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복음서의 신빙성을 의심하는 자들은 주님의 공생애 기간을 산출하는데 곤란을 느낍니다. 요한의 기록을 불신하려고 제시된 논증은 분명히 편견에 사로 잡혀 있습니다. 주님이 당하셨던 세상의 배척을 묘사함에 있어서 다른 복음서의 저자들과 함께 요한의 증언은 중요합니다. 예수의 공생애에서 발생한 사건들을 순서대로 정리하기가 쉽지 않지만 문헌의 신빙성은 나열된 순서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므로 그 속에 담겨진 사건들이 허위 진술일 수 없습니다.
예수를 반대한 사건의 추이를 더듬어 보면 그 순서를 어느 정도 찾아낼 수 있습니다. 먼저 예수께서 성전을 처음으로 깨끗하게 하셨던 사건을 취급해 보십시다(요 2:13-22). 이 사건은 유월절에 일어났습니다. 광야에서 시험을 받고 돌아오신지 불과 몇 주일 후입니다.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나님의 집은 장사하는 곳이 아닙니다. 참으로 옳은 지적입니다.
성전 안에서 이윤을 추구하던 자들은 스스로의 행위를 합리화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분개하면서도 반대는 못했습니다. 성전을 치우시면서 예수는 재물을 파괴하시지 않았습니다. 소와 양들은 성전 뜰 밖으로 내어 쫓으시고 비둘기는 새장에 그대로 두셨습니다. 주인들에게 자기의 소유물을 갖고 가도록 경고하셨습니다. 쏟아진 돈은 길바닥에서 쉽게 주워 모을 수 있습니다. 예수가 무슨 권세로 성전 예배를 방해하느냐는 질문에 한 마디로 대답하셨습니다.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다시 일으키리라"
그는 갈릴리로 떠나시기 전 12월까지 유대에 남아 계신 듯싶습니다. 이 기간에 그는 많은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그의 높아가는 명성은 바리새인들의 시기심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예수께서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가셨습니다(마 4:12), (막 1:14), (요 4:1-3). 이곳은 더 많은 활동 무대가 되었습니다. 갈릴리의 명성 때문에 "그의 공적 활동을 시작하신 첫 번 무대"로 언급되어지기도 합니다. 그가 격심한 반대를 당하셨던 유대 땅에 계셨더라면 그의 죽음은 더 일찍 찾아 왔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반드시 유대를 떠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던 것 같이 갈릴리로 가셔야 할 까닭이 있었습니다. 요한의 투옥 사건은 그 교훈의 주인공인 예수로 하여금 선구자가 남기고 떠난 사업을 계승하도록 한 것입니다.
가버나움으로 가셔서 예수는 안식일에 회당에 모인 뭇 사람들을 놀라게 하셨습니다.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더구나 그는 더러운 귀신 들린 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이 놀라운 이적 사건은 사람들을 경외심으로 가득 차게 했습니다.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 도다(막 1:21-28)" 이 날의 소문은 즉시 갈릴리 전역에 퍼졌습니다. 명성은 커지고 예수는 잠시 동안도 사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무리들은 그를 좇았고 그는 자기에게 온 자를 거절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높아만 가는 그의 명성이 통치자들에게 시기심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며칠이 지난 후" 소동이 잠시 가라앉았을 때 예수는 다시 가버나움으로 가셨습니다. 한 집에 들어 가셨습니다. 즉시 이 소문이 퍼졌습니다. 모여든 사람들로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그 친구들은 지붕을 뚫고 내려 보냈습니다.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이 사건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시기심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들은 마음속으로 생각 했습니다.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예수는 그들의 속마음을 아시고 중풍병자를 고쳐주심으로써 그의 권위를 나타내셨습니다(막 2:1-12).
그 일이 있은 후에 마태를 제자로 삼으셨습니다(막 2:13-17). 마태는 연회를 준비했습니다. 친구들을 그 자리에 초대하였습니다.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게" 되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불평하며 해명을 요구했습니다. 이것은 정당한 불평입니다. 정통적인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나 '하층 계급'의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지 않습니다. 예수는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 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바리새인들 가운데는 매주 2회씩 금식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금식을 거절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예수께 와서 금식하지 않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나니" 그는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막 2:18-22)" 그리스도의 복음으로서 유대교의 의식을 개혁하려면 옛것과 새것 모두가 파괴되고 말 것입니다. 예수가 새로운 종교를 통해서 실현하려는 의식은 유대교의 낡아빠진 체계와는 융화될 수 없습니다. 이 두 가지를 섞어서 하나 되게 하려는 노력은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둘 다 파멸로 이끌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그들 자신의 습관과 전통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했습니다. 따라서 그를 개혁자라기보다는 반역자로 보았습니다.
