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격히 따지면 세례는 신약성서가 제정한 의식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요한이 소개했습니다. 요한은 “예언서에 기록된 것처럼” 주의 길을 예비하러 왔습니다. 그가 활동한 무대는 “유대의 광야”와 “요단강 주변”이었습니다. “하늘나라가 임박했으니 죄 사함을 얻는 회개의 세례를 받으라.”는 것이 그의 외침이었습니다. 몇 달이 지나기도 전에 유대 백성들은 그 외침에 충격을 받고 그가 그리스도인가 해서 더욱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요한은 그들의 의문에 분명히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요 1:26, 27).” 이 때 요한은 예수를 알고 있었으나 그가 곧 “그리스도”이신 줄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요한의 임무는 두 가지, 즉 주의 길을 예비하는 것과 하나님의 어린양에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었습니다. 요한은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요 1:33).”는 말씀을 그를 보내신 이로부터 들었습니다.
요한이 예수를 만난 방식은 여느 이야기와는 분명히 달랐습니다. 이처럼 고상한 두 인격의 만남은 그 자체가 훌륭한 희곡 소재가 될만했습니다. 이것은 무리들로 하여금 그에게 다윗의 왕위 계승자가 되게 하는 운동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자극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는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 새” 그의 모습을 나타내셨습니다(눅 3:21). 요한의 임무가 거의 끝나갈 즈음이었습니다. 그는 무리들에게 메시야의 출현을 선포하고 비록 메시아가 “누구인지는 알지 못했으나” 메시아가 그들 “가운데” 계시다는 사실은 이야기 할 수가 있었습니다. 많은 무리들이 요한의 가르침을 따르고, 그에게 와서 세례를 받는데도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나타나지 않으니 이 때 그의 마음은 틀림없이 점점 불안해졌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임무를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확신에 가득 찬 음성과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갖고 오실 분의 임박한 출현을 성실하게 전파하였습니다.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신대(마 3:13).” 때가 차서 이제 그는 망치와 톱을 버리고 물질적인 집을 세우던 자리에서 영원히 존속할 영적인 집을 짓는 자리로 위치를 바꾸셨습니다. 그는 이제 소년 시절에 작별을 고하고 그의 사업에 착수하기 위해 100 km가 넘는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의 눈은 남쪽만 응시하면서 한번도 나사렛 촌이나 갈릴리 언덕을 돌아다보는 일이 없이 결의에 가득 찬 발걸음을 옮겨 놓았습니다. 세상을 구속한다는 이 중대한 임무에 그의 생각이 미쳤을 때 그 순간적인 감상이 어떠했겠습니까?
예수는 분명히 “세례를 받고자” 요한에게 오셨습니다. 요한은 “죄 사함을 얻기 위한 회개의 세례”를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시대의 죄악을 기탄없이 정죄하고 신분의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이를 경고했습니다. 우리는 그가 예수를 탁월한 인간으로만 알았을 뿐 그가 메시아이신 줄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예수는 무죄한 인간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의 얼굴은 순전함과 신실함을 보여줍니다. 그 대담하고 겁이 없는 선지자도 이제 그의 면전에서는 자신을 낮추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요한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신 줄을 느끼고 이렇게 고귀하신 분에게 세례를 베풀 자격이 자기에게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처음에는 요한이 사양했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이에 예수는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 3:14,15).”고 대답했습니다. 요한은 더 이상 거절하는 것이 지혜롭지 못함을 깨달았습니다.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예수가 세례 받으시기 전까지는 자신이 메시아임을 알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우리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요한의 임무는 예비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요한이 “예수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었다면 예수가 그 사실을 전혀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예수는 점진적으로 자기의 신분을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가 요한의 세례를 받은 사실로 봐서 그도 범죄 한 것이 분명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세례도 예수께서 우리에게 받으라고 명령한 세례처럼 “죄 사함”을 받기 위한 것임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가 받은 세례는 그의 탄생과 마찬가지로 예외적입니다. 예수가 세례 받기를 청하셨을 때 요한이 주저한 사실로 볼 때 그는 예수에게 죄가 없음을 알아보았던 듯 합니다. 진실로 그는 전혀 다른 동기에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만일 이처럼 특별한 동기가 없었다면 예수가 “죄 사함”을 위해서 세례를 받으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울 것입니다. 그가 육의 몸을 입고 계신 동안 유대인들은 그의 언행 일체를 면밀하게 주시하였습니다. 트집을 잡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는 그들이 계속하여 자기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는 것을 알고 계셨으므로 이런 말씀으로 도전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요 8:46)” 그로부터 2천년 동안 아무도 그에게서 허물을 찾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그에게서 허물을 찾아내려고 애쓰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라고 한 말씀이 예수가 세례를 받으신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 아무도 이 간단한 말씀을 잘못 이해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주의 모든 계명이 의로우므로(시 119:172)”라고 선언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 예수께 세례 받도록 명령하셨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오직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그의 세례를 받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게 되었습니다(눅 7:30). 만일 그가 세례 받기를 거절하셨다면 이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결코 작은 죄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요 6:38,39).” 예수께서 세례 받으신 것은 성부의 뜻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하였습니다. 그의 30년간의 삶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예수께서 순종하여 받드시더라(눅 2:51).”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가 세례 받으신 후 처음으로 하신 말씀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입니다. 성부가 맡기신 사업을 행하실 때 예수는 제자들로부터 식사 권유를 받을 만큼 육체적 굶주림은 쉽게 참아 내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2,34).” 또, 그는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마 12:50) 하셨습니다.
