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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의 비유
  연구과 (예수의 생애와 교훈) - 6 과
“예수께서 저희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마가복음 2:2).”

예수는 어디에서 어떤 교훈을 가르치든지 말씀의 적절한 표현 방법을 늘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유대 땅 어느 시골에서 양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보실 때는 이렇게 말씀하습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 10:9).” 이는 분명 그가 장차 세우실 교회를 얘기하신 것입니다. 실제로 나오거나 들어가는 것은 회중이지 그리스도의 몸은 아닙니다. 그가 풀밭으로 양을 데리고 가는 목자를 보시며 이렇게 말씀하기도 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 10:11).”

팔레스틴에서는 목축업과 포도재배가 중요한 산업이었습니다. 이를 잘 아시는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어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요 15:5-6).” 그가 “아버지의 집”에서 준비할 처소에 관해서 제자들에게 강론하실 때 그들은 주가 어디로 가시며 어떻게 그 곳을 찾을 수 있을지 알지 못했습니다. 이때 예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일찍이 그는 바다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어부 시몬과 안드레를 부르실 때에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 4:19).”고 하셨습니다.

예수가 쓰신 강론의 형식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비유입니다. 이제 우리는 비유에 관해서 특별히 살펴보려고 합니다. 비유는 보기에는 단순해 보이지만 창작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예수는 진리를 나타내실 목적으로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비유(parable)”란 단어는 희랍어로 parabolee인데, 그것은 “…의 옆에 던지다”를 의미하는 para-ballein의 복합어입니다. 데이여는 이 단어를 “어떤 사물이 다른 사물과 병치(倂置)되는 것… 은유.”라고 정의하였습니다. 따라서 예수가 쓰신 비유는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사물과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사실들을 함께 병치시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사물을 이용함으로써 모르고 있던 사실들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예수가 한번은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꼬?(막 4:30)” 자신의 이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천국을 몇 가지 사물과 비교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저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시되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 하시더라(막 4:33-34).”

예수는 사람들이 알고 있던 사물과는 전혀 다른 어떤 세계를 소개하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영적 세계, 즉 “천국”입니다. 제자들은 정신적 왕국의 개념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가 아버지께로 돌아가신 후 위로부터 권능의 옷을 받아서 입기까지는 열두 제자들도 그것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예수는 제자들의 이해 능력에 따라서 점진적으로 가르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천국이 세워졌을 때 성령은 그들의 마음속에 모든 것을 밝혀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가 그들에게 하신 말씀이 이때야 비로소 분명해졌습니다. 천국사업이 시작되었을 때 예수의 말씀을 이해하기란 어려울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는 인간을 구제하시기 위해서 여러 가지 기관을 만드시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만으로 충분했습니다. 그것은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립니다. 어떤 하나의 용어만으로 그것을 적절하게 묘사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어떤 면을 강조하려면 선택한 용어에 의존하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왕으로, 온 세상을 영토로, 모든 신자들을 백성으로, 신약성경을 헌법으로 보면 그것은 하나의 왕국이 됩니다. 만일 그것을 세상에서 부름 받은 신자들의 회중으로 본다면 교회가 될 것입니다. 또 하나님을 아버지로 생각하고 모든 신자들은 그 자녀로 간주한다면 하나님의 가족이 될 것입니다. 만일 그것을 하나의 기관으로 보고 예수는 머리, 신자들은 각 지체가 되어서 그 맡은 바 직책을 수행한다면 몸이 됩니다. 이것을 묘사하는 데는 이 밖에도 여러 명칭이 있지만 모두가 본질적으로는 동일합니다. 이 모든 용어들은 하늘에 속해 있는 피로 사신 기관에 대해 적절한 표현을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예수는 진리를 나타내시기 위해 비유를 사용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도 비유를 쓰셨습니다. 이것은 궤변이 아닙니다. 진리를 알고자 하는 자들에게는 진리를 나타내셨으나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는 진리를 감추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진리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에게 진리가 주어졌을 때 외면해 버립니다. 예수가 비유를 통해서 진리를 감추신 것은 이러한 사람들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왜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하고 물었을 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마 13:10-15).” 백성들에게 진리에 대한 갈망이 있을 때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를 나타내셨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마 5:6).” 한편, 백성들이 거짓 진리를 믿으면서 그들의 양심을 달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언제나 그들의 행위를 허용하셨습니다. 그는 그들이 허위를 받아들인 행위에 대한 변명을 하도록 방임해 두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구원에 이르는 진리의 사랑을 거부한 자들에 관해서 바울은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 2:11,12).”고 말했습니다.

