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마태복음 28:19)"
모세의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적용되었습니다. 시공간의 제한을 받으며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몽학 선생의 역할을 했습니다. 장차 오게 될 실재의 그림자에 불과했고 그 율법을 따라서 예배드리는 자들을 완전케 할 수 없었습니다(히 10). 결코 의와 영생의 열매를 맺을 수 없었습니다(갈 2:21), (갈 3:11, 21). 하나님은 이 세상의 나라들과 이스라엘을 구별케 한 율법이 폐지되어 예루살렘에 주의 전(교회)이 세워지며 만국 백성이 그 곳으로 모여들게 될 때의 징조를 그들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러한 때의 징조를 알려고 부지런히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주어진 계시의 뜻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벧전 1:9-12).
"때가 차서" 율법의 목적 완성이 되시는 예수가 세상에 오셨습니다. 육체의 몸을 입고 계시는 동안에 율법을 폐지하고 더 높고 완전한 새 법을 만들기 위해서 일하시기는 하셨으나 옛 율법의 정신과 축어적인 조문도 낱낱이 지키셨습니다. 그는 공적 활동을 시작하신 후에 팔레스틴 지역을 떠나신 일이 한 번밖에 없으셨습니다. 그것도 잠시 동안의 휴식을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가 열 두 제자들에게 사명을 맡기시면서 분부하셨습니다.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마 10:5-6)" 훗날에 그는 이러한 사명과 함께 70명의 제자를 또 보내셨습니다(눅 10:1-16). 그가 돌아가시기 일 년 전에 열 두 제자를 향해서 그는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8:18)" 그가 십자가에서 숨지셨을 때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케" 하셨습니다(엡 2:14-15). 그는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골 2;14)" 바로 이 때에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히 9:8)"
사흘 만에 예수는 죽음의 세력을 꺾고 승리하셨습니다.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셨습니다(딤후 1:10)" 율법을 완성하신(롬 10:4) 그는 선포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 28:18)" 훗날 밧모섬에 있는 요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노라 볼찌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계 1:17-18)" 새 왕이 되신 주님은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될 때까지" 없어지지 아니할 그의 절대적인 권위와 통치권을 선포하셨습니다(계 11:15).
이제 그는 제자들에게 시공간의 제한을 받지 아니하는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마태복음은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19-20)" 마가복음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 16:15-16)" 누가복음은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눅 24:46-47)" 요한복음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요 20:21-23)"
복음서의 기록은 모순이 없습니다. 예수는 몇 차례에 걸쳐서 그의 계명을 주시기 위하여 여러 가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가운데 어느 것도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무시해 버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가 주신 새 계명의 뜻을 충분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예수의 말씀을 모두 상고해야 됩니다. 예수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 10:33)" 입술로 그를 시인하는 것만이 구원의 조건이 된다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복음서 저자들이 기록한 새 명령을 신중하게 검토해 보십시다. 변호사는 배심원 앞에서 자기의 주장을 진술함에 있어서 증인들의 증언을 경청하고 모든 증빙 자료를 수집해서 하나로 요약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방식으로 논술해 보고자 합니다.
(1) 마태와 마가는 '가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소개합니다. 이 말씀에 순응한 그리스도의 일군은 무엇보다도 큰 계명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일군은 세상의 잃어버린 자들에게 복음을 전해 줄 의무가 있습니다. '가라!'고 하신 예수의 명령은 대단히 간단합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인간 전부를 포함합니다. 전도자들이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면 그 사업을 뒤에서 후원해 주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임무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임무를 기억하고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습니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 하리요(롬 10:15)"
(2) 누가는 첫 번 선교 지역이 예루살렘임을 명시했습니다. 다음의 예언서와 일치합니다.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사 2:3)" 선교지역의 확장순서는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행 1:8)입니다.
(3)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전도' 할 수 있는 권리를 주셨습니다. 이 두 단어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습니다. 유감스럽게도 현대의 많은 전도자들은 가르치는 일을 소홀히 하고 있습니다.
