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디    ID저장
비밀번호     








  
   
  교훈과 실천
  연구과 (산상설교) - 13 과
똑같은 배경을 가지고 자라난 두 사람이 똑같은 문제에 직면했을 때 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반면에 또 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심각한 문젯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전자는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영적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요, 후자는 그러한 도전을 감당해 낼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두 청년이 집을 떠나서 대학에 갑니다. 그들은 모두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의 가정에서 자라났습니다. 주일 아침마다 성경 반에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한사람은 그의 대학시절에 좋은 성적을 따고 "교회의 충실한 신자"였던 반면에 또 한사람은 신앙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그의 부모를 고통스럽게 했습니다. 이렇게 된 까닭이 무엇일까요?

◑ 태도의 중요성
산상설교를 자세히 연구해 보면 무엇보다도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올바른 마음의 태도를 주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법률을 제정하거나 도덕적 규범을 만드신 대신에 예수는 올바른 내적성품의 발육을 강조하셨습니다. 아마도 이것이 예수의 교훈과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의 교훈과의 차이점일 것입니다. 예수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행복의 비결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기독교는 기억해야 할 사실의 총체이거나 암송되어야 할 신조이거나 혹은 우리가 동의해야 할 도덕적 규범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야 하는 삶이요, 우리가 발육시켜야 하는 태도입니다. 심판 날에 예수는 우리에게 비유들의 종목이나, 이스라엘의 사사들이나, 아담에서 노아에 이르기까지 족보나, 혹은 12사도의 이름을 외워 보라고 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는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자기의 관계가 어떠했는지를 물으실 것입니다.

우수한 학생은 대부분 학기말 시험을 위해서 조심스럽게 준비를 합니다. 그는 교실에서 받은 자료만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치러야 할 시험을 위해서 여러 가지 준비하게 될 것입니다. 어느 특별한 문제의 해답만 공부했던 학생은 만일 강사가 일반적인 문제를 내게 될 경우에는 그 시험에 실패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마지막 시험의 성격을 알려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5:35-36에서 주님은 이렇게 그의 기대를 암시하셨습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 25:35-36)

심판 때에는 하나님께 대한 올바른 태도를 요구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곧 다른 사람에 대한 올바른 태도로 표현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자선행위가 구원의 조건이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명백한 어조로 이와 같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2:5)

모든 사람에게 주어질 마지막 시험을 위해서 종교교육자는 모든 사람이 거기에 준비를 갖추도록 권면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교육은 오늘날까지 암기위주의 과목에 치중해 온 폐단이 없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사실을 기록한 역사서로 취급되고 결과적으로는 성경을 배운 사람들이 수많은 성구를 외우기는 하면서도 예수와 사도들이 강조하신 중요한 마음의 태도를 발육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구약성서가 이점에서는 더 많은 피해를 입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역사서로만 취급을 당합니다. 성경반의 학생들은 이집트의 재앙에 관한 역사적 사실이나 여호수아의 팔레스틴 침입이나, 왕국의 분열 및 그에 따르는 모든 생활에 관한 사실 따위를 배웁니다. 그들은 사자굴 속에 던져진 다니엘과 세 사람의 히브리인에 관한 사실만 배울 뿐이요, 다니엘과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경우와 같이 악의 세력에 저항할 수 있는 마음의 태도를 발육시키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교육을 받고 자라난 청년들이 대학에 가면 신앙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은 역사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서 이상입니다. 독일 사람들은 구약성경을 "거룩한 역사" 혹은 "구원의 역사"라고 부릅니다. 만일 우리가 구약성경이 설화 형식으로 기록된 인간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구속적 행위를 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성경의 요점을 놓쳐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구약시대에 일어났던 여러 가지의 전쟁을 연구하는 것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 말은 '사실'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관한 지식은 모두가 설화의 형식으로 기록된 역사적 및 문화적 사실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들은 다른 공부를 위한 자료로 쓰일 때에만 가치가 있습니다. 사실을 가르치는 교육은 우리의 생활에 변화를 가져다주는 일에 도움이 될 때에만 가치가 있습니다.

◑ 왜 많은 사람들이 타락하는가?
현대의 수많은 청년들이 스스로 타락해 버린 '패배자'로 낙인을 찍어버리는 데에 하나의 비극이 있습니다. 일반대학교 재학생의 50%에 해당하는 학생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현대의 청년들이 직면하고 있는 시험이 다니엘과 디모데와 및 그밖에 수많은 신앙의 용사들이 걸었던 시험보다 더 어려운 것일까요? 그게 아니면 "신앙을 잃어버린 " 젊은 세대가 사실은 애초부터 어떠한 신앙도 갖지 않았던 것일까요? 그들은 아마 한 번도 진리에 주의해 본적이 없었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중에 어떤 사람들은 유년기부터 위험하고 건전치 못한 성격을 형성해 왔을 법도 합니다. 이것을 그들의 교사는 눈치 채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이라 가정하고 이 가운데 몇 가지 경우를 파헤쳐 봅시다.