구약성경은 우리에게 몇 가지 실례를 보여줍니다. 발람은 하나님이 “가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도 불구하고 그가 받은 보수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저주하러 갔습니다(민 22:12). 그의 완강한 고집 때문에 하나님이 그에게 답변을 하셨으나 그는 이것을 그들에게 가서 자기에게 맡겨진 임무를 수행하라는 말씀으로 해석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여행을 저지하기 위해서 천사들을 보내시고 그가 탔던 나귀가 자기처럼 눈이 어둡지 않아서 세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게 해 주었는데도 여전히 거짓에 집념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습니까? 발람의 눈에 보인 것은 발락이 그에게 준 금과 은이 전부였습니다. 전도자들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는 없습니다. 발람이 생명의 건짐을 받고 또 “나는 죄를 지었나이다.” 하고 말을 한 후에도 그는 여전히 가고 싶어 했습니다. 그의 소원은 이루어졌습니다. 이번에는 “너의 길이 평탄치 못하리라.”는 경고를 받지 않았습니다. 지각 있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사실들을 직면하고도 여전히 자기의 고집을 버리지 못한 그의 행위를 놀랍게 여길 것입니다. 이것은 진리를 갈망하지 아니하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거짓을 추구한 인간의 좋은 예입니다(민 31:8).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십니다. 그러나 진리를 선택하지 않을 때 재난을 입게 되는 것은 언제나 인간입니다.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 모든 이성적 존재는 진리를 알 수 있는 능력을 가졌으므로 그것을 아는 것이 그들 자신의 의무입니다. 따라서 행위에 대한 책임도 그들 자신이 져야 합니다.

예수는 비유를 통해 사람들이 어떤 사실을 깨닫기도 전에 진실에 대한 사람들의 동의를 이끌어 내기도 하셨습니다. 그를 죽이려고 한 유대인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그들 자신의 행위에 대한 판단을 받게 되었습니다. 사람에게 양심이 남아있는 한 이것은 양심을 깨우치기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고난을 당하시던 마지막 주간의 화요일에 예수는 다음과 같은 비유로 그의 원수들을 심판하셨습니다. “다시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거기 즙 짜는 구유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실과 때가 가까우매 그 실과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저희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가로되 저희가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하고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어 쫓아 죽였느니라.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이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뇨? 저희가 말하되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실과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저희가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마 21:33-46).”

예수가 비유로 말씀하신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진리를 보존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은 철학적 설명보다는 이야기 형식을 더 잘 기억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의 비유들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율법과 복음에 관한 바울의 논증을 기억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요? 플라톤의 철학과 예수의 비유를 비교해 보십시오. 플라톤에 대해 들은 사람들이 많겠지만 실제로 그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 것입니다. 예수가 비유의 형식으로 말씀하신 이야기를 통해서 그의 교훈을 보존하실 수가 있었다는 것은 쉽게 간과할 일이 아닙니다.

성경학자들 가운데는 비유 속에서 예수가 의도하신 것 이상의 교훈을 찾으려다 종종 실수를 범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가장 본질적인 교훈을 놓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가 가르치신 비유에는 항상 어떤 중심적 교훈이 있습니다. 달란트의 비유처럼(마 25:14~30) 때로는 몇 가지의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기서 본래 의도한 교훈은 개인적 책임에 관한 것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이 비유를 통해서 마지막 심판의 때가 올 것과 충실하게 자기의 임무를 수행한 자는 상을 얻고 그렇지 아니한 자는 비록 “자기의 종들”일지라도 형벌을 주신다는 교훈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비유 가운데 지엽적인 문제에는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이것은 숨은 보화에 관한 비유를 통해서 잘 설명이 됩니다. 보화를 발견한 자가 그것을 다시 숨긴 후에 기쁨으로 가득 차서 그가 지닌 모든 재산을 팔아 그 돈으로 보화가 있는 밭을 샀습니다. 예수는 그 사람의 행위를 정당화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신 교훈은 천국을 소유하게 된 자의 “기쁨”에 관한 것입니다. 이 비유는 천국을 찾은 자의 기쁨이 어떠할지를 가르쳐 줍니다. 종종 이 교훈은 그 뒤에 나오는 다른 비유와 혼동이 되곤 합니다. 좋은 진주를 구하는 상인은 천국의 가치를 가르쳐 주는 비유입니다(마 13:44~46). 그 비유에서 “금은보화를 찾는 상인”은 진주의 가치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진귀한 진주를 발견했을 때 자기에게 있는 모든 보물을 기꺼이 팔아 그것을 산 것입니다. 그와 같은 대표적인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그가 선천적으로 상속받은 지상의 영화를 하나씩 열거한 후에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속에서 발견되려 함이라(빌 3:7-9).”

