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디    ID저장
비밀번호     








  
   
  예수의 이적
  연구과 (예수의 생애와 교훈) - 4 과
“예수께서 병 고칠 자들은 고치시더라(누가복음 9:11).”

웹스터 사전에 따르면 이적은 “경이로운 일”을 의미합니다. 그 뜻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자연 법칙을 초월한 물리적 세계의 사건”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적의 정의를 더 찾아볼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정의만으로도 이적이란 단어의 개념은 어느 정도 적절하게 설명된다고 봅니다.

백성들을 심히 놀라게 했던 “경이로운 일”들을 예수께서는 많이 행하셨습니다. 이런 이적들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자연법칙들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일부 비평가들은 그 모든 이적들이 불합리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 이적들은 그들이 설명하는 주장보다는 더 합리적입니다. 사실인즉 예수의 이적을 믿는 것이 그것을 설명하는 것보다 쉽습니다. 비평가들은 “이적 사건이 보편적 경험에 모순”이 된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그러나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이적을 보았다고 확신할 뿐 아니라 생명을 내걸고 그리스도를 증언했습니다. 비평가들이 초자연적 사건을 본 일이 없다고 해서 아무도 그러한 사건을 보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제 예수가 행하신 이적들을 검토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 이적을 기록한 사람은 요한입니다. 물을 포도주로 만든 사건입니다(요 2:1~11). 그 과정은 아주 간단합니다.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구까지 채우니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니라.” 성경을 보면 예수는 그 자리에서 물이나 항아리에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오직 명령으로 그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화학적 법칙이나 마법적인 어떤 요소도 가미되지 않았습니다. 글자 그대로 초자연적인 “경이로운 일”이었습니다.

요한은 다른 복음서 저자들 보다 늦게 요한복음을 기록한 듯합니다. 그는 주님의 신성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때문에 회의론자들은 요한의 복음서를 한결같이 부인합니다. 마가복음 역시 회의론자들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많이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가 바다와 바람을 꾸짖으시면서 “잠잠 하라. 고요 하라((막 4:36~41, 마 8:23~27, 눅 8:22~35)).”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들은 이 사실이 과장된 것이며 바람과 파도가 잔잔해진 것은 하나의 자연적 현상에 불과했다고 주장합니다. 본문을 읽어보면 이런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추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임이 분명합니다. 복음서 저자들은 극적효과를 얻기 위해서 과장법을 쓴 일이 전혀 없습니다. 그들의 문체를 보면 누구나 이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마태는 세금 징수원인 까닭에 사소한 문제까지 정확을 기하려고 한 사람입니다. 마가는 “즉시”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하였습니다. 마가의 간결한 화법과 선명한 문장과 세밀한 묘사는 그가 모든 사건을 직설적으로 표현하려 했음을 보여줍니다. 복음서 서두에서 누가는 “처음부터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했다.”고 기술하였습니다. 이어지는 기록은 이 주장을 더 강력히 밑받침해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저자들이 제자들이 두려움에 떨다 안정을 되찾은 것이나 거대한 폭풍이 일던 바다가 갑작스레 잠잠해진 것을 과장할 무슨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완전히 마음의 평정을 회복한 후에 그들의 용기와 성실성을 의심케 하는 그 사건을 과장할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그들이 과장해서 표현했다는 증거는 도저히 찾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아담클라크의 마태복음 8:24 주석에 동의하든 하지 않든지 그의 설명은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제자들이 겪은 폭풍에 대해 그가 말하기를 “아마 공중의 권세를 잡고 있는 사단이 복음 전도자들을 모두 조그마한 뱃속에 집어넣고, 그것이 물속에 빠지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경륜은 수포로 돌아가고 멸망해 가는 세상에 대한 구원은 저지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듯하다. 인류의 원수가 볼 때 이것은 얼마나 좋은 기회였을까?”