어떤 사람은 "내가 의심을 가졌다는 것은 신앙을 잃어버린 증거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잘못된 판단입니다. 수많은 기독청년들은 의심이 곧 죄가 되는 것이라고 가르침을 받아 왔습니다. 사실인즉 의심이 안 일어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신앙을 마땅히 분석하고 비판해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아마 그 학생이 만족할 수 있는 해답을 못 찾게 될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인간이 겪어야 하는 고통의 문제 같은 것이 있습니다. 교사는 그 학생의 입을 틀어막기 위해서 아무렇게나 대답을 해버릴 것이 아니라 실상 그것은 참으로 복잡하고 곤란한 문제임을 솔직하게 시인하고 과거의 수많은 사람들이 그 문제로 인해서 고민해 왔음을 지적해 주는 것이 더 현명할 것입니다. 슬기로운 교사는 하나의 문제를 놓고 여러 가지의 다양한 해답을 찾기 위해서 토의할 뿐 아니라 비록 해답을 찾지 못하는 경우라도 학생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완전히 신뢰케 권면 할 것입니다. 말로는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바라보지는 않고 자기를 담고 있는 우주를 쳐다보게 되면 지옥문이 그를 떨게 할 것입니다. 욥은 그가 당했던 고통의 문제로 인해서 고민하고 그 문제의 해답을 찾으려고 애를 썼으나 그것도 실패해 버렸지만 그는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에 사탄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이렇게 고백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막 9:24)

학생들은 가끔 해답이 곤란한 문제를 제기했다는 이유 때문에 책망을 듣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사들은 교과서의 내용과 상관이 없는 질문을 받게 되면 당황해 버린 나머지 "그건 여기서 논의할 필요가 없어"라고 해버립니다.

비판능력을 소유하지 못한 학생은 대학에 가서 대단히 곤란을 겪을 것입니다. 학문의 넓은 분야가 그의 앞에 펼쳐질 때 그는 자기의 신앙과 모순 되는 사물이 그 가운데 수없이 많이 있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거기에는 자기에게 만족한 해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는 지적 비판의 훈련을 받은 일이 없기 때문에 자기에게 도전해 오는 상황을 자유롭게 처리해 낼 수가 없게 됩니다. 자기의 신앙을 고수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상황의 소용돌이 속에 말려 들어가 버리는 것입니다. 이래서 그는 또 하나의 타락한 영혼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교사와 전도자들이 범하기 쉬운 과오의 또 한 가지는 "반대하는 것은 무지와 우둔한 소치"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러한 생각을 학생들에게 주입시킵니다. 하나님의 존재나 혹은 예배시간에 사용하는 악기의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젊은 청년들은 여기에 정당한 비판과 의견을 발표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우둔하거나 무지한 사람으로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많은 전도자들은 강단에서 공공연하게 역사학, 심리학, 철학, 사회학, 신학 및 그밖에 "…주의", "…론", "…학", 따위를 정리합니다. 그들은 청년들이 이러한 세속적 학문에 탐닉하면 신앙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을 고수하는 유일의 방법은 이러한 인간적 학문이나 이론에서 멀리 떠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모든 불신자들이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까닭은 단지 그들의 무지 때문이라고 가르친다는 것은 엄청난 잘못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청년들 앞에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모두가 바보라고 가르친다면 이것은 커다란 잘못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고등교육을 받고 지적으로 우수한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 중에도 불신자가 많이 있다는 사실을 솔직히 시인해야 할 것입니다. 신약성서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히 11:6)고 분명히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까?

청소년들이 어려서부터 잘못된 방식의 교육을 받게 되면 장차 그들에게 주어질 지적 도전을 극복해 낼 수 있는 능력을 갖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청년은 훌륭한 무신론적 교수를 만나게 되면 과거에 그들이 배운 지식은 모두 거짓말이었다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그는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신앙을 갖지 않은 교수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에 직면하게 될 때 그 청년은 정말 무식한 것은 바로 주일학교의 교사와 전도자들이었다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학구열이 강한 청년은 비록 무신론주의자이긴 하나 학문적으로 저명한 업적을 남긴 교수에 의해서 깊은 감명을 받을 것이고 이전에 자기를 가르쳐 준 교사와 전도자들을 의식적으로 싫어하게 될 것입니다. 그는 이러한 시험에 대처할 수 있는 훈련을 어려서부터 받지 못한 까닭에 드디어 교회를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또 하나의 "타락한 영혼"이 생겨나기 마련입니다.

예수는 결코 사탄의 세력을 과소평가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시험을 맞이하기 위해서 40일간이나 광야에서 금식을 하셨습니다. 청년들은 자기에게 주어질 여러 가지의 시험을 올바른 종교교육에 의해서 대처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시험도 견디어 낼 수 있는 내적 마음의 태도를 길러주는 훈련이 포함되어야 할 것입니다.

청년들은 가난한 마음과 의를 사모하는 마음과 다른 사람에 대해 부성애를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사실인지를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그들은 생명이 옷이나 음식보다 더 귀중하다는 사실과 무엇보다도 그들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했을 때에도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도록 가르침을 받아야겠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풍성한 삶이오, 또한 주님만이 행복의 비결을 갖고 계시다는 사실을 확신해야 되겠습니다.
페이지 설정에서 여백 크기 조절 후 인쇄하세요.
   

BCC 소개 | 뉴스레터 | 찾아오시는 길 | 개인정보 보호정책 | TOP ▲
BCC | 서울시 강서구 방화1동 180-14 7F | 비영리법인번호:109-82-03052 | Tel (02) 2662-0793, 2662-8081 | Fax (02) 2662-8082
Portions are Copyrighted 1964-2026 BCC. Contact us for more inform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