다" 라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다가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순간에도 이것을 멈추신 적이 없으셨고 마지막으로는 아들을 주심으로 이를 분명히 하셨습니다(히 1:1~2). 인간을 향해 '말씀'하신 것은 "내가 너희들을 사랑한다"였습니다. 결코 하나님께 무슨 부족한 것이 있어서 인간으로 하여금 그것을 보충하시기 위해서가 아닙니다(행17:25).

이런 입장에서 인간은 '사랑 받기 위해서 있는 존재'입니다. 사람의 삶의 방법도 '경쟁'이 아니라 '사랑'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동물하고 크게 다른 부분입니다. 때문에 오늘의 시대에서 초등학교 때부터 경쟁에 이기는 인간으로 키우려는 교육 체계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걱정됩니다. 최소한 초등학교 연령에는 수학의 공식이나 문법의 능수 능란이 아니라 사랑하는 방법을 배워야하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경쟁의 공식은 동물의 약육강식 원리이지 사람의 삶의 원리는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사람은 '사랑하며 사랑 받는 것'으로 인생이 채워져야 한다고 봅니다. 사람의 사는 이유는 이것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얘기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 이것이 또한 사랑 받는 비결이기도 합니다. 이런 입장에서 인생의 '목적'보다 귀중한 삶의 '방법'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인생이요 인생의 의미입니다. 그 왜의 것은 부수적인 것들입니다. 이것을 중심하여 자기를 실현해 가야 한다고 믿습니다. 무엇을 먹고, 입고하는 것은 별 차이가 없습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자기실현을 잘했다고 하더라도 이 모든 것이 배제된 성취는 순간에 지나지 못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산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대상만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다 사랑하십니다(요3:16). 그러나 그것이 모두에게 갖지 않은 것은 인간 스스로의 반응이라고 여겨집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사랑하셔도 그것을 외면하면 짝사랑이 되고 맙니다. 그러면서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라고 투정합니다.

성경 속에 바울 사도는 세상적 기준에서 평가해볼 때 결코 행복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동족에게 미움 받고 물질적으로 핍절하고, 그러나 바울의 가슴에는 언제나 활화산 같은 하나님의 사랑이 있음을 듣습니다. 그래서 그는 늘 기뻐하고 감격해 합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우리의 '전도'는 다름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하고 계심을 알려 주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사람 개개인에게 있어서도 다르다고 여겨집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외모를 모두 다르게 지으셨을 뿐만 아니라 知情意라는 인격적인 면에서도 모두 다릅니다. 그것이 설령 불리한 조건일지라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만 주신 특권입니다.

석가모니는 "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 했는데 이것이 독선적인 면으로 이해하면 안 되겠지만 모든 사람은 이 세상 천지에 유일한 존재라는 뜻이라고 여겨집니다. 지금도 나와 같은 사람은 이 지구촌 60억이 넘는 인구 중에 나 하나밖에 없습니다. 아주 특별한 창조물이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나만의 특권이며 장점입니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존재 이유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함으로서 감격된 삶을 살고 후회 없는 인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왜 사니?" "먹기 위해서 산다"는 대화는 동물적인 수준에 불과합니다. 이제 사랑 받는 존재로 사랑하는 존재로 인간 존재 의미를 깨달을 수 있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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