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디    ID저장
비밀번호     


  

           78 .  세례 요한의 세례에 대해
  질문 :
세례 요한이 행한 물세례는 사람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형식적으론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받는 세례(침례)와 같은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침례를 행하시며 이제 오실 분은 (예수그리스도) 너희에게 성령 세례를 주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성령 세례는 어떻게 받는 것입니까? 제가 아는 성령 세례는 성령을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성찬식은 주님이 의미를 부여하시고 명령하신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의식입니다.
마찬가지로 물을 사용해 행하는 세례 의식도 성찬식과 같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따라서 게시판 답글들에서 성찬식을 바라보는 입장으로 물을 사용하는 세례 의식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롬 10:14), 그 말씀에 의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롬 10:14, 막 16:16),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행2:37-39), 신앙을 고백하고 (마16:16, 요1:49, 20:28), 비로소 세례를 받으면(행 2:37-39, 22:16) 죄 사함을 얻게 되고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같은 이도 다메섹 도상에서 성령을 체험하였지만, 그 역시도 구원을 얻기 위하여 세례를 받지 않습니까?(행 9:1-19, 특히 19절) 그것은 은사와 구원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인용문은 세례와 구원에 관계를 설명해 주시고 있는 글입니다.
그런데 각각의 내용은 모두 성서적이고 바른데 뭔지 모를
개운하지 않음이 있습니다.
기도를 해봐야 겠습니다.

어떤 분의 말씀이
우리를 구원하는 성령 세례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롬 10:14), 그 말씀에 의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롬 10:14, 막 16:16),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행2:37-39), 예수를 구주로 시인하는 신앙을 고백을 (마16:16, 요1:49, 20:28) 통해 받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죄사함 곧 예수님의 영, 성령을 선물로 받는 성령 세례를 받으므써 (이 과정은 빵과 포도주를 사용하는 성찬식과 같이 물을 사용하는 세례 의식을 통해 이루어 지며 성찬식과 같이 물을 사용하는 의식은 없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물을 이용해 물세례를 주어야 죄사함이 있고 성령 세례,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용문은 그분의 말씀과 비슷한 느낌을 줍니다.
그런데 그 분은 인용문과 같은 것을 행하셨지만 구원은 하나님께서 결정하시는 것이니 난 확신할 수 없다는 고백을 하셨습니다. 그저 말씀을 따라 긍휼하심을 바라며 최선을 다할 뿐이라고 하셨습니다.

전 질문합니다.
인용문처럼 행하고 믿고 세례 받은 분은 구원을 확신할 수 있습니까?
  답변 : 2003-05-12
당연한 말씀입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의 논리로 짜 맞춘 이론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귀하께서 질문하신 핵심은 성령 세례의 문제보다도(그것은 이미 확신하고 계시는 것으로 봐서) 구원의 확신에 관한 문제로 이해됩니다.
구원에 있어서 우리는 두 가지 극단적인 오류를 범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저의 신앙적 이론보다는 Jack Cottrell 의 [His Truth] 중에서 "확신에 관한 진리"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확신한 수 있는가? 이것은 실제적인 관점에서 나온 질문이다. 우리가 가장 크게 느끼는 필요는 현재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으신다는 것과 장래 영광에 참여할 것을 확신하는 느낌이다. 다시 말하면, 복된 확신 인 구원의 확신이 필요한 것이다.
확신이란 무엇인가? 확신을 가진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그렇다면 확신에 관한 근거는 무엇인가? 확신의 문제에 관해 여러 가지 접근 방법이 있는데 그 중에 성서의 가르침과 상반되는 것들이 있다. 성경적인 관점을 설명하기 전에 잘못된 두 가지 주장을 살펴 넓기로 하자.