다음에는 예루살렘 절기에 참석하신 예수를 보게 됩니다. 그것은 유월절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38년간 병자로 앓던 한 남자를 고쳐 주셨습니다(요 5:11). 그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예수는 그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명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가 안식일의 율법을 범하셨다고 비난했습니다. 예수는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 이러라" 예수에 대한 적개심이 잠재해 있었으나 이 사건은 그에 대한 노골적인 적개심을 소개해주는 첫 번 기록이 됩니다. 소극적인 불만이 터져서 노골적인 박해를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가 안식일을 범했다는 비난을 구체화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가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신다"는 정죄는 옳았습니다. 예수는 1) 사업의 통일성 2) 생명을 주심에 있어서의 통일성 3) 영광을 받으심에 있어서 자기와 하나님과의 동등성을 확인하셨습니다. 그는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받으실 그의 권리를 더 한층 강조하셨습니다. 다음에 그는 1) 아버지의 증언 2)) 요한의 증언 3) 그 자신의 사업 4) 구약성경에 관해서 말씀하시고 원수들에게 구약의 예언을 직접적으로 적용시키셨습니다.
다음에는 안식일에 밀 이삭을 딴 일로 제기된 바리새인들과 예수의 마찰을 보게 됩니다(마 12:1-8), (막 2:23-28), (눅 6:1-5). 유월절 후에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돌아오시던 길이었습니다. 제자들이 밀 이삭을 따서 부벼 먹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먹는 것은 잘못이 없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도 허용되었습니다(신 23:25). 바리새인들의 비난은 안식일에 그렇게 하는 것이 불법이라는 것입니다. 곡식을 따서 손으로 비비는 행위를 노동으로 해석했습니다. 이것은 안식일에 관한 율법에 저촉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새 율법을 주실 분에 대한 정죄의 근거를 찾고 있음이 쉽사리 이해됩니다.
예수는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제자들의 행위를 변호하셨습니다.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 반문 속에 담겨진 역습을 외면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읽은 것이 있다면 구약성경일 것이고 그 가운데서도 다윗에 관한 기록을 읽지 아니했을 리가 없습니다. 아브라함, 모세, 다윗은 그들이 섬기는 세 사람의 지도자였습니다. 이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을 인용하더라도 그들은 말문이 닫힐 것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먹을 수 없는 떡을 먹어치운 다윗의 일화를 실례로 들으셨습니다. "또 안식일에 제사장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제사장들에게 있어서 안식일은 한 주일 가운데서 가장 바쁜 날입니다. 그날에 성전 예배는 많은 일을 필요로 합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을 지키는 율법에 명백한 예외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는 제자들이 굶주리고 있을 때 이삭을 따먹는 것도 이러한 예외가 된다는 것입니다. 다음에 예수는 예언자들의 기록을 인용하셨습니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그것은 분명히 낮은 율법에 대응하는 고차적인 자비의 율법입니다. 다시 논증을 전개하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은 사람의 선행과 편의를 위한 것입니다. 사람의 나태와 안일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예수는 안식일에 대한 자신의 위치를 확증하신 후에 말씀을 끝내셨습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율법을 자의로 해석 및 적용하시는 절대적 권리의 확인입니다.
안식일 논쟁에서 패배한 바리새인들은 다시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한편 손 마른 자를 성전에 데리고 왔습니다(마 12:9-14), (막 3:1-6), (눅 6:6-11). 바리새인들과의 충돌이 있은 지 얼마만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기껏해야 몇 주일을 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는 안식일에 병 고치는 문제를 가지고 도전해온 비평가들과 즉각적으로 만나셨습니다. 먼저 한편 손 마른 자를 향해서 "손을 내밀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의 관심을 불러일으키신 후에 예수는 안식일에 병 고치신 이유를 밝히셨습니다. 자기의 행위를 변론하시면서 그는 비평가들의 간계를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서는 이 불행한 사람에게 손을 내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저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그 결과 저희는 분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처치할 것인가를 서로 의논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미워하게 된 원인은 시기심에 있습니다. 그가 안식일의 율법을 범하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들이 헤롯당과 의논한 사실을 보아서 증명이 됩니다. 논쟁에서 질 때 폭력에 의뢰하려는 것이 인간의 성향인 듯싶습니다.
