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장에서 예수가 예루살렘에 승리의 입성을 하시던 날까지의 그를 향한 배척과 음모의 경과를 살펴보았습니다. 산헤드린은 거의 두 달 전부터 그를 죽이기로 결정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승리의 입성을 하셨을 때 지도자들은 "온 세상이 그를 좇는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들의 계획이 완전히 좌절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월요일과 화요일에 일어난 사건은 언급을 생략합니다. 앞장에서 대부분의 사건이 논의되었기 때문입니다. 수요일은 베다니에서 쉬셨습니다. 목요일 저녁은 유월절 만찬을 잡수시러 예루살렘에 가셨습니다.
만찬 후에 예수는 제자들을 데리고 기드론 시내를 건너서 겟세마네 언덕으로 가셨습니다. 그의 계획을 미리 아는 유다는 그를 체포할 병정들을 동산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밖으로 나갔습니다. 이곳은 평소에 예수가 쉬시던 곳입니다. 유다가 단순한 원한 때문에 스승을 배신했다고 믿기는 어렵습니다. 그가 후에 참회한 사실은 어떤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유대교의 지도자들이 예수를 넘겨주려는 유다와 음모했을 때 모세 율법의 축어적인 조항은 범하지 않았을지 모르나 그 말씀의 정신은 망각한 것입니다. "너는 네 백성 중으로 돌아다니며 사람을 논단하지 말며 네 이웃을 대적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게 하지 말라…….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레 19:16-18)" 유다는 이 율법의 각 조항을 범했습니다. (1) 그는 '논단자'가 되었습니다. (2) 그는 자기 이웃을 대적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게 했습니다. ((3)) 예수에 대한 그의 사랑은 증오로 변하였습니다. (유대교의 지도자들도 이 점에 있어서 이 율법을 범한 것이 명백합니다) (4) 그는 철저하게 복수했습니다. (5)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은 하나님이 주신 모든 율법의 두 가지 대 강령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강령에 대한 노골적인 범법 행위는 하나님의 모든 율법적 기초를 뒤흔들어 놓은 것입니다. 마땅히 율법을 준수해야 할 산헤드린 공회는 유다의 음모를 용서할 뿐 아니라 그 대가로 돈을 주기까지 했습니다(막 14:10-11). 율법의 집행자는 곧 유다와의 공범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밤에는 어떠한 재판 행위나 절차도 집행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예수를 체포한 행위는 불법입니다. 그를 체포한 병정들은 밤중에 횃불을 들고 온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히 깊은 밤중이었을 것입니다.
안나스에 의한 단독 심문은 적어도 다음의 두 가지 이유로서 불법이 됩니다. 먼저 그가 심문한 것은 밤이었습니다. 둘째 이 자리에는 한 사람의 법정 배심원도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미쉬나에 의하면 히브리의 법은 이러한 단독 심문을 허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금지법에는 이런 문구가 있습니다. "단독 재판은 있을 수 없다. 오로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단독 심판자가 없기 때문이다" 또 다른 곳에 보면 이런 문구가 있습니다. "피고는 결코 단독 심문을 받을 수가 없다. 그가 자신에 대하여 불리한 진술을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산헤드린에서 예수가 첫 번 심문을 받으신 것은 밤이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첫 번 회의를 갖고 공적으로 그를 정죄한 후 이러한 결정에 합법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다음날 아침에 두 번째로 회의를 소집한 사실로도 분명합니다. 두 번째 회의에 관해서 누가는 말합니다. "날이 새매 백성의 장로들 곧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모이어 예수를 그 공회로 끌어들여...(눅 22:66)" 다시 그는 재판절차에 관하여 언급합니다. 이것은 마태와 마가에 의해서 기록된 지난번 심문의 경우와 비슷합니다. 