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그의 생애를 통해서 몸소 실천하지 않은 것은 한 말씀도 가르치신 적이 없습니다. “모세의 자리”에 앉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과는 달리 예수는 자신이 실천 못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명령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언제나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그는 우리의 위대한 사표(師表)가 되십니다.
예수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을 때, 그는 겸손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본을 세상에 보여 주셨습니다. 이 아름다운 장면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고 지나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일부 아마 주의 만찬을 제정하시던 때 있었던 사건이라 크게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인 듯 합니다. 그러나 이처럼 인상적이고 의미심장한 교훈을 무시해 버리는 것은 중대한 과오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가 겸손을 보여주신 이 사건을 더 자세히 관찰해 보겠습니다. 먼저, 주의 만찬이 제정되었을 때, 그것은 하나의 새로운 사건이었음을 주목해야합니다. 때는 예수가 마지막으로 유월절 만찬을 끝내시던 참이었습니다. 예수와 제자들은 다시는 이와 같은 만찬의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그는 둘째 것을 세우시기 위해서 첫째 제도를 폐지하셨습니다(히 10:9).
그러나 발 씻는 일은 다릅니다. 오랜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4천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살펴보겠습니다.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 장막 문 앞에 앉아 있던 아브라함이 세 명의 손님에게 베푼 겸손을 보십시오.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 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가로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컨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옵시고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서 쉬소서.’ 그들이 가로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창 18:2-5).” 그로부터 200여년 후 요셉이 애굽의 총독으로 임명되었을 때입니다. 그의 형제들이 곡식을 사러 애굽으로 내려왔을 때 요셉은 문지기에게 “그들을 요셉의 집으로 인도하고 물을 주어 발을 씻게” 하였습니다(창 43:24). 베들레헴의 큰 별이 생겨나기 천년 전에 다윗이 나발의 젊고 아름다운 과부 아비가일을 자기 아내로 삼기 위해서 사환들을 갈멜에 보냈습니다. “그가 일어나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가로되, 내 주의 여종은 내 주의 사환들을 발 씻길 종이니이다, 하고(삼상 25:41).” 이것으로 볼 때 다윗 시대에는 남의 발을 씻어주는 것이 종들의 임무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발 씻는 일을 다른 선행과 함께 가정에서 마땅히 행해야하는 겸손한 봉사로 간주하였습니다. 교회가 보살펴야 할 과부에 대하여 언급할 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과부로 명부에 올릴 자는 나이 육십이 덜 되지 아니하고 한 남편의 아내이었던 자로서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혹은 성도들의 발을 씻기며 혹은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좇는 자라야 할 것이요(딤전 5:9-10).” 하지만 여기에 언급된 행위들을 교회의식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제 발 씻는 일에 대해 예수가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예수가 어느 이기적인 바리새인에게 식사 초대를 받으셨습니다. 그 때 어떤 타락한 여인이 와서 그의 발을 자기 눈물로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씻었습니다. 주인이었던 시몬은 예수가 그 여인의 정체를 모르고 속임을 당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예수는 그의 마음을 아시고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 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눅 7:44-46).” 머리에 감람유를 붓는 것은 특별한 손님에게만 베푸는 전통적인 영접이었습니다. 그러나 발에 향유를 붓는 것은 일종의 사치였습니다. 손이나 볼에 입 맞추는 것은 인사의 표현입니다. 발을 씻어주는 것은 주인이 손님에게 베푸는 정중한 예절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양말을 신지 않았으므로 신을 벗긴 후에 손님의 발을 씻기는 것이 일반적인 관습이었습니다. 이처럼 작은 예절을 시몬은 무시해버렸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시몬이 무시해 버린 일을 넉넉하게 실천한 것입니다.
당시에는 남의 발을 씻기는 일을 하인들의 임무로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하인이 있는 가정에서는 손님이 방문했을 때 발을 씻긴 후에 집안으로 모시게 하였습니다.
여기서 유대인들이 강력한 지상 왕국을 갈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해 봅시다. 당시 로마제국은 그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어떤 제국도 그 권력의 강대함에는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디베리우스 시저는 거의 무한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주후 37년에 그가 죽자 왕위를 계승한 황제들은 권력을 지나치게 남용하였습니다. 그 학정이 날로 심해 갔습니다. 더 많은 영토를 정복하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로마인들은 어떻게 관리해야 좋을지 알 수 없을 만큼 수많은 노예를 거느리게 되었습니다. 이 노예들은 주인이 탄 가마를 어깨에 메고 다녔습니다. 황제와 원로들, 그 외에 높은 계급의 권력자들은 지나 갈 때 천민들로부터 절을 받았습니다.