비평가들이 예수께서 물위로 걸어가신 사실을 어떻게 설명하려고 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마 14:22~33, 막 6:45~51, 요 6:15~21)). 때는 5천명의 무리를 먹이신 다음날 새벽 3시에서 6시 사이였습니다. 저녁 늦게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자기가 무리들을 해산시킬 동안에 배 한 척을 구해서 바다를 건너가라고 하셨습니다. 바다 건너편까지의 거리는 약 10km에 불과했습니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 거리였지만 바람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회의론자들은 예수께서 무리를 해산시키신 후에 자기들을 다시 찾아 올 것으로 기대하고 제자들이 어느 편리한 장소에서 주님을 모셔 올리기 위해 해변에 대기하고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그가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셨다는 성구를 비평가들은 “바다와 접한 해변을 따라 오셨다”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요한은 제자들이 “십여 리쯤 갔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목적지까지 거의 절반을 건넌 거리입니다. 마태는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났다”고 말합니다. 배가 폭풍에 시달리고 있을 때 예수가 그들을 찾아오신 장소는 바로 여기입니다. 만일 그들이 해변 가까운데서 예수를 기다렸다면 그를 보았을 때 놀랐다는 사실은 무의미합니다. 그랬다면 분명히 제자들은 그것을 “유령”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며 해변으로 오시는 이가 예수임을 금방 알아보았을 것입니다. 해변에서 폭풍을 만나거나 예수를 만나는 것은 놀랄만한 사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고 말씀 하셨다는 사실은 제자들이 해변 가까운데서 예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주장이 틀렸음을 증명해 줍니다. 그들은 예수의 음성을 듣고 “그를 배로 모시려고” 했습니다. 필요하다면 예수께로부터 시선을 돌릴 때까지 “물위로 걸어간” 베드로의 경우를 인용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의 일부를 부인하는 자들은 이러한 두 가지 이적에 대해서도 확신을 갖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제 5천명에게 음식을 먹이신 사건을 보겠습니다. 이것은 네 명의 복음서 저자들이 모두 기록한 사건입니다(마 14:13~21), (막6:32~44), (눅 9:10~17), (요 6:1~13). 게네사렛 호수의 동북쪽에 있는 산 위에서였습니다. 예수가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과 호수 위로 걸어오신 사실을 안 무리들이 사방에서 몰려와서 그가 육지에 닿으실 때를 기다렸습니다. 예수는 그들을 측은히 여기셨습니다. 그들이 마치 목자 없는 양들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들을 전도하기에 좋은 기회였습니다. 의사 누가는 “예수께서 병 고칠 자들을 고치시더라.”고 말합니다.

“날이 저물어 가매” 배가 고픈 제자들은 “그에게 와서” 무리를 보내어 먹을 것을 얻도록 간청했습니다. 예수는 그들에게 “다른 데로 갈” 필요가 없다고 답변하셨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에게 있어서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을 먹일지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거기서 구할 수 있는 음식이라고는 어떤 소년이 혼자 먹기 위해서 가져온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만물을 지으신” 분의 손 위에 놓여졌을 때 거기엔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예수는 그들을 “백 명씩”, “오십 명씩” 무리 지어 풀 위에 앉게 하셨습니다. 그 군중이 배부르게 먹고 그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가 되었습니다.

이적이 아니고는 이 사실을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한 소년의 점심으로 5천명의 남자와 그밖에 수많은 부녀자들을 배불리 먹이고도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가득 찼다는 사실은 초자연적 법칙으로 밖에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사복음서 저자들이 사실이 아닌 것을 알면서 이러한 이야기를 동시에 기록했다고 생각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적어도 이 가운데 두 사람은 이적이 베풀어진 현장에 있었고, 또 떡을 분배하는 일에 참가했습니다. 이 이야기들 중에 처음 셋은 이 이적을 본 사람들이 모두 살아 있을 때 기록되었습니다. 우연히도 마태와 마가는 4천명을 먹이신 사건을 기록한 사람들입니다. 이 기록들이 허위로 창작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공개적인 기록이고 그 기록의 진위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살고 있던 시대와 장소에서 읽혀졌으므로 착오가 있었다면 누군가는 그것을 지적했을 것입니다.

