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종교는 본질적으로 사랑의 종교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다른 모든 종교와 구별되는 점입니다. 이슬람교는 무력으로 세워진 종교입니다. 불교는 존재하는 모든 사랑의 최고의 상태는 소멸이라고 가르칩니다. 그것이 최고의 선으로서 존재로부터 놓여지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유교는 어떤 신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므로 종교라고 부르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생활 철학 같습니다. 대부분의 이방 종교는 무력이나 공포, 철학을 기반으로 생겨났습니다. 우리의 경험은 사랑의 구속이 존재하는 가장 강력한 구속임을 분명하게 알게합니다.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요일 4:18).\"는 말씀보다 더 참된 것은 없습니다.
예수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사랑의 하나님으로 설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고 선언하셨습니다. 이전에는 하나님이 높은 보좌에 앉아 계시며 아무도 그의 말씀에 불복할 수 없는 전제 군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이 땅의 어떤 존재의 사랑도 넘어서는 무한한 사랑을 가진 아버지로서 하나님을 묘사하셨습니다. 예수는 인상적인 예를 들어 이를 설명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마 7:9~11)\"
우리는 \"어느 계명이 가장 큽니까?\"라는 질문에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37).\"고 하신 예수의 답변에 놀라지 않습니다. 이것은 쉽게 노하시는 하나님을 달래기 위해서 억지로 사랑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까닭에 우리도 그를 사랑하는 것입니다(요일 4:19).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우리도 사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계명을 얼마나 잘 지키느냐에 따라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평가됩니다. 예수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고 하셨습니다. 요한은 그것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요일 5:3).\" 그를 사랑하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이웃까지도 사랑하기를 하나님은 바라십니다.
예수는 두 번째 중요한 계명으로 \"너희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 22:39).\"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적 가족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는 것은 \"우리가 형제를 사랑한다.\"는 증거입니다.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는 것은 자명한 이치입니다(요일 4:20). 형제에 대한 우리의 사랑에 대해 요한은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요일 3:17) 그런 후 그는 긍정적인 답을 제시합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8). 요한은 스승의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했습니다. 예수가 가르치신 사랑은 동정을 가진 사랑입니다.
이제 사랑의 위대한 스승, 예수가 이 주제에 대하여 가르치신 교훈을 살펴보겠습니다. 어떤 용어나 구절은 그것을 사용한 사람이 그 의미를 제일 잘 설명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의롭게 보이기 위해 노력하는 어떤 율법사가 예수께 물었습니다.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 예수는 답변에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 의미하는 바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모든 진리 탐구자들은 예수가 효과적으로 그의 말씀하시는 의미를 설명하여 의심이나 논란의 여지가 없도록 하신 것을 기뻐합니다. 예수는 그의 교훈을 외면하고 스스로 의로워지려고 하는 자들을 철저하게 정죄 하셨습니다. 다음의 예화는 이런 행동에 대하여 엄격한 태도를 취하셨던 예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같이 한 레위 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의견에는 이 세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같이 하라 하시니라 (눅 10:30~37)
역경에 처한 자가 어디에 있든지 그를 도울 수 있는 기회만 있다면 그가 곧 우리의 이웃이 되고 우리 또한 그의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그 율법사는 예수의 권위 있는 말씀에 더 이상 묻지 않고 그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는 사랑에 관한 또 하나의 훌륭한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눅 14:12~13).\" 그러나 사랑에 대한 그의 가르침의 정수는 산상수훈에서 말씀 하신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냐?(마 5:44~46)\"라는 말씀에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고귀한 사랑의 개념을 그 어떤 역사적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아마도 예수가 가르치신 사랑의 교훈에 근접했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로 인해 세상이 더 풍요로워지고 나아졌다는 사실에 대해 누가 의심하겠습니까!
예수는 사랑에 관한 최고의 개념을 가르치셨을 뿐만 아니라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그의 가르침의 살아있는 본보기가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이 점에서(다른 점에서도 마찬가지지만) 그는 아버지 하나님의 모습을 나타셨습니다. 그는 죄인의 가정을 방문하셨고 그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셨습니다. 이러한 행동에 대하여 비난받으셨을 때 그는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 9:12~13).\"고 대답하셨습니다. 사실, 그를 비난한 자들은 완전하지도 의롭지도 않았지만 그들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고 있었으며 예수는 그들의 요구에 관해 논쟁할 적당한 시간을 계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먼저 그들의 필요를 자각하는 사람들에게 가서 그들을 돌보았습니다.
그가 삭개오의 집에 가셨을 때 \"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라고 했습니다(눅 19:7). 실제로 삭개오는 죄가 많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죄를 참회하길 원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기쁘게 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말한 누가복음 18장에서 언급된 세리인지도 모릅니다. 예수께 허물을 찾으려고 하는 이들은 “하나님이여, 제가 다른 자들과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눅18:11) 라고 한 바리새인과 같은 부류임이 명백합니다. 예수가 삭개오의 가정을 방문하신 오직 한 가지 이유는 \"인자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왔다.\"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아름답게 묘사된 곳은 누가복음 15장입니다.