‘황제’는 명령을 내리는 사람임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황제는 정부를 총괄 지휘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최고의 지위를 가진 황제는 로마제국의 일등 시민으로 받들어졌습니다. 궁중 행렬이나 연회석, 공중 집회에서는 황제가 중앙에 자리를 잡으면 신하들은 계급의 서열에 따라 차례로 그와 가까운 자리에 앉았습니다. 이것은 위대함을 존중하는 세상의 보편적인 방법이었습니다. 유대인들도 이 점에 있어서는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 이 사실을 분명하게 지적하셨습니다.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 하느니라(마 23:5-7).”
사도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지상의 권력을 장악해 보려는 야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한 젊은 부자가 자기의 소유를 가난한 자들에게 분배하고 싶지 않아 예수에게서 돌아섰을 때 그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마 19:23).” 이 말씀은 지상에서의 방식과는 정반대입니다. 로마의 시민권은 돈으로 살 수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바울을 체포한 천부장은 “돈을 많이 들여” 시민권을 샀다고 말했습니다(행 22:28). 지상의 왕국에서는 돈 많은 자가 대체로 높은 지위를 차지합니다. 예수는 부자가 하늘나라의 시민이 되기는 지극히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이 기회를 놓칠새라,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마 19:27)”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는 어렵다고 하셨으므로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는 자기들에게는 높은 지위가 주어질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일군의 비유는 이런 잘못된 생각을 고치기 위해서 말씀한 것입니다.
변화산 사건이 있은 후 사도들 사이에서는 천국에서 누가 더 크냐하는 문제로 언쟁이 벌어졌습니다. 사도들은 곧장 예수에게 나와 이 문제를 내놓았습니다.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마 18:1)” 그 며칠 전에 예수는 베드로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8-19).” 만일 그가 베드로 위에 그의 교회를 세우시고 그에게만 왕국의 열쇠를 맡기시며 또 그와 그의 계승자에게 최고의 지위를 주시겠다는 말씀이었다면 이 때야 말로 “베드로에게 상석을 주겠다.”고 말할 좋은 기회였을 것입니다. 그의 마음속에 이런 의도가 있었다면 그는 지위 문제를 확실하게 해결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정반대였습니다. “예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2-3).” 이렇게 그는 제자들의 권세욕과 위대성에 대한 개념을 완전히 수정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몇 달이 지난 후, 그가 마지막 유월절에 참석하러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그에게 왔습니다.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하니라(마 20:20,21).” 살로메(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의 의도는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수많은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자기 아들에 대한 야심이 너무 커서 결국 이기적 욕심으로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그녀의 부탁을 듣고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이는 순수한 개인적 공과에 의해서 좌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결정하실 문제인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살로메의 간청을 듣고 이 두 형제들에 대하여 격분하였습니다. 이 문제는 이전에도 여러 차례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나머지 열 사람도 천국의 상좌를 차지할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그들의 어머니를 통해서 자신들의 욕심을 달성해 보려했던 것처럼 나머지 제자들도 그런 욕심을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헛된 망상을 고쳐주기 위해 다시 한 번 예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사람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그리고는 이야기의 초점을 돌려 자신의 생활에 맞추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5-28).” 이 말씀은 열두 제자들의 마음속에 있던 문제에 명쾌한 해답이 되었습니다. 자리를 다투는 그들의 언쟁에 영원한 종지부를 찍어준 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교훈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이 말씀을 받아들이기까지는 아직도 많은 시간과 인내가 필요했습니다.
이제 예수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던 날 밤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그는 그 날 예루살렘에서 약 4킬로 떨어진 베다니에서 지내셨습니다. 예수는 제자 가운데 몇 사람을 데리고 오후 늦게 그 마을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들의 발은 땀과 먼지로 더렵혀져 있어서 심신이 불쾌했습니다. 발을 씻어줄 만한 주인이나 하인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12명 가운데 한 사람이 이 일을 기쁘게 해야 했습니다. 겸손과 봉사에 대한 예수의 교훈을 실천할 좋은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이 기회를 잡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누가 크냐?” 하는 문제로 다투었습니다.
만일 예수가 이러한 영예를 베드로에게 주려고 하셨다면 그는 제자들의 헛된 논쟁을 가만 두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생각을 말씀하시는 대신에 그는 조용히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셨습니다. 주인의 자리에서 종의 자리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두르신 수건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들이 느꼈을 부끄러움을 생각해 보십시오. 처음에는 베드로가 거절하였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 13:4-14).”
