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헤드린의 두 부자 의원인 니고데모와 아리마데 요셉은 예수의 시체를 십자가에서 내려가지고 무덤에 장사지내기로 했습니다. 예수의 시체는 한 번도 장사된 일이 없는 요셉의 새 무덤 속에 놓여졌습니다. 큰 바위로 된 무덤이었습니다. 시체가 매장된 후에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무덤을 지킬 파수꾼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예수의 추종자들이 그 시체를 훔쳐가서 다시 살아났다고 소문을 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시겠다는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삼엄한 경계에도 불구하고 사흘째 되던 아침에 무덤은 텅 비고 말았습니다. 이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자들은 예수의 부활이 다만 정신적인 것이 아니면 심리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합니다. 그것이 옳다면 없어진 시체에 대하여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도대체 그 시체는 어떻게 된 것입니까? 예수의 원수들이 그 시체를 옮기지 않은 것은 증명할 여지도 없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예수의 시체가 없어지는 것을 막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제 두 가지의 가능성이 남아 있습니다.
첫째는 산헤드린에 그 원인을 돌릴 수 있습니다. 파수꾼들이 일어난 사건을 보고했을 때에 제사장들은 재빨리 공회를 모으고 파수를 섰던 병정에게 많은 돈을 주면서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적질 하여 갔다 하라(마 28:11-14)" 그들은 로마의 집정관에게서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켰기 때문에 이번에도 성공할 것으로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대답은 터무니없습니다. 파수꾼들이 예수의 시체를 지켜야 할 시간에 잠이 들어 시체를 도둑맞았다는 것은 비논리적인 이야기입니다. 사도들이 할 수 있었던 오직 하나의 정당한 답변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란 것입니다(행 2:32). 이 사실은 성경 전체의 중심이 됩니다. 그것을 좀 더 자세하고도 조심스럽게 검토해 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성공적으로 논증되면 그가 메시야란 사실은 충분히 입증됩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기꾼을 다시 살려서 메시야직을 위임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한 사기꾼이 자기의 힘으로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가 죽으신 후에 다시 살아나셨다면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이 분명합니다. 그가 그리스도이시라면 그의 모든 말씀은 참되고 순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의 말씀이 참되고 순수하다면 신.구약 성경은 모두가 진리입니다. 그는 이 두 가지의 성경 가운데서 한 쪽을 보증하시고 또 한 쪽은 진리의 말씀으로 인정하시기 때문입니다.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과 같이 예수도 사흘을 땅 속에 있다가 다시 살아나셨고(마 12:40) 예수는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기록된 사실대로 되셨습니다(눅 24:44). 예수의 부활이 논증되면 동시에 그는 하나님의 아들 되심과 메시야 되심을 증명하는 것이 됩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 되심과 메시야되심를 증명하면 결과적으로 우리는 신구약 성경의 영감설을 증명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들이 영감을 받고 행한 모든 설교의 정점이 곧 예수의 부활이란 사실을 설명해줍니다.
베드로가 전한 첫 번 설교(행 2)에서부터 바울의 마지막 설교(행 26)에 이르기까지 그 역점을 두고 있습니다. 강론의 내용이 어떠하던지 간에 부활 사건은 모든 설교의 초점이 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제거하면 그것은 성경 전체를 말살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부활이 없으면 성경은 전부가 무의미한 신화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서 설화의 신빙성 여부를 여기서 논의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렇게 하자면 또 한 권의 책을 써야할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서의 기록만큼 신빙성이 있는 고대의 문헌이 단 하나도 지금 남아 있지 않다는 것으로 자위를 삼습니다. 이 기록의 신빙성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여러 가지의 방법으로 논증을 일삼지 않는 한 여기서 그 신빙성을 증명하기 위해 고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적어도 그들이 현존하는 다른 고대의 문헌을 반증하기까지는 그들이 이런 일을 한다고 해서 놀랄 필요가 없습니다. 사도들은 자기들의 스승이 원수의 손에 넘어가서 악형을 받고 죽는 것을 보면서 크게 실망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를 모른다고 몇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그 중에 몇 사람은 옛날의 생업을 다시 계속하기 위해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글로바가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눅 24:21)"고 말했을 때 그 당시 모든 사람들이 느꼈던 실의의 감정을 그대로 표현했습니다. 사흘째 되던 날에 예수의 시체에 기름을 붓기 위해서 찾아갔던 여인들이 빈 무덤을 보았을 때 그들은 크게 슬퍼했습니다. 