다음에는 갈릴리의 가버나움에서 바리새인들과 논쟁하고 계신 예수를 보게 됩니다(마 12:22-37), (막 3:20-30), (눅 11:14-26). 그가 어떤 집에 들어가셨을 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서 식사하실 겨를도 없었습니다.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은 그의 영적 세계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군대와의 충돌을 두려워 한 나머지 그들은 예수를 이러한 위험에서 건져 내려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노력은 계산 착오였습니다. "그 때에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벙어리가 말하여 보게 된지라" "이 때에 바리새인들이 듣고 가로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가 귀신을 쫓아내신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행위를 귀신의 능력과 결부시켰습니다. "이와 같은 이적이 하나님의 능력이나 혹은 그들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 이라고 일컫는바 사탄의 능력에 의하지 않고는 결코 행해질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예수는 확고부동한 논증을 통해서 사탄이 자기의 사업을 파괴할 수 없음을 보여주셨습니다. 귀신과 결탁했다고 믿는 예수를 정죄함에 있어서 우선 그들은 예수를 반대하기 전에 그에게 내재하고 있는 귀신을 정죄했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타당합니다. 그들은 간악하게도 성령의 역사를 바알세불의 능력에 결부시켰습니다. 그들도 시인한 바와 같이 귀신을 쫓아낸 일은 전혀 잘못이 없습니다. 그들이 정죄한 오직 하나의 이유는 그가 귀신의 힘을 빌려서 그러한 이적을 베푸셨다는 점에 기인합니다. 그 허위를 그들 스스로가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그들은 성령을 모독하였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악의에 가득 차서 예수를 그릇되게 설명했을 때 그는 이렇게 질책하셨습니다.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실과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실과로 나무를 아느니라" 그 말씀의 뜻은 분명합니다. 그의 행위를 악한 것으로 배척하든지 아니면 예수의 정당성을 인정했어야 할 것입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 찬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예수는 나사렛에 있는 그의 집을 방문하셨습니다. 세례 받으신 후 첫 번째인지 두 번째인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누가는(눅 4:20-30) 공적 활동을 시작하신 직후인 것처럼 말하나 사건의 형편으로 봐서는 훨씬 더 많은 시간이 지나간 듯합니다. 예수는 이미 회당에서 가르치셨고 그의 명성은 유대 전역에 떨쳐졌습니다. 이미 여러 가지의 이적을 베푸셨습니다. 여기서 누가가 이야기한 나사렛 방문은 마태(마13:54-58)와 마가(막6:1-6)의 기록과 동일합니다.
규례대로 예수는 안식일에 회당으로 가셨습니다. 그의 명성을 듣고 있었던 회당장은 이사야의 예언서를 넘겨주었습니다. 그는 일어나서 그 예언서의 일부를 낭독하고 그 목적과 성취할 자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강론은 장려했으나 백성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는 것은 참으로 옳습니다. 시기심 때문에 탁월한 인간은 그가 자라난 고향에서 존경 받기 어려운 일입니다.
예수의 고차적인 말씀은 회당장의 증오심에 불을 질렀습니다. "그들은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하니라" 어떻게 피신하셨는지는 아무런 설명이 없습니다. 단지 "예수께서 저희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는 것뿐입니다. 분명히 그가 피하신 것은 이적적인 방법 이었을 것입니다. 아직은 그의 때가 이르지 아니한 까닭입니다.
다음에는 바리새인의 한 가정에서 그들과 논쟁하시는 예수를 봅니다(눅 11:37-52). 예수는 바리새인으로부터 아침 식사에 초대 받으셨습니다. 그가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잡수려고 했을 때 주인은 화가 났습니다.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이 그들의 손을 씻지 않고는 장로들의 유전(습관)을 따라서 음식을 먹지 않기 때문이라" 그렇다면 그들이 귀중하게 지키는 관습 가운데 하나를 깨뜨린 것입니다. 따라서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가 바리새인들의(그 자리에는 다른 바리새인들도 함께 있었음) 파렴치한 행위를 견책 하시기에 좋은 기회였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외적인 형식을 지키려고 조심한 나머지 그 정신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에게 전해진 형식과 관습은 엄격하게 지키면서도 그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는 망각해버린 것입니다. 자기의 인격까지도 모욕당한 것이라고 생각한 어떤 율법사가 예수의 말씀을 중단시켰을 때 그는 바리새인과 함께 그 율법사를 통렬하게 꾸짖으셨습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쐐기풀이 되었습니다. 예수의 말씀을 왜곡하여 정죄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은 아무 결실을 얻지 못했습니다.