예수는 세례를 통해서 겸손에 관한 교훈을 주셨습니다. 겸손은 그의 중심적 교훈입니다. 제자들에게 그는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 18:4).”고 하셨습니다. 예수는 언제나 그의 가르침에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세례를 통해 예수는 우리가 따라야 할 모본(模本)을 남겨 주셨습니다. 그는 자신이 행하지 않는 것을 명령하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그의 명령은 “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이시므로 그가 남기신 모본은 완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가 없으신 그의 아들을 세례 받게 하셨으므로 똑같은 일을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예수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해야 한다고 생각하셨으며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는 겸손하게 세례를 받으셨는데 그의 제자임을 자청하는 우리가 세례 받기를 거부한다면 진정으로 그를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그의 모든 계명들은 본질적인 것입니다.
마태는 예수가 세례 받으셨을 때 “물 위로 올라오셨다(apo)(마 3:16)”고 말합니다. 마가는 예수가 “물로부터(ek ton hudatos)(막 1:10)” 나오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는 이 두 가지를 다 하셨습니다. 마가는 더 나아가 그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사실을 덧붙입니다. “로마서 6:3,4의 말씀은 초대교회의 세례가 침수의 형식을 갖추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고는 이해되지 않는다.”라고 한 코니비어와 호손의 설명은 아주 적절합니다. 신약성경의 “벱티죠(baptizo)”라는 단어는 이 외에 다른 뜻이 없으므로 그 의미를 설명하는 것조차 불필요할 정도입니다. 그것은 희랍어로 “침수”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희랍정교회에서는 언제나 침수세례를 베풀어 왔습니다. 그들이 누구보다도 성경을 잘 해석한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4,000년 동안이나 거의 그다지 큰 변화 없이 사용했던 그들의 언어 가운데 이 단어의 뜻만은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음이 틀림없습니다. 희랍어 벱티죠(baptizo)가 명백하게 침수라는 뜻을 갖고 있는데 이를 “물을 뿌리다” 혹은 “물을 붓다”로 해석한다면 희랍인에게는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희랍어 사전을 보면 “침수”라고 명백히 정의를 내린 그 단어가 왜 논쟁거리가 되고 있는지 의아스러울 뿐입니다. 다행히도 신약성서는 세례가 베풀어진 실례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한 가지만 살펴보아도 충분할 것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롬 6:3,4).” 이처럼 예수와 사도 시대 당시에는 의심의 여지없이 침수를 행했는데 오늘날 이를 물 뿌리는 약식으로 대체하는 것을 보면 매우 유감스럽습니다.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 새(눅 3:21)”, 예수가 세례를 받으시자 이 중요한 사건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 많은 무리들이 모여들었으리라는 것은 지나친 추측이 아닐 것입니다. 수개월 동안 요한은 사해에서 북쪽으로 약 15km 지점까지 펼쳐 있는 “유대광야”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 땅의 지세는 극히 험준하고 황량했습니다. 그는 바위틈에서 음식을 구할 수밖에 없었고 낙타털로 옷을 만들어 입었습니다. 그의 용모는 거칠었고 살갗은 내려 쬐는 태양열로 그을려 있었습니다. 이렇듯 야성적인 풍모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의 외침을 듣는 사람들의 폐부를 찔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젊은이가 그에게 다가와서 세례 받기를 요구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놀란 것은 온 세상을 뒤흔들던 그 권능의 전도자가 그의 면전에서 꼼짝 못하고 움츠러든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고백할 죄가 없었기 때문에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고 망설임 없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이 위대한 전도자는 떨리는 손으로 그 젊은이를 물 속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그 속에 몸을 잠근 후 나오게 하였습니다”(멕가비). 그것은 아름다운 광경이었습니다. 예수는 그것이 대단히 “합당하다”고 하셨습니다. 만일 그가 세례 받으신 것이 합당하다면 오늘날 우리가 그것을 “합당치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예수가 요단 강변에서 걸어 올라왔을 때 즉시 하늘이 갈라졌습니다.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와서 그 위에 임하였습니다. 여기서 알아야 할 점은 성령이 비둘기로 내린 것이 아니라 비둘기 같이 임하였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기름 부음을 왜 비둘기 같이 내려주셨는지에 대해서는 굳이 추측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이때 예수가 제사장직을 임명 받으셨다고 하는 주장은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제사장의 몸을 씻고 기름 붓는 의식은 이런 것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예수가 육체의 몸을 입고 계신 동안은 제사장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제사장 족속에게서 태어나시지 않았습니다. 그는 유다지파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우리 주께서 유다로 좇아나신 것이 분명하도다. 이 지파에는 모세가 제사장들에 관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없고(히 7:14).” 제사장 직이 아론 반차(order)에서 멜기세덱 반차로 바뀌기 전까지는 그가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실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예수가 승천하실 때까지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더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셨을 것이니(히 8:4).”