누룩과 겨자씨의 비유는 동일한 교훈을 가르칩니다(마 13:31-33). 이 비유는 각각 특별한 교훈을 제시합니다. 겨자씨의 비유는 작은 데서 커져 가는 천국의 성장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다니엘의 예언과도 일치합니다. “때에 철과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서져 여름 타작마당의 겨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었나이다(단 2:35).” 누룩의 비유는 천국의 성장 방법을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누룩이 소리 없이 신속히 퍼져나가듯 복음의 진리도 이처럼 누룩이 되어서 사회를 변화시킵니다. 전쟁의 소요나 무기의 요란한 소리 없이 하나님의 나라는 서서히 퍼져 나가는 것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두 비유와 곧잘 혼동이 되는 것이 자라나는 식물의 비유입니다(막 4:26~29).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발전에 관해서 가르칠 목적으로 쓴 것이 분명합니다. 수확할 때까지 모든 곡식은 다음의 다섯 단계가 필요합니다. (1) 땅에 심기 위한 곡식 낱알과 (2) 땅에 심어 (3) 부드러운 싹이 돋아나고, (4) 그 후에 이삭이 생기고, (5) 드디어 “곡식이 무르익는”데 이 때 비로소 낫으로 곡식을 거둡니다. 이러한 다섯 단계를 다음처럼 표현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즉 목적, 약속, 예언, 준비, 완성입니다. 위대한 제도는 모두가 이 다섯 단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어떤 사람의 마음속에 목적이 생겨나고, 둘째로는 여러 사람들이 그 목적에 관하여 들으며, 셋째로는 여러 사람들은 그 목적이 한 공동체에 미치는 의미에 관해서 논평을 가하고, 넷째로는 그 계획을 위한 작업이 실제로 시작되고, 다섯째로는 그 작업이 완성되어 실행됩니다. 천국도 꼭 이와 같습니다. 천국이 먼저 하나님의 경륜 속에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다음에 그는 인간들에게 천국을 약속하셨습니다. 다음에 예언자들이 그에 관한 글을 썼습니다. 천국의 실현을 위해서 실제적인 준비가 이루어졌습니다. 처음에는 그리스도의 선구자에 의해서, 다음에는 그리스도 자신이 친히 준비하셨습니다. 드디어는 성령이 그들에게 오셔서 그들과 함께 역사하심으로써 천국의 기능이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이 비유를 바로 이해한다면 성경의 어려운 구절이 쉽게 풀릴 것이고 천국의 실현에 관한 문제를 더 이상 논쟁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성경이 그리스도의 죽음 이전에 복음과 하늘나라에 관해서 언급을 하더라도 우리가 만일 그 특정한 단계를 기억한다면 그 성구는 쉽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고기 잡는 그물의 비유(마 13:47~50)는 자비론을 주장하는 신학자들을 곤란케 하고 있습니다. 어떤 자들은 그물이 좋고 나쁜 것을 가리지 않고 모든 종류의 고기를 잡지 않느냐고 합니다. 이러한 생각은 예수의 중생에 관한 교훈과 어긋납니다. 그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은 누구나 중생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 나라는 “모든 종류의 사람을 전부” 낚지는 않습니다. 비록 해변에 모여들기 전까지는 나쁠 수도 있지만, 일단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자는 누구나 똑같이 거듭나야 합니다. 인간은 능동적인 피조물인 까닭에 자기의 개성을 나쁜 데서 좋은 데로, 혹은 좋은 데서 나쁜 데로 바꿀 수가 있습니다. “낚다”는 용어는 희랍어 agreuo에서 나왔습니다. 리델스코트는 “잡다”, “취하다”라는 뜻으로 정의를 내렸습니다. 데이여는 그것을(야생동물 및 물고기들) “잡다”란 뜻으로 설명했습니다. 만일 예수가 하나님 나라는 선인과 악인을 모두 낚는다는 뜻으로 말씀하셨다면 그는 이 단어를 사용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희랍어 사전에서 “모이다”를 의미하는 단어인 sunnago를 쓰셨습니다. 유대인들의 “회당(synagogue)”이란 이름이 이 단어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그것은 회중이 모이는 장소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고기 잡는 그물의 유사점은 이러합니다. 해변에 그물을 내려 모든 종류의 고기를 낚은 다음, 좋은 고기는 잡고 나쁜 고기는 버리는 신중한 분류 작업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마지막 날도 이와 같습니다. 그 때에 악한 자는 내쫓고 선한 자는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케 하는 신중한 분류작업이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고기 잡는 그물의 비유와 가라지의 비유를(마 13:24-30), (마 37-43) 혼동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거듭난 사람으로 구성된 영적 세계입니다. 비록 세상 “안에” 있으나 그들은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말씀의 사역자들이 하늘나라의 씨를 파종하러 다니는 동안에 마귀의 자식들도 그들의 부패한 씨앗을 뿌리고 다닙니다. 예수가 강조하신 것은 나쁜 씨앗과 좋은 씨앗이 “함께 자란다”는 것입니다. 그는 여기서 이들을 분류하는 것이 어리석은 행위임을 아셨습니다. 이는 자신을 세상과 분리시키는 종파를 만들거나 수도원 등을 만들어 동떨어져 사는 것이 옳지 않음을 지적하는 것이지 그리스도인들을 낙심케 하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가라지의 비유가 기다림을 강조한다면 그물의 비유는 신중한 분류를 강조한다 할 것입니다.