천사로부터 그가 부활하셨다고 하는 기쁜 소식을 듣고 사도들에게 그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돌아가려고 하다가 그를 직접 본 후에도 그들의 이야기는 마치 "쓸데없는 얘기"처럼 들렸습니다. 베도로와 요한이 빈 무덤을 확인하고 또 베드로와 글로바가 부활하신 주님을 육안으로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제자들은 여전히 그들의 이야기를 믿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열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을 때 그들은 처음에 영을 본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가 제자들에게 친히 말씀하시고 또 그 손과 발을 내 보이셨을 때 그들은 비로소 기뻐했습니다. 도마는 이 때 자리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훗날 제자들이 예수를 보았다고 그에게 말했으나 완강하게 그들의 증언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비추어 봐서 증인들은 허위 공모를 했거나 그의 부활을 조작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가 다시 살아나신 것을 보았을 때 제자들만큼 놀랐던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의 소식을 전했을 때 그들의 발언은 성실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증언을 피로써 보증할 만큼 성실했습니다. 선천적으로 사도들은 겁이 많았습니다. 예수가 붙잡히셨을 때 그들은 제각기 도망을 쳤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들은 생명을 내걸고 거짓말을 했겠습니까? 그들의 스승을 죽인 산헤드린에 대하여 감히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그들은 어디서 얻은 것일까요? 그들이 박해를 당하면서도 그의 부활 사건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들이 총독과 왕과 황제 앞에서 예수의 부활을 증거할 수 있었던 힘과 용기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그들이 만일 성실하지 못한 자들이었다면 주님의 부활 사건을 증거하면서 순교자의 단두대로 혹은 로마인의 십자가 형장으로 묵묵히 걸어 나갈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허위 진술을 했다고는 도저히 믿기가 어렵습니다.
사도들은 "우리가 생각건대 그가 다시 살아나신 것 같다"거나 혹은 "그가 살아나신 것을 믿는다"고 하면서 죽어간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가 다시 살아나신 것을 우리는 안다 이는 우리가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 1:1-4)"고 하면서 죽었습니다. 그들은 어떠한 의견이나 신조를 외우면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의 사건 - 적어도 그들의 손과 눈과 귀로 확인한 사건 - 을 증거하면서 죽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그는 다시 사신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시각, 청각, 지각은 모두가 그 기능을 상실한 것이었을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그들의 증거가 거짓이었다면 그들이 예수를 다시 보았다고 주장함으로써 어떠한 세속적인 보상을 얻으리라고 기대했겠습니까? 그들이 어떠한 동기로 인해서 이 부활의 진상을 증거하려고 피를 쏟기까지 했겠습니까? 분명히 그것은 이 세상의 재물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은과 금이 내게 없다(행 3:6)"고 했을 때 모든 사람들의 궁핍한 상태를 이야기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궁핍이 언제나 그들의 생활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그들을 잡아 죽이기 위해서 도시마다 샅샅이 뒤졌습니다. 무슨 명예를 얻으려고 그들이 이러한 이야기를 조작했겠습니까? 부활 사건은 기독교의 진수입니다. 이것은 유대교나 이방 종교와는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이것은 유대교가 그리스도의 종교로 인해서 소멸된 사실을 선포합니다. 그것은 모든 형태의 이교적 예배 의식을 하나의 거짓되고 범죄적인 행위로 규정 지어버립니다. 거기에는 조그마한 관용도 없습니다.
아덴의 학식 많은 희랍인들도 에티오피아의 환관이 받은 것과 동일한 복음을 받았습니다.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의 순교자들이 증언한 내용을 받아들인 세상의 왕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3세기 동안이나 기독교는 핍박을 당해 왔습니다. 바울은 여기에 대하여 적절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전 15:19)" 증인들은 그들의 스승에 대하여 편견을 갖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가끔 있습니다. 즉 그들은 열광적인 신도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증언 속에는 이러한 주장을 정당화시킬 만한 근거가 있습니까? 그들은 예수의 부활 사건을 믿기 전에 얼마나 신중을 기했습니까? 그들이 스승을 지나치게 찬양한 적이 있었습니까? 그들은 예수나 혹은 그들 자신에 대하여 칭찬해 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한편 그들의 결함을 기록하는데 있어서는 거의 하나도 숨기지 아니할 만큼 솔직합니다. 하늘나라에서의 자리다툼, 예수가 죽었을 때 그들이 체험한 실망, 그의 부활을 믿지 않으려고 했던 그들의 어리석음 등, 이 모든 결함을 기록함에 있어서 어떠한 편견에 사로잡히거나 자기들의 이해관계를 고려한 일이 없었습니다. 한편 그들은 빌라도를 민감한 양심의 소유자로 묘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정말 열광적인 신자들이기만 했다면 그들은 누구보다도 우선 자기들의 스승을 사형에 처한 빌라도를 비웃고 멸시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남긴 기록 속에는 이러한 의도에서 쓰인 글이 한 편도 없습니다.