Ⅰ.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
확신에 대한 가장 통속적인 두 가지 잘못된 개념은 그 범위의 서로 반대편 끝에 서있다. 하나는 일반적 생각인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 는 것이고, 또 하나는 확신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다.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 는 의견은 보통 영원 구원 이라 불린다. 그 생각은 사람이 한번 진실한 신자가 되면 그가 믿음을 잃는다는 것(영원히, 적어도)은 불가능하다는 것이고 그러므로 그가 구원을 잃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사람이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을 입는 순간부터 그는 영원히 안전하다. 그는 은혜로부터 떨어질 것을 염려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그를 믿음 안에서 영원히 지키실 것이다.
이러한 전해는 칼빈주의의 전체체계의 한 구성 요소이다. P 는 T- U- L - I - P(칼빈주의의 5가지 요점의 머리글자를 영어로 표시한 것: 역자 주)의 성도의 궁극구제(또는 보호) 에 해당한다. 그것은 논리적으로 완전타락, 무조건적인 선택과 거역할 수 없는 은총의 개념들에 따른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이전에 벌써 완전 타락한 인간 중에 누구를 구원할 것인가를 무조건 결정하셨다. 그리고 정한 때가 되면 하나님이 그들을 저항할 수 없도록 부르시고 그들에게 믿음의 선물을 주신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서 절대적으로 조종하시기 때문에 모든 신자가 마지막까지 자기들의 믿음을 지키도록 하나님께서 실수함이 없이 보살피실 것이다. 철저한 칼빈주의 자들은 그렇게 주장한다. 칼빈주의는 믿음의 자유의지 본성을 부인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 는 것은 이 부인하는 것의 바로 다른 또 하나의 관점이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는 사람이 자기 자신의 자유의지의 구원을 믿을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고 또 믿기를 그만둔다거나 자기의 자유의지로 구원을 한쪽으로 던져 버릴 수도 없다. 칼빈주의적인 종교 그룹들(대부분 성경을 믿는 장로교인들)은 그 조직의 논리적 완전성을 받아들인다. 다른 그룹들(전부는 아니지만 침례교인들)은 부조리하게도 영원안전의 교리를 보지하고 있으면서도 그 기초가 되는 칼빈주의의 나머지 교리는 거부하고 있다.
우리는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 는 견해를 성경의 가르침과는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에 거부해야 한다. 확실히 하나님께서 우리를 쫓아내시지 않는다(요10:28~29; 롬8:31~39).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쫓아낼 가능성은 많다. 성경은 구원의 조건적인 성질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구원을 받는 것과 보유하는 문제는 둘 다 주님이신 그리스도께 우리의 자유의지로 순복하는 가의 여부께 달려 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면‥‥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요15:6~10) 만약 그렇게 하고 있다면 문제가 없다. 그러나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 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요15:6). 또는 바울이 말한 것처럼(골1:23),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그렇다면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계속 거하지 아니하면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너도 꺾이우리라.(롬11:20~21 )고 말한다.
사람이 은혜에서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 히브리서 전체의 중요한 가정이다. 히브리서의 주제는 바로 사람이 그리스도안에 있는 믿음을 포기할 수 있다는 가능성과 그 위험과 그 어리석음에 대한 것이다. 분명히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것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되었고 그래서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그리스도를 믿기 전의 유대교로 되돌아 갈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히브리인들에게 보내진 그 편지는 그러한 변절을 하지 못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쓰여진 것이다. 그 예로, 히브리6:4~5에서 말하는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가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 본 자들은 분명히 진실로 그리스도인이 되었던 자들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히브리6:6절은 그들이 그러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그것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분명히 은혜에서 실제로 떨어져 버리는 것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히브리서2:1~3, 3:6~14, 4:1~11, 10:26~39, 12:25을 참조하라. 그러므로 우리는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 는 것은 확신에 관한 성경적인 견해가 아니라고 결론 짓는다.

Ⅱ. 아무리 해도 확신할 수 없다
또 다른 피해야 할 극단적인 견해는 아무리 해도 확신할 수 없다 는 것이다. 이러한 의견을 주장하는 자들은 모두 확신의 가능성을 부인한다. 그들은 우리가 아무리 그리스도인으로 노력해도 하나님과 우리와의 좋은 위치를 확신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영원구원 개념을 거절하고는 이런 극단으로 빠진다. 그들은 확신문제에 있어서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 는 무조건적 확신 개념과 마찬가지로 잘못을 범하고 만다. 그래서 그들이 전자의 개념을 거부할 때 그것과 함께 모든 확신을 내던져 버린다. 그런데 개인 구원에 대해 불확실한 가장 일반적 이유는 은혜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있다. 어떤 식으로든 아직도 구원은 행위로, 즉 충분히 선해짐으로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다. 이렇게 생각하는 자들은 그와 동시에 자기가 무가치한 죄인이며 또 의심과 걱정과 절망의 재난에 묶여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그는 자신이 충분히 선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가 바랄 수 있는 최선은 교회에서 죽거나 또는 죄 사함을 위해 매일 드리는 기도를 하다가 죽는 것일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는 구원의 확신을 말하는 자들을, 마치 그들이 구원받을 만큼 선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생각하고는, 그들은 너무 교만하고 자랑하는 자들이라고 정죄한다. 그러나 구원은 선(善)해짐으로가 아니라, 용서받음으로 얻는 것이다.
아무리 해도 확신할 수 없다. 는 견해는 한번 구원 밭으면 영원히 구원 받는다 는 주장과 마찬가지로 성경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극단적인 주장들은 둘 다 거부 되어야 한다.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Ⅲ.성서적 확신
확신에 관한 성서적인 접근은 베드로 전서1:5에 잘 요약되어 있다. 그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다. 는 것이다. 이 말씀은 확신의 필수요소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리스도인의 믿음, 둘 다를 강조하고 있다.