다음구절을 자세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너희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난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 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4~7)
\"잃어버린 동전\"과 \"탕자\"의 비유를 읽어 보십시오. 탁월한 솜씨로 예수는 간결하고 생동감 넘치게 탕자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한 젊은이가 집으로 돌아가 새 소망의 삶을 살기 시작하는 장면을 보십시오. 그는 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탕진해버렸습니다. 결국 그는 스스로를 돌이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일어나서 아버지에게로 가리라.\" 기진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탕자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러나 반백이 된 그의 아버지가 멀리서 아들을 보고 달려가 맞이하던 장면을 보십시오. 또, 목을 안고 입을 맞추던 장면을 보십시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고 한 그의 외침을 들어 보십시오. 주님 외에 누가 이렇게 생생한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사랑에 대한 교훈을 가르치셨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애를 통해 그 모든 교훈을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그가 바리새인 가정을 방문하셨을 때 \"죄인인 한 여자\"가 예수의 소식을 듣고 그 집으로 찾아 왔습니다(눅 7:37). 예수가 식탁에 기대어 비스듬히 앉아 계실 때 그녀는 그의 발치에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 맞추었습니다. 죄책감이 가득차 있던 그녀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이처럼 선량하신 선생님 곁에서 그를 만지고, 그의 따뜻한 사랑을 느끼며,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음이 그녀에겐 얼마나 기쁜 일이었겠습니까! 그녀는 아마도 일부 위선적인 고위층의 희생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죄인의 친구가 되시는 구주가 계신다는 사실이 우리에게는 말로 할 수 없는 위로가 됩니다. 그는 우리의 슬픔을 아실뿐만 아니라 그 슬픔을 함께 나누십니다. 그는 우리가 역경에 처해 있을 때 우리를 이끄시고 보호하시는 신뢰할수 있는 분이십니다. “선한 사회”에서 쫓겨난 이 타락한 여인이 예수로부터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그 감격이 어떠했겠습니까!
간음한 여인을 대하는 예수의 태도에 관하여 이야기해봅시다. 그는 그녀의 죄를 묵인하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연약함을 동정하시고 사나운 개처럼 으르렁대는 사람들로부터 그녀를 떼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그는 지금까지 가장 불행한 희생자들에게 또 다른 기회를 주시기 위하여 계십니다. 이러한 구주가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원한 파멸의 구덩이에 빠져버리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죄악의 어두운 혼돈에서 건짐을 받고 그의 영광스러운 나라에 동참하여 하나님의 후사가 된 것은 모두 그의 무한하신 사랑 때문입니다.
한 번은 예수가 너무 피곤하고 지쳐 그의 열두 제자들과 함께 게네사렛 호수를 건너서 어느 조용한 안식처를 찾아보려고 하셨을 때였습니다. 그러나 무리들이 훨씬 앞질러서 그 곳에 가 있다가 예수가 배에서 내리셨을 때 한꺼번에 그에게 몰려들었습니다. 이런 때에는 사람들을 외면하거나 뿌리쳐 버리는 것이 인간적인 반응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무리들을 측은히 여기셨기 때문에 그들의 정신적, 육체적 욕구가 충족되어질 때까지 그들을 해산시키거나 피하지 않으셨습니다(마 13:13~14).
공관복음서에서 우리는 안식일에 예수가 회당에서 손마른 남자를 고치신 사건을 보게 됩니다(마 12:9~14, 막 3:1~6, 눅 6:6~11). 모든 사람들이 예수가 안식일에 정말 병을 고치시는지 보기 위해 그를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문자적인 조항을 깨뜨리는 것을 큰 범죄로 간주하면서도 그 근본정신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자기를 비난하려는 그들의 의도를 아시고 그들의 도전에 당당하게 응하셨습니다. 예수는 손마른 남자에게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 하시고 그의 비난자들을 향하여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마태는 이 논쟁을 더 자세히 전합니다.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이를 통해 예수는 자기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의도를 좌절시키셨을 뿐만 아니라 \"나는 제사를 원치 않고 자비를 원한다.\"는 하나님 말씀의 의미를 명확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예수가 행하신 또 다른 사랑의 모범은 여리고에서 두 사람의 소경을 고치신 일입니다(마 20:29~34, 막 10:46~52, 눅 18:35~43). 인간적인 관점으로 말한다면, 이것은 그의 승리의 순간이었습니다. 수많은 무리들이 그를 따랐습니다. 사실 그들은 예수를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왕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소경 둘이 길가에 앉아 있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얘기를 듣고 소리 질러 외쳤습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이에 무리들이 \"잠잠하라.\"고 꾸짖었으나 그들은 더욱 크게 소리쳤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의 외침을 소홀히 여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자기의 본성과 일치되는 일만 행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희를 불러 가라사대,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주여 우리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저희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저희가 예수를 좇으니라.\"