제 1세기의 비기독교도인 타시터스와 요세퍼스는 그를 양심이나 정의감이 없는 비열한 고집쟁이로 소개했습니다. 우리는 복음서의 기록만큼 편견이 개입되지 아니한 역사적 문헌을 아무데서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증인들이 편견에 사로잡힌 자들이라거나 그들을 고의적인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모든 역사적 근거를 무시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처럼 자기의 양심을 은폐해버린 자와는 논의할 가치도 없습니다. 다음에는 증인들의 능력에 대하여 관찰해 봅시다. 그들은 예수를 식별함에 있어서 착각한 것일까요? 그들에게는 분명하게 예수를 인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던 것일까요? 예수를 식별할 수 있는 기회가 충분히 주어졌다면 그들이 어떤 환각에 사로잡힌다는 것이 가능할까요?
예수가 부활하신 사건의 첫 이야기는 무덤에 찾아간 여인들의 방문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 세 여인의 이름은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요안나였습니다. "다른 여인들"도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그 주간의 첫 날 새벽에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해가 뜬 직후에 그곳에 도착했습니다(막 16:1-6). 그들은 매장이 된 예수의 시체에 급히 기름을 바르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누가 우리를 위해서 바위를 옆으로 굴려줄까?" 하고 망설였습니다. 분명히 그들은 무덤 곁에 배치된 파수꾼이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을 것입니다. 무덤 가까이 갔을 때 그들은 이미 돌문이 옆으로 굴려져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지체하지 않고 열려진 돌문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시체는 간 곳이 없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즉시 베드로와 요한(그들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에게 달려가서 이 사실을 전했습니다.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요 20:2)." 한동안 여인들은 비탄에 빠져서 슬퍼했습니다. 돌연 그들은 자기 옆에 서 있는 "두 사람"을 보았습니다. 이 천사들의 황홀한 모습에 놀라서 얼굴을 밑으로 숙였습니다. 천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 하라(마 28:5-7)"
이 때에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의 시체가 없어진 사실을 듣고 급히 무덤으로 달려간 듯 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 사실을 전한 막달라 마리아는 그들의 뒤를 쫒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다른 여인들을 떠나서 잠시 후에 도착했을 듯싶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빈 무덤을 살핀 후에 그들은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급히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그 무덤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느라고 그 자리에 남아 있었습니다. 이 때 그 여인은 다른 여인들에게 나타난 적이 있는 두 천사를 보았습니다. 그는 여인에게 물었습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그 여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몸을 옆으로 돌려서 그 여인은 또 한 남자를 보았습니다.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이에 그 여인은 대답하기를 "당신이 옮겨 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라고 했습니다. 그 여인은 분명히 그곳 동산지기가 시체를 옮겨간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 여인의 눈은 눈물로 가려져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그 여인이 자기의 주를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 때 그는 여인을 부르셨습니다. "마리아야 - " 여인은 그의 음성을 알아듣고 그를 보기 위해서 정면으로 몸을 돌렸습니다. 여인은 눈물을 거두고 자기 앞에 서 계신 예수를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히브리말로 "랍오니여"하고 소리쳤습니다. 이 말은 선생님이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여인은 지체할 틈도 없이 그의 제자들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급히 달려갔습니다(요 20:11-16). 그 여자들이 제자들에게 이 사건을 알리려고 달음질할 때 예수께서 저희를 만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평안하뇨" 이 여인들은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로부터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마 28:8-10). 부활 후에 나타나신 예수를 언급하면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 보이셨나니(고전 15:5)" 게바는 글로바의 이름을 밝히지 아니한 동행자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베드로가 글로바와 동행했던 무명의 인물이었던 것으로 봅니다. 그들이 엠마오로 가는 길에 어떤 낯모르는 사람이 그들과 함께 동행을 했습니다. 그들은 이 사람에게 빈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 및 천사와 그들 사이의 대면에 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또 그들은 자기들과 함께 있었던 어떤 사람들(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을 찾아간 일도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이 때에 자기들이 체험한 실망의 감정도 털어 놓았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여인의 증언을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동행자는 자기의 메시야직에 대하여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이 때, 그들의 마음속은 뜨겁게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이 낯선 길손에게 함께 머물러서 식사를 나누자고 간청했습니다. 