(4) 마가는 예수께서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예배에 참석하면 그리스도의 생애보다는 세상 이야기에 더 치중하는 것을 봅니다. 그리스도의 참된 종은 청중들의 귀를 만족시켜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기를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1-5)"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신 것을 전파함이라(고후 4:5)"고 했습니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주신 마지막 명령은 '복음을 전하라' 이었습니다. 구원을 이루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롬 1:16). 그것은 하나님이 죄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시는 오직 하나의 수단입니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서 구원은 인간의 의지에 달려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봅니다. 그것이 사실일까요?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하나님의 경륜은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이란 사실과 타인에게 복음 전하는 임무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5) 예수는 이 복음이 '모든 족속'에게 전파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유대 민족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피조물에게 베풀어지고 있습니다. 민족이나 피부의 색깔이나 개인의 신분이 문제 아닙니다. 모두가 복음 아래 있습니다. 주님의 새 계명을 무시하고 구원을 모색한다는 것은 유대 민족에게만 적용 되었을 뿐 아니라 예수가 그의 죽음을 통해서 폐기해 버리신 옛 율법으로 되돌아가려는 노력과 다름이 없습니다. 옛 율법으로 되돌아가려고 하는 몇몇 그리스도인들에게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 5:4). 유대인이나 이방인이거나 간에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주님이 세우시고 그가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이 선포한 복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6) 마가만이 '믿음'을 예수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조건으로 소개합니다. 그것을 천국에 들어가는 즉 구원 얻기 위한 필수 조건으로 받아들입니다. '구원하는 믿음' '역사적 믿음' 따위의 다양한 종류는 흥미 없습니다. 이것은 비성경적입니다. 반면에 성경은 '연약한 믿음' 혹은 '굳건한 믿음'과 같은 농도 차이를 말합니다. 종류의 다양성과는 같지 않습니다. 성경이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할 때 그것은 이러한 믿음이 주님의 계명에 순종하도록 자기를 인도해 줄만큼 굳건해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믿음은 살아서 활동하는 믿음이라야 합니다. 죽은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7) 누가만이 주님의 계명과 관련해서 '회개'를 언급합니다. 이 증언은 구원의 경륜에 주요한 역할을 담당합니다. '회개'는 의지의 변화이며 예수가 주신 계명 가운데 순종하기가 제일 어려운 것입니다. 회개는 생활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그것은 죄로부터 돌아서서 하나님께로 귀의하는 것입니다. 감각적 쾌락을 멀리하고 위에 있는 것을 모색하는 것입니다. 개인 의지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입니다. 자신의 의지를 하나님의 뜻에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회개는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받아들이는 그 순간에 시작됩니다.
독자는 이렇게 질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은 믿음을 회개의 선결 조건으로 보는가?" 다시 반문해 보고 싶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서도 그에게 귀의할 수가 있겠는가?"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은 어떠한 공리주의적인 이유로 인해서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 의거한다면 회개란 "경건한 슬픔과 하나님께 로의 귀의"를 뜻합니다. 인간은 불신앙 상태에서 하나님께로 귀의할 수 없습니다. 예수가 몇몇 유대인들에게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권유하신 말씀은 참으로 진리입니다.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태도의 변화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만 성경과 그리스도가 자신에 대하여 가르치신 말씀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그를 불신하면서 그에게 귀의한다는 것은 명백한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훈이 충분히 소개되었을 뿐 아니라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능력으로 증거하신 까닭에 하나님께 귀의한다는 것은 동시에 그리스도에게 귀의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우리는 신약성경에 의거해서 회개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과 그의 아들을 믿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으로 정의를 내렸습니다(히 11:1).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히 11:6)" 회개는 믿음 가운데서 행해져야 합니다.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모든 것이 죄(롬 14:23)"이기 때문입니다.
(8) 마태와 마가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세례를 받도록 명령하셨다고 말합니다. 교회가 세례를 베풀면서 동시에 구원과는 관계없음을 주장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도대체 세례 의식을 비본질적인 요소로 간주하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왜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까? 세례는 믿음과 회개와 동등한 권위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까? 주님께서 친히 세례를 받도록 명령하시지 않았습니까? 주님의 명령 가운데 더 중요한 것과 적게 중요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그 차이점을 도저히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주신 계명 가운데 "중요치 아니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인간은 그의 명령 가운데 지킬 것과 지키지 아니할 것을 선택할 자유가 없습니다. 거기에는 의논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뜻에 완전히 굴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가 주신 계명을 다 지켜야 합니다.
예수는 세례와 구원의 관계를 강조하셨습니다. "믿고 세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 믿음과 세례는 주님께서 주신 최고의 명령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없으리라"고 하는 구절은 앞의 말씀을 약화시키지 않습니다. 이 말씀의 뜻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믿지 않고 세례도 받지 않는 자는 정죄를 받을 것이다" 불필요한 말입니다. 불신앙은 그 자체로서 이미 정죄의 조건이 되고도 남기 때문입니다.
이제 또 하나의 문제를 제시하고자 합니다. 사람들이 세례를 비본질적인 명령으로 취급해 버리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세례의 뜻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논증할 수 없다고 해서 즉, 그것이 지니고 있는 뜻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무엇이든지 거부할 권리가 있을까요? 우리가 이 한 가지를 양보한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것도 아무 효과를 얻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이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란 사실을 시인했습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0-21)" 뱀에게 물린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침을 받기 위해서 막대기 위에 있는 구리뱀을 쳐다 보는 것은 어리석어 보였습니다. 여리고성이 함락되기 전에 열 세 바퀴를 돌라고 하는 말은 어리석게 보였습니다. 나아만이 문둥병을 고치기 위해서 요단강 물에 일곱 번씩이나 몸을 담그라고 한 말은 어리석게 들렸습니다. 회의론자들에게 있어서 구속의 경륜은 어리석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기억합시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그 까닭은 무엇입니까?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고전 1:18-31)" 최근에 와서 회의론 자들의 수가 증가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교회가 성경의 논증할 수 없는 부분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을 때는 언제나 회의론 자들이 생겨나기 마련이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강하다"는 말씀은 진리입니다.