손 씻지 않고 식사하신 일로 예수가 바리새인들과 두 번째로 다투신 사건은 유월절이 지난 얼마 후에 일어났습니다(마 15:1-20), (막 7:1-23). 첫 번 도전에서 실패하자 두 번째의 기회를 노린 듯 합니다. 아니면 전자가 실패한 것을 자기들은 반드시 성공하게 되리라고 믿었는지도 모릅니다. 이번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그를 미행하려고 유대에서 갈릴리로 갔습니다. 예수를 정죄할 근거를 찾으려는 사실은 의심할 나위 없습니다. 그들의 계획이 좌절되자 예수가 이미 해명하신 적이 있는 옛 문제를 끄집어냈습니다.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습과)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먹기 전에 손 씻는 것은 나쁘지 않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하나의 엄격한 종교적 관습으로 설정하였지만 하나님이 명령하신 계명은 무관심했습니다. 이 사실은 예수로 하여금 또 한 번 그들의 위선을 책망하시게 했습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그리고 덧붙이셨습니다.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 도다 하였느니라" 다음에 예수는 그들이 부모를 핑계로 하나님의 계명을 말살해버린 실례를 열거하셨습니다. 이 구체적인 실례로서 유대교 전통의 모든 체계를 공격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예수에게 가해지는 살해의 음모를 피하시는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예수는 다시 예루살렘에 가셨습니다. 이 때는 장막절에 참가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형제들의 권고대로 드러내어 올라가지 않고 가만히 가셨습니다.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 유대교 지도자들과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그는 자기를 죽이려는 그들의 음모를 드러내셨으나 이를 극구 부인하고 오히려 귀신들린 자로 몰았습니다. 산헤드린에서 그를 체포하기 위해 하속들을 보낸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습니다. 하속들은 예수의 말씀에 놀라서 그를 잡지 못한 채로 돌아왔습니다.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나이다(요 7:46)" 예수와 무리들 사이의 열 띤 논쟁은 돌을 던지기까지 악화되었습니다. 이번에도 그는 무리들을 교묘하게 피하셨습니다.
우리들이 생각하는 연대기 추산이 옳다면 예수는 다시 그의 원수들을 만나서 귀신들린 자로 비난을 받으셨을 것입니다(요 9-10). 이전에도 그러했던 것처럼 무리들 가운데서 분파가 생겼습니다. 어떤 자는 "귀신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고 반문했습니다. 그들의 경험은 여기에 부정적인 대답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예수는 유대를 떠나실 필요를 느꼈습니다. 이 때에 그는 요단강 건너편으로 가셨습니다.
나사로가 아프다는 소식을 받았습니다. 이틀 후에 "유대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이 제의는 그의 제자들로 하여금 불쾌한 추억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예수에게 돌을 던지려고 했던 유대인들의 시도를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예수가 유대로 가시려는 결의가 분명한 것을 보고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했습니다. 예수가 베다니로 돌아와서 나사로를 살리셨을 때 더 많은 유대인들이 그를 믿었습니다. 사람들은 각 곳에 이 놀라운 사실을 전했습니다. 산헤드린은 회의를 소집하고 그의 사건을 논의했습니다. 그가 베푸신 여러 가지 이적을 시인했습니다. (마태복음 12:38)에 보면 일찍이 그는 표적을 보여주도록 요구받으신 적이 있었습니다. 이제 그는 수없이 많은 표적을 나타내셨습니다. 지도자들은 이렇게 시인했습니다. "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어리석게도 그를 죽여 버리면 사람들이 믿지 못하게 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모든 사람이 그를 믿으면 자기의 나라가 멸망할 줄로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일을 예방함으로서 나라를 보존할 수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죽이기로 결정했습니다. 이것은 정의의 법이 아니라 그들의 이해관계에서 온 것입니다. "이 날부터 저희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요 11:53)"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유대인 가운데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시고" 주후 30년 그가 나타나서 그의 권위를 담대하게 주장하셨던 유월절이 오기까지는 떠나 계셨습니다. 그는 자기를 왕으로 삼으려고 하는 무수한 군중들이 따르는 가운데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그 때의 광경은 너무나 장엄해서 바리새인들은 이렇게 탄식하였습니다.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없다 보라 온 세상이 저를 좇는 도다(요 12:19)" 이제 산헤드린은 예수에게 패배당한 것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오해하였습니다. 그를 왕으로 삼으려고 한 무리들도 그를 오해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후 많은 사람들이 역시 그를 오해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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