그러면 이 모든 일의 목적은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그들 중에 누가 더 크냐 하는 논쟁과 아무 관계가 없을까요? 그것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주님의 교훈을 주목해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이보다 더 명쾌하고 적절한 교훈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종교 지도자들이 이 교훈의 정신에서 크게 빗나가있는 것을 볼 때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겸손의 실제적인 모범과 공중 예배 의식은 혼돈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교회에서 제정된 의식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후 두 달이 지나도록 교회가 설립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묻습니다. 그러면 주의 만찬도 교회에서 베풀어진 것이 아니란 말인가? 분명히 그렇습니다. 주의 만찬은 교회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예수는 이 사실을 분명하게 언급하셨습니다.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 하리라(눅 22:18).” 마태는 또 그의 말씀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마 26:19).” 오늘날 잔을 마실 때 우리는 예수의 왕국 안에서 그와 함께 마시는 것입니다. 주의 식탁은 성령에 의해서 그의 왕국 안에 마련되었습니다. 예수는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눅 22:29,30).” 따라서 사도 시대 때 이러한 만찬이 교회 안에서 베풀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발 씻는 행위가 교회 의식으로 행해졌다는 근거가 있습니까? 예수께서 이것을 교회에서 의식으로 행해야한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을까요? 발 씻는 행위는 교회 의식이 아닌 것이 명백합니다.
예수가 가르치신 겸손과 봉사는 오늘날 다시 강조되어야 할 정신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교훈이 진리임을 입으로는 고백하면서도 행동으로는 그 입을 배반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막 12:38).” 모든 종교 지도자들을 경계해야 할까요? 오늘날 소위 성직자들 가운데는 “너희가 긴 옷을 입고 너희의 하는 일을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한다.”는 예수의 말씀을 연상하게 만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정죄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들의 경문을 넓히고 옷깃을 크게 하고 다녔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옷깃(종교적 신분을 표시함)을 크게 만들어서 먼 곳에 있는 사람들도 이를 알아보고 존경을 표하게 하였습니다. 오늘날 소위 성직자들도 이와 같이 큰 옷깃을 달지 않습니까? 그들의 신분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닐까요? 이것은 예수 당시의 상황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다시 한번 예수는 “그들이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3:7). “랍비”는 종교적 용어로 선생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박사와 같은 뜻입니다. 예수는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 받기를 바라는 자들을 가혹하게 비난하셨습니다. 교역자들도 이런 아첨을 기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날 수많은 교역자들이 평교인과 구별되는 옷을 입고 공중 앞에 나타나서 경건한 태도로 “나는 아무개 박사입니다.”라고 자기를 소개하는 광경을 봅니다. 이 모든 것에 대하여 예수는 “진실로 그들은 상급을 이미 받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칭찬을 듣고 싶어 하는데 이것은 그들이 기대할 수 있는 상급의 전부입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마 23:8).” 오늘날 거의 모든 교파교회가 이렇게 예수가 금하신 일을 범합니다. 심지어 전도자들도 그러한 과오에 빠집니다. 예수는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마 23:9).” 많은 사람들은 이 말씀을 그렇게 심각히 여기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얼마나 자주 어기고 있습니까? 예수의 말씀을 가볍게 취급하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그들이 이교도나 불충한 자나 회의론자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도대체 그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그들은 우리는 매주일 교회에서 만나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온유하고 겸손한 나사렛 사람”을 따른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주가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 가리라.”는 찬송을 곧잘 부르는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이처럼 예수의 교훈에서 떠나게 했습니까? ‘박사’, ‘성자’ 등의 용어는 주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겸손의 아름다운 교훈을 결여하고 있습니다. 죽기 전에 사도 요한은 “저희 중에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를 책망했습니다(요삼 1:9). 소위 성직자들의 직제를 일반 신자들과 분리할 수는 없습니다. 권력이나 명예욕이 그 동기가 아니라면 우리는 총회, 노회 같은 교회 행정 조직과 서열을 가질 수 없습니다. 예수는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다.” 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 20:25-26), (막 10:42-43). 우리는 언제나 위대한 스승인 주님의 교훈을 깨닫게 될까요?
이 주제를 마치면서 다시 한 번 이 말씀을 상기해 봅시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그 정신을 깨달을 때까지 이 말씀을 읽고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12).” 이 교훈의 진리는 결코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가 가르치신 종교는 사랑과 겸손을 특징으로 하는 봉사(섬김)의 종교임을 명심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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