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한복음 13:14)
예수는 이러한 계명을 주시면서 새로운 이성의 행위 즉 부성애의 행위를 소개해 주셨습니다. 지금부터 고찰하게 될 네 가지의 복은 이러한 부성애를 정확히 설명해 주며 또 이러한 원리를 실천하므로서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
◑ 애통하는 자의 복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 5:4)
우리의 상식으로 보면 애통은 결코 행복의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이것이 영원한 진리가 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얼른 보기에 이것은 역설적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예수의 교훈을 이해하는 비결은 애통이라고 하는 단어의 뜻에 있습니다. 이 단어는 슬픔과 비탄의 외적 표현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것을 의미하는 단어가 희랍어에 있습니다. 그러나 애통이라고 하는 것은 관심 즉 고린도전서 5장 2절에 쓰여진 것과 같이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한 관심을 나타냅니다(고전 5:2).
본문에서 예수는 한 식구가 죽어버린 데서 오는 슬픔이나 비탄 따위를 말씀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그는 부모가 그의 자식에 대하여 가지는 것과 같은 사랑으로 가득한 관심을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부모들이 자식으로 하여금 행복하고 어른다운 생활을 하도록 돌봐주는 염려를 의미합니다. 그는 부모가 자식의 필요와 실패에 대하여 민감하게 만드는 따위의 사랑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예수가 제물이 많은 청년 율법사에게 베푸셨던 사랑입니다.(마 19:16-22) 아버지와 같이 그는 이 청년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개발해 내지 못하는 가능성을 보셨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행복을 갖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에 대하여 이러한 사랑을 베풀 수가 있어야 합니다.
청소년교육 지도자들은 젊은 세대가 타락하는 이유로서 부모들의 동정과 이해가 모자란다고 지적합니다. 그들의 배후에는 자기를 보살펴 주는 보호자가 없는 것이 대부분 이었습니다. 그들의 타락을 애통하는 사람이 없으므로 그들은 비정상적이고 불행한 생활을 가져오게 됩니다.
사람은 선천적으로 자기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도록 만들어진 사회적 동물입니다. 많은 심리학자들은 인간이 선천적으로 남을 동정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진 존재라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세상에는 왜 그와 같이 무정한 사람들이 많이 있을까요? 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필요에 대하여 그와 같이 무관심 할 수가 있을까요? 그것은 타인에 대해서 갖는 고상한 관심이 억눌려 있기 때문입니다.
남자들 가운데는 특히 '그는 사나이다' 하는 식의 태도를 갖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린이가 말을 배우게 될 때에 그는 '아이야 울지마라' 고 하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가 타인에 대하여 가지는 본능적인 관심을 개발하고 증대시키도록 가르침을 받아야 할 어린 시절에 그는 자기의 감정을 억제하도록 가르침을 받고 있습니다. 남을 위해서 애통하기를 배우는 대신에 그는 한 어른으로 성장하기 위해서 자기의 감정을 억제해야 한다고 가르침을 받습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마음속에서 기쁜 마음을 불러 일으켜 줄 환경에서 도피함으로서 자기의 감정을 억제하려고 합니다. 그는 비극적인 일은 보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는 또한 자기의 마음을 무디게 하고 자기의 감수성을 억제함으로서 마땅히 울어야 할 때에도 울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다 큰놈이 울면 못써요' 라고 하는 말의 배후에는 진실성이 없지 않으나 이것은 예수의 교훈과 정 반대가 됩니다.
부모들은 자기의 자식들이 용감해 지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으로서의 고상한 성품을 억제함으로서 그들의 목적을 잃어버립니다. 성경에는 타인의 불행에 대하여 애타게 슬퍼한 위대한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 이름을 열거하면 모세, 아브라함, 사무엘, 다윗, 엘리야, 예레미야, 이사야, 아모스, 그리고 호세아를 들 수가 있습니다. 그 중에도 예수는 완전한 용기의 소유자 였습니다. 그는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거나 이스라엘의 운명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나타내거나 혹은 사랑하는 친구의 죽음으로 인해서 울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신약성서 가운데 가장 감동적인 구절은 '예수가 우시더라' 입니다. 반면에 감정의 지배를 받지 않은 비정의 인물은 골리앗과 요압, 그리고 삼손입니다.
◑ 긍휼
긍휼이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 5:7)
많은 사람들은 긍휼을 수동적이며 완전히 소극적인 덕으로 간주하고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할 사람에게도 벌을 주지 아니하는 행위가 긍휼에 해당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분명히 예수가 가르치신 긍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는 긍휼이 수동적 덕행이 아니라 그 자체가 행동으로 표시되는 적극적 덕행 임을 가르치셨습니다. 긍휼은 타인의 정신적 혹은 육체적 고난을 예방하는 행위로 정의될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아버지의 사랑은 그 자체가 긍휼의 형식을 빌려서 나타납니다. 부모들은 그의 자녀들이 마주치게 될 장애물을 미리 내다봅니다. 그들은 자녀들을 이러한 장애물로부터 건져내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하며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그들에게 줍니다.
예수가 가르치신 긍휼의 개념은 그의 생활 가운데서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는 간음하다가 붙잡혀 온 여인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녀를 돌로 쳐서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는 여인에게 '내가 너를 정죄하지 아니 하노라'고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여인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예수의 본을 따라서 긍휼을 베풀고자 하는 사람은 타인에 대하여 용서할 줄 아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긍휼은 자기의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뜻을 거스른 자에게 보복을 하는 대신에 오히려 그들을 용서해 줍니다. 이것이 진정한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자식이 아버지에게 죄를 범했을 때 보복을 하는 대신에 그 자식을 용서하고 자기의 품안에 돌아오기를 바랍니다. 탕자의 비유는 아버지의 긍휼을 나타내는 좋은 예가 됩니다.