A.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라는 말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과 내쫓지 않으실 것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히10:23을 보라)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원수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요10:28~29; 롬8:31~39; 고전10:13; 살후3:3; 요일4:4을 보라). 이 방책들은 내주 하시는 성령과 성경말씀, 기도, 교회, 교회의 교제와 교회의 목양 등을 포함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의 가장 큰 방책은 하나님 자신의 신실하심과 끊임없는 사랑이다. 바울이 로마서5:1~11에서 가르친 것에 의하면 이 사랑이야말로 우리의 확신을 위한 가장 견고한 기초인 것이다. 그 말씀에서 바울은 구원에 2개의 근본적 변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첫 변이는 노여움에서 은혜로, 둘째 번은 은혜에서 영광으로의 변이이다. 그 첫, 노여움에서 은혜로의 변이는 단연, 가장 어렵고, 가장 극단적이며 가장 가능할 것 같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방법을 마련하였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그 다음 변이에로 인도할 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의심할 수 있는가? 그 다음 변이는 처음 것과 비교하면 훨씬 덜 근본적인 것이다.
이 말씀들에서 바울의 사상이 전진해 가는 것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우리에게 최종적인 선물은 마련해 주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그 사랑은 하나님과 친구가 된 우리를 지금 버리시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하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했고, 죄가 많았고, 소용이 없는 원수였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가? 적어도 그 아들로 하여금 우리대신 고통을 당하게 하시지 않았는가!(롬5:9~10)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 되었을 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위해 그렇게 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의롭게 되고 하나님과 화목 된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그보다도 더한 것도 하시리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롬5:9~10)
하나님께서 그와 원수들을 위해 죽으시는 극단까지 취하셨다면 왜 하나님과 화목한 자들을 구원하시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사랑이 그 나머지, 좀 덜 근본적인 변화를 취하시기에 충분하지 않겠는가? 친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 원수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보다 덜 할 수 있겠는가? 노여움과 은혜( 우리가 서있는 2절), 사이의 그 엄청난 틈을 하나님의 사랑이 메울 수 있었다면, 그 동일한 사랑이 은혜와 영광 사이의 조그만 틈을 훨씬 더 잘 메울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그 훨씬 더 큰 사랑이 우리의 확신의 근거이다.

B.믿음으로 말미암아
베드로 전서1:5은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다고 말한다. 이 단순한 말씀이 확신에 관한 2가지 사실을 나타내 주고있다.
첫째, 그것은 확신이 절대적이거나 무조건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확실히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것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도록 우리자신을 허락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에 달린 것이고, 그것이 바로 조건인 것이다. 우리가 자유로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약속들을 계속 신뢰하는 한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은혜 안에 보호하실 것이다. 만약 우리가 신뢰를 그친다면, 우리 자신의 결정으로 우리가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잘라 내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신다는 그 사실은 확신이 조건적인 것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들을 믿고 있는 동안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현재의 관계에 대해 확신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언젠가 나중에 우리가 믿음을 잃어버리거나 은혜에서 떨어질 수 있는 가능성은 언제나 남아 있다(갈5:4) 그렇지만 우리는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그들의 최선을 다해 계속 신뢰하리라고 믿는다.
둘째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입었다는 것은 구원의 확신이 행위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이미 살펴 본대로 우리는 율법으로 말미암은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롬3:28)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아는 것이 확신으로 가는 참된 열쇠이다.
의롭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과 화평케 된다는 뜻이며(롬5:1), 정죄 받지 않는다는 뜻이다(롬8:1)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은, 이 하나님과의 화평과 정죄로부터의 자유가 우리가 얼마나 선한가(행위)에 달린 것이 아니라, 모든 것에 충분한 그리스도의 피를 계속 신뢰하는가에 달린 것이라는 것을 뜻한다. 로마서5:1~11에서 바울이 말한 두 가지 전이로 잠깐 되돌아 가보면, 첫번 전이에서의 우리의 역할은 행위에 의해서 가 아닌 믿음으로 말미암아 라는 말로 요약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노여움에서 은혜로의 간격을 건너온 것이다(롬5:2) 이 첫번째의 무시무시한 간격을 우리자신의 행위로 건너온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두 번째 간격도 우리의 행위로 건널 수 없는 것이다. 그 둘 다를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께서 건너게 하셨고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은혜를 붙들고 있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확신에 대한 우리의 의식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아는 데서 오는 것이지, 성화의 어떤 단계에 도달해야 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얼마나 선한가? 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함 받았는가? 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세례 받은 그 이후부터는, 그리스도 때문에, 백 퍼센트 용서받았다는 것을 아는가에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과의 현재의 관계에 대한 확신은 영광의 소망 (롬5:2; 골2:27)을 갖게 해준다. 소망 은 장래에 대한 확신이다. 그것은 좋은 것을 믿고 바라는 기대이다.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소망이란 단어는 때때로 단지 바람일 뿐이지만 성경에서는 그렇지 않다. 성경에서 말하는 소망은 그것이 불확실하기 때문이 아니라 미래에 있을 것을 말하기 때문에 소망이라고 하는 것이다. 로마서8:24~25을 보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피를 인해 현재 의롭게 된 우리는 이 소망, 곧 영원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확실한 기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요일3:3)

주님의 평강을 빕니다.


BCC 소개 | 뉴스레터 | 찾아오시는 길 | 개인정보 보호정책 | TOP ▲
BCC | 서울시 강서구 방화1동 180-14 7F | 비영리법인번호:109-82-03052 | Tel (02) 2662-0793, 2662-8081 | Fax (02) 2662-8082
Portions are Copyrighted 1964-2026 BCC. Contact us for more inform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