누가는 첫 번 심문의 상황을 보고하지 않는 반면에 마태와 마가는 두 번째의 심문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마태는 두 번째의 심문에 대하여 단지 소개만 합니다.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마 27:1)" 마가는 또 이렇게 기록합니다. "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로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하여 끌 고가서 빌라도에게 넘겨주니(막 15:1)" 전날 '첫 번' 심문이 있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미쉬나에 의하면 이것은 히브리법에 대한 중대한 범법 행위라고 합니다. 경범자 재판과 중범자 재판의 차이점을 논의하면서 미쉬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전자(경범자 재판)는 낮에만 시작할 수가 있다. 그러나 밤중에 끝날 수도 있다. 반면에 후자(중범자 재판)는 낮에 시작해서 반드시 해가 지기 전에 종결을 지어야 한다. 전자는 유죄와 무죄를 가리지 않고 재판이 시작된 그 날에 끝내어도 무방하다. 그러나 후자는 무죄일 경우에만 그날 종결지을 수가 있고 유죄일 경우는 재판이 그 다음날까지 연기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중범자의 재판은 안식일이나 혹은 절기가 있는 전날에 열지를 않는다"
다음날 아침에 가졌던 두 번째의 심문은 아침 제사가 시작되기 전에 열린 것이 거의 분명합니다. 이것은 엄격한 의미에서 볼 때 불법일 수는 없으나 확실히 전례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탈무드에 의하면 "산헤드린은 아침 제사 때부터 저녁 제사 때까지 착석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대체로 아침 제사가 시작되기 전에는 법정을 열 수 없다는 뜻으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또 하나의 범법이 있습니다. 사형이 선고되는 재판을 하루 만에 끝낼 수 없습니다. 챤드러는 다음과 같이 약술합니다. "히브리법에 의하면 한 피고인이 유죄로 판결되어 그에게 사형을 선고할 경우, 이 사건을 정당하게 심사하기 위하여 적어도 이틀간의 여유를 갖도록 했다. 무죄로 판결이 되었을 때는 하루 만에 재판을 끝낼 수 있었다. 유죄를 선고하기 위해서는 하룻밤이 경과하여야 했다. 그 시간에 재판관들은 자고, 명상하고, 기도하기 위해서이다. 첫 날의 심문이 끝나면 그들은 법정을 떠나 그 날의 사건을 담론하면서 손에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갔다. 해가 기울 때 그들은 서로의 가정을 방문해서 다시 한번 그 날의 사건을 심리한다. 그러고 나서 각자 집으로 돌아가서 더 신중하게 명상을 한다. 그 동안에 그들은 과음과 과식을 삼간다. 그들의 명석한 사고를 방해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피했다. 다음날 그들은 법정에 돌아와서 그 사건을 다시 심문한다. 두 번째 날의 심리 목적은 그 전날 심문하는 가운데 무슨 과오를 범하지 않았을까 하고 재검토해 보려는 것이다. 마지막 선고가 내려지는 것은 이날 오후가 되기 전이었다"
복음서 기록에 의하면 예수가 잡히신 후 12시간이 경과하기도 전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의 하루는 저녁에 시작해서 저녁에 끝났으므로 이 모든 일들이 단 하루 사이에 일어난 것도 확실합니다.
예수는 금요일에 잡혀서 정죄를 받으셨습니다. 이 날은 유월절 첫 날이요 안식일 전날이기도 합니다. 미쉬나에 의하면 이것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는 "안식일 저녁이나 혹은 어떠한 절기에 해당하는 날에는 재판을 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예수의 순교'란 책자에서 랍비인 와이스는 이스라엘의 어떠한 법정에서도 안식일이나 혹은 성서적 절기 동안에는 재판을 할 수 없다. 중범죄 자를 심문할 경우 금요일이나 혹은 성서적 휴일 전날에는 재판을 시작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건들을 하룻밤 이상을 더 연기하거나 혹은 안식일이나 성서적 휴일에 재판을 계속하는 것은 불법이기 때문이다"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개 이상의 위법 사항을 더 발견하게 됩니다. 먼저 예수는 안식일 전야에 심문을 받고 정죄를 받았습니다. 둘째로, 그는 성경적 휴일에 심문을 받고 정죄 받으셨습니다. 