긍휼의 미덕을 배우기는 쉽지 않습니다. 부모들은 자식들이 불행과 슬픔 가운데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 밤잠을 못 자고 애를 씁니다. 긍휼은 벌을 주어야 할 때에 주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어린이에게 채찍질하는 것은 그냥 내버려두는 것보다 몇 배나 더 긍휼을 베푸는 행위가 됩니다. 긍휼은 언제나 다른 사람의 행복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태도입니다. 부성애가 우리의 행위를 지배할 때에만 긍휼을 베풀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아이로 하여금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을 갖도록 가르치는데 쓰여지는 똑같은 방법이 그 아이에게도 쓰여질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궁핍에 대하여 동정을 베풀 줄 아는 사람 즉, 애통해 할 줄 아는 사람은 그를 위해서 무엇인가 봉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들은 자기보다 더 어린 아기들이나 동물들에게 긍휼을 베풀도록 가르침을 받는다면 그는 어른이 되었을 때 더욱 행복해 질 수가 있을 것입니다. 어린아이에게 다른 사람의 궁핍에 대하여 모른 체 하도록 가르치거나 혹은 그에게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행복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그가 일생동안 좌절과 불행 속에서 고통을 받도록 저주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 화목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 5:9)
그리스도인 생활은 "지각에 뛰어난 화평"을 가져옵니다. (빌 4:7) 그러나 이 화평은 애써 찾아야만 합니다. 예수가 그의 제자들에게 주신 마지막 교훈중의 하나는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이러한 화평은 외적인 변화라기 보다 내적인 변화를 말합니다. 화평을 방해하는 세 가지의 근본적인 원인은 두려움 그리고 탐욕과 성내는 것이 있다고 봅니다. 이 세 가지의 감정은 한 개인의 내적인 갈등이거나 한 개인과 그가 속한 사회와의 갈등이거나 혹은 국가간에 생기는 갈등에 원인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화목 자들이어야만 하고 그것이 의무일 뿐만 아니라 또한 영원한 행복을 가져다 줘야만 합니다. 만약에 사람들이 그의 생활 속에서 두려움, 탐욕과 성냄을 없앤다면 사람들은 기필코 화목을 얻을 것입니다.
대학에 다니는 학생이 강사로부터 부당하게 취급당하고 있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그가 부당하게 취급당하기 때문에 강사에 대해서 화를 내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또 그 과목을 실패하지나 않을까 하는 두 가지의 두려움이 생깁니다. 그때 한 친구가 와서 그가 지닌 두려움에 대해 너의 반감은 올바른 태도에 의해서만 극복되어 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고 합시다. 그래서 그 학생이 자기의 분노를 억제하기로 마음속에 다짐했다고 할 경우 이것은 그 젊은이뿐만 아니라 그 강사에게도 놀라운 효과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강사는 그 학생에 대해 부당한 취급을 중지하고 자기가 취했던 과거의 행위를 사과하게 될 것입니다. 이 경우에서 이 젊은이는 자기의 분노를 억제하기로 결심했을 때에 그의 문제는 즉시 해결되었으며 행복한 마음의 상태를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불의를 극복하는 길은 예수가 가르치신 아버지의 사랑으로 극복할 때만 가능합니다.
◑ 핍박을 받는 자의 복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마 5:10-12)
예수가 핍박의 대가로 화평을 약속하신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그는 자기의 제자들과 수많은 무리들이 자기들의 신앙으로 인해서 더 많이 핍박을 받게 될 것을 미리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들에게 행복을 가져오는 내적 평안을 약속하셨습니다.
죽음을 기다리며 감옥에 있던 바울이 디모데에게 쓸 수 있었던 평안입니다. 이 사도는 젊은 복음전도자에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움이 아니요, 능력과 사랑과 절제의 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수세기 후에 두명의 영국사람이 의를 위해서 불 속에 던짐을 당했을 때 그 중의 한사람인 라티머가 다른 한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리드 씨여 기뻐합시다. 우리는 이날에 하나님의 은총으로 영국에서 이와 같은 촛불을 켜게 되었습니다'.
예수는 금욕주의를 가르치신 것이 아닙니다. 신약성서에는 육체적 고행이 경건한 생활을 가져오게 한다고 가르친 곳은 한군데도 없습니다. 사실인즉 바울도 이와 같은 것들은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골 2:2)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고행 자체를 위해서 고난을 당하는 것은 불가피 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부성애의 특징입니다. 예수는 자기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사랑이 없다고 말씀했습니다. 아버지가 자기의 아들을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기꺼이 바치더라도 이것은 당연하게 생각되어질 것입니다.
예수가 말씀하신 기쁨은 핍박을 받고있는 그리스도인에게도 주어집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를 위해서 고난을 당하거나 심지어 그를 위해서 죽더라도 후회될 것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이 그로 하여금 핍박을 당하는 가운데서도 행복을 느끼게 해주는 것입니다. 어린이들은 용기의 근원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세상에 대한 그의 사랑 때문에 용감하게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의 제자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사랑 때문에 용감하게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행복은 이러한 용기입니다.
팔복 가운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남을 위한 봉사정신 입니다. 예수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 대해서 이러한 태도를 갖게 될 때에 이 세상에서뿐만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도 영원한 복락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행복을 추구하므로 서 자기 자신의 행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진리와 같습니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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