이제 예수가 귀신을 쫓아내신 사건을 주목해 봅시다. 복음서는 이 경우를 여러 차례 소개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만으로도 우리의 이해를 돕는데 충분할 것입니다. 가장 유명한 사건은 게네사렛 촌에서 일어난 일입니다(마 8:28~34), (막 5:1~17), (눅 8:26~37).


어떤 가련한 사람이 수많은 귀신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 귀신 가운데 하나가 대변자 노릇을 했습니다. 그는 산 위에 있는 무덤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몹시 난폭하여 “더러운 귀신들”에 의해 한 번 성이 나면 자신을 매두었던 쇠사슬을 모두 끊어 버렸습니다. 예수가 가까이 가셨을 때 그는 뛰어서 달아나다가 그의 면전에서 거꾸러졌습니다. 이것은 그를 존경해서가 아닙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아보고 자기들에게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을 두려워한 것입니다. 그들이 갖고 있는 오직 하나의 소망은 이 전능하신 분에게 자비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임시 거처인 심연 속으로 쫓겨 들어가는 것이 싫었고 예수께서 그들에게 영원한 형벌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사실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들은 바깥 “암흑” 속에 살기보다는 차라리 돼지의 몸속에서 살기를 원했습니다. 얼마나 비참한 습성입니까? 그들을 사람의 몸에서 쫓아내실 바에야 돼지의 몸속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 간청은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희망대로 만족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돼지 떼가 바다 속으로 달려가 빠져 죽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몸에 들어온 귀신들 때문에 돼지는 미쳐 날뛰었습니다. 그리하여 바다와 맞닿은 경사 쪽으로 달려 내려간 것입니다. 경사는 급하고 밑바닥은 너무 좁았기 때문에 미쳐 자기들의 동작을 제어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를 비난하기 위해서 회의론자들은 그가 이처럼 타인의 재산을 상실케 한 사건을 지적합니다. 어떤 질병이 가축들을 괴롭혔다고 해서 전능자를 책망할 수 있을까요? 모든 피조물은 “죽을 수밖에 없도록 태어난 것”입니다. 그 원리에 따르면 두 마리의 돼지가 죽은 것이나 2천 마리의 돼지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셨으니 땅과 “거기에 속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어떤 생물에게 죽음을 가져오게 하셨다고 해서 그 방법과 죽임을 당한 생물의 수를 갖고 그를 비난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이기 때문입니다.

성경 비평가들이 귀신의 존재를 부인한다고 해서 놀랄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진리를 믿는다고 하는 자들이 어떻게 귀신의 존재를 부인할 수 있는지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의원 되시는 주님은 제자들에게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병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라(마 10:8).”고 하셨습니다.