유월절의 첫날이 아닌 그 전날이었다고 주장하는 자들의 변명을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그 행위가 범법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중범죄자의 심문은 성서적 휴일 전야에 시작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다. 산헤드린은 왜 그렇게 조급히 서둘렀을까요? 그 해답은 이러합니다. 즉 기회가 왔을 때 예수를 죽여 버리는 것이 유익했기 때문입니다. 그를 체포하기 불과 닷새 전에 바리새인들은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 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저를 좇는 도다" "그들은 백성들을 두려워했다"고 한 누가의 말은 조금도 놀라울 것이 없습니다. 마가는 우리들에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궤계로 잡아 죽일 방책을 구하며 가로되 민요가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말자 하더라(막 14:1-2)"고 한 사실을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예기치 아니한 때에 유다가 와서 그의 스승을 잡아 주겠다는 약속을 합니다.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막 14:10-11). 중요한 절기가 방금 시작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각처에서 이 도시로 몰려왔습니다. 예수를 정당하게 심문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너무도 많은 친구와 추종자를 거느렸고 또 그 자신은 아무런 결함도 없었습니다. 며칠 전만 하여도 그는 자기들의 모의에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그를 함정에 잡아넣으려고 했을 때 예수는 그들의 계획을 모두 좌절시켜 버렸습니다. 이 제와서 그에게 공정한 재판을 베풀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가능하다면 한시라도 빨리 그를 죽여 없애려는 것이 그들의 의도였습니다. 공정한 재판을 통해서 그를 죽인 것처럼 보일 수만 있다면 썩 좋은 일이겠으나 그렇지 못할 경우에 그들은 수단을 가리지 아니하고 그들의 목적을 성취하였을 것입니다.
이제 이 심문의 진행이 어떠했나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요한은 안나스와 가야바를 대제사장이라고 부릅니다(요 18:19-24). 누가도 그렇게 부릅니다(눅 3:2). 단독 심문에서 안나스는 예수에게 그의 교훈과 제자들에 관한 질문을 했습니다. 이에 예수가 대답하시기를 "내가 드러내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의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치고 은밀히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보라" 그는 대답을 거부하심으로써 정정당당하게 그의 권리를 행사하셨습니다. 이것은 모든 백성에게 주어진 권리입니다. 그는 다만 자신에 대한 증언을 거부하신 것뿐입니다. 대제사장은 그에게 질문을 요구할 법적인 혹은 도덕적인 권리가 없습니다. 곁에 서 있는 하속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치면서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고 반문했습니다. 침착하게 위엄 서린 어조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거하라 잘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요 18:1-24)" 예수는 잡히셨으나 아직 심문을 받지는 아니하셨습니다. 한 인간의 죄목이 인정되기 전에 그에게 형벌을 가한다는 것은 율법의 침해입니다. 그가 율법을 모독하였다면 공회에도 그것을 밝히기 위해 충분한 기회가 주어질 것입니다. 언제나 하속들은 경거망동했습니다. 불성실한 안나스는 하속들을 한 번도 꾸짖는 일이 없었습니다.
다음에 예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모여 있는 가야바의 관청으로 끌려 가셨습니다. 하속들이 예수를 잡으러 간 사이에 가야바는 공회원들을 소집하느라고 분주했습니다. 법정 성원의 수는 적어도 23명이 되어야 합니다. 니고데모나 아리마데 요셉이 참석했으리라고는 믿기지 않습니다. 가말리엘이나 그 밖에 이와 같은 종류의 사람들은 참석하지 않았을 것으로 봅니다. 거기에 참석한 회원들이란 안나스와 가야바가 쉽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자들이었을 것입니다. 공회의 몇몇 회원들은 안나스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이 가운데 어떤 자들은 그 소행이 몹시 천박했었습니다.