그들이 식사를 할 때에 "눈이 열려서 그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들은 즉시 떠나왔던 곳으로 돌아가서 다른 제자들에게 증거했습니다.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눅 24:13-35)" 그들이 이러한 설화를 거짓으로 꾸며낸 것이라면 처음에 그들이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결코 인정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오히려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시선을 그에게 돌렸을 때 즉시 그를 알아보았다" 예수가 그들과 함께 동행하셨을 때 그들은 예수의 임재로 인해서 눈이 어두워진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예수는 성경을 해석하기 위해서 더 좋은 기회를 얻으실 수 있었습니다. 또한 "우리와 함께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의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다"고 한 발언을 주목해 보십시오. 누가는 이미 베드로가 무덤에 찾아간 사실을 언급했으나 요한이나 그밖에 그와 함께 간 사람에 관하여는 한 마디의 언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그들 가운데 두 세 사람"이라고 하는 복수를 사용합니다. 이것은 분명히 베드로와 요한의 방문을 지적한 것으로 보입니다. 누가복음에서 이러한 기록의 일치는 베드로와 함께 무덤을 찾아간 요한의 설명을 확실케 해 줍니다. 진리는 영원불변합니다. 거짓으로 조작한 사건이라면 이처럼 고의가 아니면서도 상호일치가 되는 증거는 생겨날 수 없습니다. 글로바와 그의 동행자가 예루살렘에 돌아가서 다른 제자들에게 예수를 보았다고 증언했으나 그들의 이야기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문을 잠근 방안에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예수가 그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눅 24:36-43). 처음에 그들이 놀라고 두려워했으나 주님은 친근한 음성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그들의 불안을 없애고 자기의 신분을 그들에게 분명히 알려주시기 위하여 그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그러면서 예수는 그들에게 손과 발과 옆구리를 보여주셨습니다.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매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몇 말씀을 더 하신 후에 그는 처음에 그들에게 나타나신 때와 꼭 마찬가지로 돌연히 사라지셨습니다. 이 때 도마는 자리에 없었습니다. 열 제자가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보았다"고 했을 때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노라" 이로부터 한 주일 후에 제자들은 문을 잠그고 방안에 모였습니다. 도마도 함께 했습니다. 예수가 다시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요 20:24-29). 이것은 도마를 꾸짖는 말씀이 아니고 단지 그가 부활하신 사건에 대하여 증거를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즉시 도마는 외쳤습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그의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요한은 말씀 되시는 예수께 대하여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를 너희에게 전하노라(요일 1:)"
두 번째 나타나신 곳은 갈릴리 해변이었습니다(요 21:1-23). 해변에서 약 100야드 떨어진 바다에서 7명의 제자들이 배를 타고 고기를 잡는 중이었습니다. 예수가 나타나셔서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하고 말씀하신 때는 아직도 새벽이 되기 전이었습니다. 예수의 물음에 그들은 "없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그들은 지체하지 않고 그물을 던졌습니다. 고기가 가득히 잡혔습니다. 이 때에야 비로소 요한은 그가 주님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성급한 베드로는 즉시 바다에 뛰어 내려서 해변으로 헤엄쳐 갔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고기든 그물을 끌고 와서 육지에 올라와 보니 생선과 떡이 놓여져 있어서 예수와 함께 식사를 나누었습니다. 조반을 끝내신 후에 예수는 베드로를 향해서 자기에 대한 사랑을 세 번씩이나 고백하게 하셨습니다. 그는 베드로에게 고기를 잡는 일보다 훨씬 더 중요한 임무를 맡기셨습니다. 예수는 베드로가 배와 그물과 고기 등의 여러 가지 재물보다 자기를 더 사랑한다는 고백을 받고 싶어 하셨습니다. 다음에 우리는 갈릴리산으로 가고 있는 열 한 제자를 봅니다. 이 산은 예수가 그들을 만나기로 약속하신 곳입니다(마 26:32), (막 14:28). 이 만남은 약속에 의한 것이고 또 그의 "형제들"과 함께 부녀자들도 그 속에 참석했던 것으로 보아 이것이 아마 예수께서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던 때"였을 것으로 봅니다(고전 15:6). 마태는 이 사람들 중에 의심하는 자도 없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말은 사도들 가운데 몇 사람이 의심을 했다거나 이 무리들 중에 어떤 사람이 예수를 만나본 후에도 의심을 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는 그 때까지만 해도 가까이 와서 말씀하시지를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와서 말씀하셨을 때(마 28:17-18) 모든 의심은 그들의 마음속에서 사라졌습니다. 이 때에 주어진 소명을 위해서 사도들이 평생을 수고했을 뿐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생명을 바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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