메시아는 선지자, 제사장, 왕이 될 분이었습니다. 이 세 가지 직책은 기름부음 받는 절차가 필요했습니다. 예수는 육체의 몸을 입고 계신 동안에는 선지자였으며, “그가 승천하여 높이 올리우셨을 때” 제사장과 왕이 되셨습니다. 그가 세례 받으실 때 임재하신 성령은 예수를 장차 세상에 오실 선지자로 임명하셨고, 또 그를 이스라엘의 선지자로 지명하셨습니다. 요한은 이미 이러한 성령의 임재가 메시아의 증표로 주어질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성령이 임재하자마자 구름 위에서 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6,17).” 어떤 비평가는 성령의 임재는 좋은 징조를 의미하는 진짜 한 마리의 비둘기였고 하나님의 음성은 소크라테스에게 들렸던 것과 같은 내적 양심의 소리였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복음전도자들이 속임을 당했거나 그들이 독자들을 속이려고 했을 것이라는 주장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을 읽는 사람이면 누구나 복음전도자들이 이러한 현상들을 사실적으로 이해시키려고 한 노력의 흔적을 보게 될 것입니다. 만일 저자들이 속았거나 혹은 그들이 독자들을 속이려고 한 것이라면 그 이야기는 믿을 만한 근거가 완전히 없어질 것입니다. 사실을 은폐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는 그 기록을 사실로 믿거나 그렇지 않으면 송두리 채 부정해 버리거나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늘에서 들려온 음성과 성령의 강림을 예수의 세례를 본 모든 사람이 목격했다는 사실에는 좋은 증거가 있습니다. 약 3년이 지난 후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을 했을 때 예수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6,17).” 이 성구는 베드로가 예수의 세례를 목도한 사람 가운데 하나였음을 보여줍니다. 베드로가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어 가신 날까지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들”이 사도들이라고 진술한 것을 떠올리면 이 사실은 더욱 분명해집니다(행 1:21-22).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그의 아들을 공중에게 선포하기 위하여 이 기회를 선택하신 것은 결코 우연이라 할 수 없습니다. 또, 이때 처음으로 성령이 임재 하셔서 예수를 영예롭게 하신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예수의 세례는 여기서 성삼위 하나님의 권위에 의해서 인정된 것입니다. 성자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것을 “의로운 행위”로 인증하셨습니다. 성령께서는 그를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메시아로 지명하는 것을 이 사건으로 인증하셨습니다. 성부는 예수가 그의 아들임을 널리 선포하시기 위해 이 시간까지 기다리심으로써 이를 확증하셨습니다. 이례적인 이 사건을 무의미하다고 볼 수 있을까요? 결코 그럴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 세 가지 사건이 서로 얼마나 완전하게 조화 되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사도베드로는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라고 했습니다(행 2:38). 바울은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6).” 이처럼 위대한 스승과 그 제자들 간의 아름다운 유사성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그저 우연히 생겨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부는 여기서 예수를 단지 그의 아들로 인정 하신 것뿐만 아니라 “이는 내 기뻐하는 자”라는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그는 심히 기뻐하심을 받은 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총애를 받는다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예수의 세례를 하나님께서 그처럼 심히 기뻐하셨다면 그는 우리의 세례도 그와 같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에게서 “잘 하였도다. 내 충성된 종아.”라는 말씀을 듣고자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도록 성실하게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거짓말을 못 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는 우리가 잘하지 못했는데도 불구하고 “잘 하였도다.”라는 말씀을 하실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뜻을 배우고 거기에 기꺼이 복종하는 것이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세례는 그의 생애에 있어서 하나의 명백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공적활동의 첫 시작이었습니다. 그것은 모든 지상적인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지상에서 보다 높고 크고 풍성하게 살려는 새로운 삶의 시작이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들도 그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갈 3:2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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