사건을 심리할 때 산헤드린 회원은 대제사장을 가운데 앉히고 반원형으로 둥글게 모여 앉습니다. 서기관은 재판의 진행을 기록하기 위해서 양쪽 끝에 앉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은 그 모든 심리와 피고인의 편을 들어서 투표한 내용을 기록하는 반면 또 한 사람은 유죄 판결을 주장하는 진행 상황을 기록합니다. 중대한 범죄 심문이 있을 경우에는 사건의 전모를 기록하고 다른 두 사람의 서기관을 감독하는 제 삼의 서기관이 그 자리에 참석합니다. 사형을 선고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사람의 증인이 필요합니다. 모세의 율법은 "두 세 사람의 증인이 있을 때에만 사형을 선고할 것이요 증인이 한 사람일 때는 사형을 선고할 수 없느니라(신 19:15)"
증언은 세부적인 조건에 이르기까지 모두 일치되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부결되고 맙니다. 피고인은 자기에게 불리한 진술을 거부할 권리가 있습니다. 자의에 의해서 자기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였더라도 배심원들이 그 증언의 내용에 잘못이 없다는 증거를 얻기까지는 이것이 효력을 발생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를 심문하는 공회는 그에게 불리한 허위 진술을 모색했습니다. 그들은 목적을 성취할 수 없었습니다. 여러 가지의 거짓 증거가 있었으나 모두 모순이었습니다.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마 26:61)"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에 지으리라 하더라(막 14:58)" 이것은 "오히려 그 증거도 서로 합하지 않더라"고 한 것을 보아서 증명이 됩니다.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주어진 불리한 증언에 대하여 답변을 요구했을 때 "입을 다물고 아무 대답도 안 하신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는 자기모순을 범하고 있는 증언들이 자기를 정죄할 수 없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물론 이 가운데 어느 증언도 옳은 것이 아닙니다. 그가 실제로 말씀하신 것은 이러합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 그는 헤롯의 성전을 언급하신 것이 아니라 요한이 설명해 주는 바와 같이 "그의 몸의 성전"을 가리키신 것입니다.
공회는 그를 정죄할만한 근거를 찾지 못했습니다. 무척 당황하게 되었습니다. 대제사장은 예수에게 직접 간청하기를 "내가 너로 살아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마 26:63)"고 했습니다. 이것은 히브리의 형법에 대한 위반 행위입니다. 대제사장은 예수를 맹세케 할 법적 및 도덕적 권리가 없습니다. 그는 예수로 하여금 자기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도록 요구할 수도 없습니다. 만일 예수가 자의에 따라서 이러한 증언을 했더라도 최소한 두 사람의 증인이 이것을 확인하기 전에는 그를 정죄할 수 없습니다. 또 하나 변명의 여지가 없는 위법 행위는 산헤드린이 스스로 하나의 사건을 기소할 권리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그들이 하는 일은 기소된 사건을 심리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예수는 기소되지 않았는데도 심문을 받기 위해 공회로 끌려 가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정죄할 근거를 찾기 위해서 스스로 기소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예수는 대제사장에게 강제로 대답할 의무가 없습니다. 이것은 누구보다도 예수 자신이 더 잘 아십니다. 그의 심문자에게 이 문제를 정직하게 대답하셨다는 것은 인류를 위해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다는 사실은 참으로 중대한 문제입니다. 그의 당연한 법적 권리의 행사로 대답을 거부하셨더라면 재판은 거기서 끝이 났을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생명을 건진다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문제가 개입되어 있습니다. 불행히도 공회는 그를 정죄할만한 근거를 찾지 못했습니다. 이제 모든 문제는 예수의 답변에 달려 있습니다. 답변 여하에 따라서 그의 생명이 구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가 아닌데도 그리스도라고 주장하셨다면 이것은 죽음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이것은 영원한 죽음입니다. 어떠한 사기꾼도 현재의 삶 이상의 것을 더 바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는 왜 대제사장의 질문에 대답하셨을까요? 두려워서? 결코 그것은 아닙니다. '두려움'이란 단어는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아니면 현세의 상급을 받기 위해서 이었을까요? 아니면 현세의 영예를 바라셨기 때문일까요? 이것도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는 한 번도 세속적인 명예를 추구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대제사장에게 "내가 말하였느니라" 혹은 "내로라"고 대답하셨을까요? 여기에는 오직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의 때가 와서 그것을 세상에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 외에 그들이 저지른 범법 행위를 관찰해 봅시다. 증언이 있은 후에 사건 심리가 있습니다. 언제나 피고인이 먼저 발언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산헤드린에서는 오늘날 우리가 의미하는 바와 같은 변호사는 없었습니다. 법정의 구성원은 변호사와 배심원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가운데 과반수의 동의를 얻어야 피고에게 유죄를 선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법정의 구성원 전부가 피고에게 불리한 진술을 할 때 사건은 무죄로 방면됩니다. 이러한 사건은 법정 구성원의 공모 혹은 결탁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만일 법정의 구성원 전부가 피고인에게 유죄를 인정한다면 그가 공정한 심문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여 곧 무죄 석방이 되었습니다. 예수의 경우는 어떠했습니까? 그가 대제사장에게 대답하셨을 때 대제사장은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그 참람한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뇨 하니 저희가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고(막 14:63-64)" 예수는 자기를 변호하기 위한 말씀을 한 마디도 하시지 않았습니다. 대제사장은 그를 변호해 줄 사람이 발언을 요청할 기회도 주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먼저 판단을 내린 후에 투표로 만장일치의 가결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마땅히 무죄 석방으로 끝나야 할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진리와 공의는 또 한 번 파묻히고 말았습니다.