예수의 사랑은 이기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어느 민족이나 국가에 제한된 것도 아닙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샘 곁에 앉아 계신 예수를 보았을 때 그가 조금도 거리낌 없이 자기에게 말을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제자들도 동네에 들어갔다가 다시 돌아와 이 광경을 보고 놀랐습니다(요 4:9, 27). 그러나 예수에게는 그 여인이 유대인들에게 경멸의 대상이 되는 사마리아인이라는 사실이 문제되지 않았습니다. 로마의 백부장이 그에게 와서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와하나이다.\"라고 말했을 때 예수는 즉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마 8:6~7).\" 이방인 장교인 백부장은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으로 그 하인을 치료하셨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경우도 타민족에 대한 예수의 마음을 아름답게 보여줍니다(마 15:21~28, 막 7:24~30). 마태는 그 여인을 \"가나안 여인\"이라고 부릅니다. 수로보니게인들은 유대인의 옛 원수였던 가나안 족속의 후예였습니다.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예수는 수로보니게 촌으로 가셨습니다. 그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하라고 하셨지만 예수의 소문을 듣고 온 그 여인은 그의 발아래 엎드려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여인은 \"귀신에 들린\" 어린 딸의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예수는 그 여인을 동정으로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보셨으나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여인을 되돌려 보내기를 간구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는 그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그러나 예수의 부드러운 시선과 동정어린 음성은 이 여인에게 한 가닥 소망을 갖게 해주었습니다. 여인은 다시 한 번 애원했습니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 예수는 또 대답하시기를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다른 민족을 대하는 유대인들의 태도를 떠올리며 그 여인은 예수의 태도와 음성에서 자기에게 하신 대답이 최종적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습니다. 여인은 눈물을 흘리면서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엄숙하게 예수는 대답하셨습니다.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그러자 귀신은 그녀의 딸에게서 물러갔습니다.
예수는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마 11:20~30). 고대의 몇 이교 도시가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서 멸망했던 사실을 상기하면서 예수는 이렇게 탄식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잠시 아버지 하나님과 교통하신 후에 눈을 들었습니다. 그는 초대의 대상을 죄악에 물든 이들 도시의 시민들뿐만 아니라 온 세계의 인간들에게까지 넓히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이 얼마나 놀라운 초대의 말씀입니까! 여기에 인종과 피부의 차이가 문제되지 않습니다. 얼마나 죄악에 깊이 빠졌는지, 얼마나 가난하며, 또 절망하고 비참한지를 묻지 않으십니다.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렇게 그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예수의 사랑은 모든 인간을 위해서 자기를 속죄의 제물로 바치신 사실에 의해서 더 완전하게 나타납니다. 그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부활하신 후에 그는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제자들을 파송하셨습니다. 유대인에게만 국한이 되었던 이전의 명령은 예수가 계획하신 더 큰 역사를 위한 하나의 주춧돌이 되었습니다. 예수의 속죄는 그 범위가 우주적인 까닭에 이 계획은 모든 피조물을 위한 것이고 모든 인간에의 초대이기도 합니다. 우주적 구원을 가로막는 오직 하나의 장애물은 인간의 우매한 고집입니다. 나아오고자 하는 이는 누구나 예수께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자에게는 예수가 이런 말씀을 하시기도 했습니다.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치 아니하는도다(요 5:40).\" 예수가 모든 자로 하여금 더 풍성한 생명을 갖게 하려고 오셨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생명을 거부한다면 이는 얼마나 어리석은 행위입니까! 바울은 예수에 관해서 이렇게 간증하였습니다. \"그가 부요한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8:9).\"
예수의 사랑의 깊이는 그가 우리를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스스로 내어주신 사건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요 10:17,18).\" 만약 혹평가들이 이 말씀이 오직 요한복음에만 쓰여졌다고 해서 전적으로 받아들이기를 꺼린다면 그들의 의심은 도움 받을 방법이 없습니다. 마가는 예수의 말씀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막 8:31).\" 마태와 누가도 이 구절을 똑같이 기록하였습니다.
예수가 동산에서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을 때 \"잔\"을 죽음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할 만하시거든\" 맛보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신 것은 정신적인 고뇌를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라는 이 단순한 말씀의 뜻을 충분히 드러내자면 무한히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속죄에 관한 이론이 축제에서 경쟁하기 위해 출품되어진 많은 직물처럼 수없이 발표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유한한 사고력으로 추측하는 그릇된 생각들은 하나님에게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아는 것은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죄인들을 위하여 죽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 그러나 예수의 경우는 이것과 차원을 달리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무례한 하속들이 예수를 잡으러 왔을 때 그의 태도를 보십시오. 그들은 마치 그가 죄인인 듯 거칠게 묶었습니다. 무리들은 그에게 침을 뱉었습니다. 벗은 몸을 채찍질하고 예수의 이마에 가시관을 씌웠습니다. 그의 발과 손에 못을 박았습니다. 그리하여 그 십자가를 높이 세웠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옵소서.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이것의 모든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3:17~19)”는 예수의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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