세례에 관해서 한 말씀 더 하고 싶습니다. 마태복음은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기록합니다. 따라서 '가르침'을 받고 복음을 '믿는 자'들 만이 세례 받을 자격을 갖춘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9) 마가복음은 그리스도의 계명(즉, 믿음 회개 및 세례)을 순종한 데서 오는 상급은 '구원'이라고 합니다. 누가복음은 이것을 '죄의 용서'라고 표현합니다. 이 두 가지 단어는 모두 동일합니다. 우리가 구원 받으면 우리의 죄는 용서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피차 동일합니다.
(10) 세례는 성부, 성자 및 성령의 이름으로 받아야 합니다. 성삼위의 권위에 의해서 세례를 받는 것이 아니라 그들 사이의 새로운 관계에 의거해서 받는 것입니다. 훗날 세례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베풀어진다고 할 때 그것은 성부와 성령이 무시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요한은 하나님께로부터 친히 세례를 베풀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의 권위였습니다. 이제는 세례가 성부와 성자에 의해서 지시된 것이므로 그리스도의 이름에 더 강조점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부와 함께 그의 신성 및 통치권을 상징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되어야 한다"고 한 누가의 기록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 자체가 모순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계명을 직접 받은 사도들이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였는가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그들은 예수의 계명을 완전히 이해하였던 것일까요? 설령 초자연적인 도움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주님의 계명을 오해할 수는 없었다고 봅니다. 예수께서 성령의 도움을 받지 않고 그들이 이처럼 중대한 사명을 감당하도록 내버려 두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승천하시기 직전에 그는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먼저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성경의 강림을 기다렸습니다. 기다린지 열흘 만에(오순절에) 드디어 복음의 때가 성숙했습니다. 성령이 임재 하셔서 그들의 생각과 언행을 완전히 사로잡으셨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각종 방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는 열 한 사도와 함께 서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 부활 및 승천에 관한 사실을 전했습니다(행 2:22-28). 바울은 이것을 복음이라고 정의합니다(고전 15:1-3). 베드로의 그 놀라운 강론의 결론은 청중들에게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음을 알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린 그들은 외쳤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행 2:37-39)"
이제까지 논술한 것을 간단히 요약해 보기로 합시다.
①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가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가 승천하신 직후에 그들이 행군의 거보를 내디딘 사실을 봅니다. ② 그는 예루살렘을 전도의 첫 번 장소로 지정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도시에서 성령이 강림하실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드디어 위로부터 내리시는 성령의 권능을 옷 입고 전도할 곳으로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③ 그들은 '가르치고' '전도하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성령의 권능을 옷 입고 즉시 이 일을 시작했습니다. ④ 그들이 전한 말씀의 핵심은 복음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베드로의 강론주제였습니다. 진실로 그것은 사도들이 가르친 모든 강론의 주제이기도 했습니다. ⑤ 이 복음은 세상의 모든 족속에게 전파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첫 번 강론에서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이방인)에게 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켰습니다. 그들은 "모든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했습니다. ⑥ 그의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도록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베드로는 첫 번 청중들에게 예수의 교훈을 믿도록 강권했습니다. ⑦ '회개'도 주님의 계명 가운데 하나입니다. 베드로의 첫 번 강론에서도 이것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⑧ 예수는 "세례를 구원의 조건 가운데 하나이며 죄의 용서를 받는 조건 가운데 하나임"을 강조하셨습니다. 오순절날 "형제들이여 우리가 어찌할꼬?" 하고 청중들이 외쳤을 때 베드로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고 대답한 것을 놀랍게 여기지 않습니다. 바울과 마찬가지로 베드로는 현대의 전도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사견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성령이 인도하시는 대로 전했을 뿐입니다. 우리는 그가 천국을 선포하는 열쇠를 쥐고 있음을 잊지 맙시다. 이 사실은 결코 변경될 수 없습니다. ⑨ 세례는 그리스도가 친히 가르치신 것이며 또 그의 청중들에게 세례를 받으라고 했을 때 이 사실을 잊지 않았습니다. ⑩ 그는 예수가 믿음으로 죄를 회개하고 죄의 용서를 받기 위해서 세례를 받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상급'을 간과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새 계명이 전부 설명되었고 또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즉시 그 계명이 사도들에 의하여 지켜졌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계명을 오해할 수 있겠습니까? 교회 지도자가 성경에 기록된 형식과는 정반대로 의식을 집행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변명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으셨습니다.
승리의 예수가 아버지께로 다시 돌아가셨을 때 그는 하나님 우편에 정좌하고 계십니다.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셨습니다(엡 1:21).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빌 2:9,10)" "그리스도와 주가 되신(행 2:36)" 혹은 요한의 표현을 빌리면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가 되신(계 17:14, 19:16) 그는 지금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의 선택 문제밖에 없습니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의 뜻에 완전히 굴복하여 영원한 복락을 누리든가 아니면 영원한 수치와 형벌의 선고를 받기 위해서 마지막 심판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마 25:31-46), (고후 5:10), (계 20: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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