예수가 병을 고치실 때는 한 개인에게 말씀하셨지 질병을 향해서 말씀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중풍병자를 고치신 이야기가 여기에 해당합니다(마 9:1~8), (막 2:1~12), (눅 5:17~26). 예수는 가버나움의 어느 가정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거기에 참석한 사람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늦게 온 사람은 그에게 가까이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한 중풍병자가 친구 네 사람에게 들려왔습니다. 의사이신 예수께 가기 위해서는 지붕을 뚫고 그 속으로 환자를 내려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들의 믿음을 보시고 예수는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중풍병자에게 하신 예수의 말씀에 대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회의를 가졌습니다. 그가 이렇게 주장할 권리를 갖고 계신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하나님만이 죄를 사하실 수 있다고 주장할 뿐 예수가 하나님의 성육신인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는 병자에게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하심으로써 그의 권위를 입증하셨습니다. 그는 즉시 일어나서 침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들 앞에서 걸어 나갔습니다. 그들이 놀라서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라고 말한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중풍병자가 나은 것은 믿음의 직접적 결과가 아니라 그의 믿음 때문에 죄 용서를 받고 그 결과로 자연히 육체적 질병이 치료를 받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이비 “안찰사”들은 신약성경에 기록된 치유가 믿음에 근거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기도를 통해서 병을 고치려다 실패하면 병자의 믿음이 부족한 탓으로 돌리고 그 사람을 오히려 정죄합니다. 정신적 질환에 의해서 생겨난 기능장애는 간혹 “믿음이 있는 안찰사”들에 의해서 고쳐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이러한 범주에 의해 제한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예수가 고향사람들의 불신 때문에 거기서는 많은 능력을 행치 않으셨다고 할 때, 이것은 예수의 능력이 그들의 믿음에 의해 제한 받았다는 뜻이 아니라 그가 사람들에게 복을 베푸실 때 그들의 의사를 일방적으로 무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예수 당시 팔레스틴에서 가장 고치기 어려운 병은 문둥병이었습니다. 지금도 문둥병의 완치는 어려운 숙제로 남아 있습니다. 이 무서운 병도 예수는 다른 종류의 질병과 마찬가지로 쉽게 고치셨습니다. 의사인 누가는 한꺼번에 열 명의 문둥병자가 예수께 자비를 구한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눅 17:11~19). 다른 문둥병자를 그가 고쳐 주셨다는 소문을 듣고 온 그들은 다음과 같은 예수의 말씀을 듣고 실망한 듯 합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이것은 마치 “왜 너희들이 나에게 와서 그런 부탁을 하느냐? 제사장들에게 가서 의논해 보아라.”는 말씀처럼 들렸을지도 모릅니다. 예수의 분부대로 그들은 제사장을 만나러 갔습니다. 길을 갈 때에 자기들의 몸이 깨끗해진 것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과정은 “믿음을 주장하는 안찰사”의 경우와 현저하게 차이가 있습니다. 첫째, 고쳐진 병의 종류가 다르고 둘째, 그 병이 고쳐진 방법이 다릅니다.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이적을 관찰해 봅시다. 여러 사건이 기록되어 있으므로 어느 경우를 선택하든지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눈이 뜨여지기 전까지는 맹인의 말이 한마디도 언급되지 않은 사건을 요한은 기록하고 있습니다(요 9:1~34). 그것은 예수의 제자가 제시한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 베풀어진 이적이었습니다. 예수는 다만 진흙과 침을 섞어서 그의 눈에 바른 후 그에게 실로암에 가서 씻게 하셨습니다. 이 맹인은 그 말씀에 순종하여 즉시 시력을 회복하였습니다. 이때에 심리요법이 쓰이지 않았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그 사람은 자기의 시력을 회복하게 된 경위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그가 예수에 관해서 알고 있었던 것은 그의 이름뿐이었습니다.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그는 부연해서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니 보게 되었노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날 적부터 맹인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 이적을 부인하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고침을 받은 사람이 맹인이 아니라 그와 닮은 사람에 불과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주장이 실패로 돌아가자 고침을 받은 자에게 예수의 이적을 부정하는 거짓 증언을 종용했습니다. 다시 이러한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그들은 그 사람의 부모를 찾아가서 자기의 아들에 관한 이적 사건을 부인하라고 강요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만족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 부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가 우리 아들인 것과 소경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되어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저에게 물어보시오. 저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이것은 바리새인들이 이미 시도해 본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그의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가 행하신 이적 가운데 가장 놀라운 것은 죽은 자를 살리신 것입니다. 그가 이 땅에 계실 동안 몇 번이나 이런 이적을 베푸셨는지 알지 못합니다. 다만 기록에 의하면 세 번의 사건이 나타납니다. 공관복음서의 세 저자들은 그 중에 한 사건을 공통적으로 소개합니다(마 9:18~26), (막 5:21~43), (눅 8:41~56). 누가는 두 가지 사건(눅 7:11~17), (눅 8:41~56)을 기록했습니다. 한편 요한은 다른 저자들이 언급한 적이 없는 사건을 하나 더 기록했습니다. 요한이 기록한 사건의 사람은 죽어서 나흘 동안 무덤에 있었습니다. 그의 누이는 시체가 이미 썩은 것으로 믿고 무덤에서 돌문을 옮기는 일에 반대하였습니다. 예수는 무덤에서 돌문을 옮기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 때 무리들 앞에서 그는 아무 동작도 취하지 않고 큰 음성으로 죽은 자를 부르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그의 음성을 듣고 나사로는 밖으로 나왔습니다. 예수가 나사로의 이름을 부르신 이유는 다른 시체들은 일어나지 않게 하시기 위함인 듯 합니다.