부정직한 청지기의 비유에서 예수는 “돈을 좋아하고 그를 비웃는” 바리새인들을 가르치셨습니다(눅 16:14). 이것은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이것이 비유가 될 수 있다면)를 연상시킵니다(눅 16:19~31). 그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 16:13).” 우리가 이 비유에서 여러 교훈을 배울 수 있겠으나 그 중에서도 가장 중심적인 교훈을 잃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일군의 비유는 자신이 한 일 만큼의 대가를 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입니다(마 20:1~16). 죽기 직전에 신앙 고백을 하는 이들은 얼핏 희망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이들에게 일군의 비유는 위안이 될 것입니다. 예수의 비유를 들어 보십시오.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주인과 같으니, 저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또 제 삼 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저희가 가고, 제 육 시와 제 구 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제 십일 시에도 나가 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가로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느뇨? 가로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가로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제 십일 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저희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받은 후 집주인을 원망하여 가로되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마 20:1-16).”

마태복음 20장의 뒷부분에서 우리는 사도들이 주님께 먼저 불림을 받은 까닭에 나중에 그의 말씀을 듣고 따른 자들보다 더 큰 상을 받을 것으로 기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는 여기서 상급은 소명 받은 순위로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그 성실성이 좌우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11시에 고용된 사람은 장터에서 일자리를 얻기 위해 서있었습니다. 그들이 “너희는 왜 게으른 자들처럼 여기서 하루 종일 서성거리고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아무도 우리를 고용해 주는 자가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일자리가 생겼을 때 그들은 지체하지 않고 일터로 갔습니다. 예수는 이 비유에서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그의 가르침의 기본 전제입니다. 오늘날 복음을 듣는 모든 자들은 하나님의 초대를 받은 셈입니다(살전 2:12), (살후 2:14). 만일 그 부르심에 응하지 않는다면 그것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의 모든 비유를 다 살펴보지는 못했지만 열 처녀에 대한 비유를 하나 더 들겠습니다(마 25:1~13). 이 비유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준비성입니다. 우리가 단지 등불을 켜기만 하고 그에 관해 잊어버린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는 등불이 타도록 계속 지켜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가 부르실 때에 우리들이 아무런 준비도 하고 있지 않는다면 그 때는 이미 어떻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이 비유의 결론은 다음의 성경 구절 속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마 2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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