투표의 방법도 불법이었습니다. 중범죄자의 사건을 취급할 때 율법은 "산헤드린의 젊은 회원들이 원로급에 속하는 회원들의 주장과 견해에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 이 경우에 유무죄의 변론을 위해서 최초로 발언해야 할 사람은 젊은 재판관들이다"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젊은 사람부터 시작하여 그들의 견해를 묻는 것이 전통적인 관례였습니다. 예수의 사건을 취급할 때 이러한 법 절차는 분명히 무시되었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대제사장은 그 자신이 먼저 판단을 해 버리고 그 후에 다른 법관들에게 동의를 요청했습니다. 법에 의하면 그는 마지막까지 자기의 판단을 보류하고 있어야 했습니다.
대제사장이 자기의 옷을 찢었을 때 또 한 번 과오를 범했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 형제 중 관유로 부음을 받고 위임되어 예복을 입은 대제사장은 그 머리를 풀지 말며 그 옷을 찢지 말며(레 21:10)" 옷을 찢는 행위는 분노와 불쾌를 의미했습니다. 감정을 자제할 수 없는 자는 재판관의 자격이 없습니다. 재판관은 언제나 침착한 마음과 평정을 유지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를 정죄한 회원 중에 단 한 사람이라도 예수의 사건을 재판할 자격이 있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히브리 형법은 피고인의 원수나 친구가 그의 사건을 재판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산헤드린은 예수를 체포하기 두 달 전에 그를 사형에 처하기로 결정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가 나사로를 살리신 후에 의원 총회를 열었습니다. "이 날부터 저희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요 11:53)" 이것은 분명히 그들이 재판관으로서의 자격이 없었음을 입증합니다.
심문을 행한 장소까지도 불법이었습니다. 미쉬나에 의하면 "가지스 법정 밖에서는 누구에게도 사형을 선고할 수 없는 것이 유대의 율법"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예수를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갔는데 거기에는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 있었습니다(마 26:57). 사형 선고가 내려진 장소는 바로 여기였습니다.
예수에 대한 기소 내용은 모욕적이었습니다. 만일 법정에서 합법적으로 심리하였었다면 그들의 사형 선고는 이토록 심각한 과오를 범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처음부터 불법적으로 심문을 강행했기 때문에 하나의 과오는 또 다른 하나의 과오를 낳기 마련이었습니다. 그들의 모욕적인 행위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이미 소개한 것만으로도 충분하리라고 봅니다. 그들이 모욕적인 처사를 감행했을 때 예수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얼마든지 증명하실 수 있었으나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아버지가 그에게 맡기신 일을 다 완수하셨습니다. 이제 그의 때가 와서 세상을 떠나시게 된 것입니다. 그는 이 때를 연기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는 잡혀서 공회에 끌려가실 때를 기다리지 않고 원수들을 먼저 만나러 가셨습니다. 그가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나에게서 떠나게 하옵소서" 동산에서 기도하신 것은 죽음을 면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이보다 몇 달 전에 이미 그의 운명에 순응하실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가 구제를 받고자 한 것은 영혼의 고뇌였습니다. 그의 친구들은 모두 그를 두고 떠나버릴 것입니다. 그는 혼자서 '포도즙'을 짜야만 하셨습니다. 그가 기도하신 것은 어둡고 음산한 절망의 시간에 그를 지켜 줄 힘이었습니다. 그 때는 태양이 빛을 잃고 땅은 갈라질 찰나였습니다. 그의 기도는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이 때에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도왔기 때문입니다(눅 22:42-43). 그 시간부터 그는 담대하게 그의 원수들을 만나러 가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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