그러면 이적의 목적과 의미는 무엇일까요? 용도가 목적을 결정하는 것이 보편적입니다. 이적이 발생한 다음에 일어난 상황이 이를 설명해 줍니다. 물이 포도주가 된 사건을 우리에게 알려준 후에 요한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믿음을 견지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의 이적이 더 필요했습니다. 예수가 폭풍을 잔잔케 하셨을 때 제자들은 그 “적은 믿음”이 강건해져서 외쳤습니다. “이는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바다와 바람도 그에게 복종하는가?” 예수가 “바다 위를 걸어서” 오셨을 때 제자들은 그를 배 안으로 영접하고 “진실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가 5천명을 먹이셨을 때 백성들이 말했습니다. “진실로 이는 세상에 오신 선지자이시다.” 거라사 촌에서 귀신의 군대(무리)를 돼지 속에 들어가게 하셨을 때 그의 마음은 두려움으로 가득 찼습니다. 귀신에게서 자유의 몸이 된 그는 온 생애를 통해서 주님이 그에게 하신 일을 전파하였습니다. 예수가 중풍병자를 고치셨을 때 사람들은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첫 번째 문둥병자가 고침을 받은 후에 그는 이 일을 널리 전하였고 그 소문은 일시에 퍼졌습니다. 누가는 “큰 무리들이 예수의 말씀을 듣고 병 고침을 얻으려고 그에게 왔다.”라고 말합니다. 주님이 맹인을 고쳐 주실 때 요한은 “주여, 내가 믿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절했다고 했습니다. 예수가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을 때 이를 본 많은 유대인들도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가 베푸신 이적들은 불쌍한 인간들에 대한 그의 자비로운 태도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적의 참된 목적은 요한복음서 저자가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0,31).” 어떤 나라가 외국에 대사를 보낼 때에는 그에게 전권을 부여함과 동시에 신임장을 휴대케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특수한 임무를 수행키 위해서 그의 일군을 이 땅에 보내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 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요 10:37,38).” 예수가 오시기 수백 년 전에 예언자들이 그의 활동을 알렸고 아무도 그에 관해서 헛된 환상을 갖지 않았습니다. 이사야는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사 35:5)”라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상기한다면 “오실 분이 당신이니이까 다른 이를 찾으리이까?” 하고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한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필요한 답변은 이것뿐입니다.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 11:3~5).”

예수가 승천하신 후에 사도들이 나가 복음을 두루 전파하자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막 16:20)\" 하게 하셨습니다. 누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행 2:43).“

“구원”은 처음으로 주님에 의해 성취되었습니다.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변된 보응을 받았거든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 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히 2:2-4).” 제1세기에는 이러한 이적들에 의해 말씀이 충분히 “견고하게” 되었고, 그 이적 사건들이 영감에 의해 성경에 기록되었습니다. 그 후로 이적은 그쳤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오늘날 이적을 보지 않는다 하더라고 믿음은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생겨나게 됩니다(롬 10:17). 오늘날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의 눈으로 이적을 목격하더라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페이지 설정에서 여백 크기 조절 후 인쇄하세요.
   

BCC 소개 | 뉴스레터 | 찾아오시는 길 | 개인정보 보호정책 | TOP ▲
BCC | 서울시 강서구 방화1동 180-14 7F | 비영리법인번호:109-82-03052 | Tel (02) 2662-0793, 2662-8081 | Fax (02) 2662-8082
Portions are Copyrighted 1964-2026 BCC. Contact us for more inform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