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지혜는 그의 생활철학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성격을 한 눈에 통찰하는 직관력을 갖고 계셨습니다. 어떤 인물인지 알아보기 위해 사람을 여러모로 살펴야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빌립이 모세의 율법과 선지서에 기록된 바로 그 사람을 만났다고 했을 때 나다나엘은 “와서 보라”는 말에 동의하면서도 예수에 대한 빌립의 평가가 어떠한지를 물었습니다. 예수는 그에게 오는 나다나엘을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그러자 나다나엘이 물었습니다.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는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고 답하셨습니다. 그의 놀라운 통찰력이 너무나 특별하고 분명했으므로 나다나엘은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요 1:45-51) 라고 탄성을 질렀습니다.
예수가 사마리아 여인에게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라고 말씀하시자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라고 여인이 대답했습니다. 예수는 “네 말이 참되도다.”라고 하시고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다.” 그 여인은 자기의 죄를 부인해도 소용이 없음을 깨닫고 고백합니다.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그러고는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라고 말했습니다. 그 일 때문에 수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모여들어 예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니라.”고 하였습니다(요 4:16-41).
예수는 사람들의 성격을 꿰뚫어 보셨을 뿐만 아니라 마음속에 있는 생각까지도 아셨습니다. 가버나움으로 돌아오는 길에 제자들은 누가 제일 큰 자냐 하는 문제로 논쟁을 했습니다. 아마도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의 변화하시는 장면을 목격할 만큼 총애를 받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이런 논쟁이 벌어진 듯 합니다. 집에 왔을 때 예수께서 물으셨습니다. “너희가 노중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그들은 대답을 못하고 침묵만 지켰습니다(막 9:33). 그는 억지로 대답을 강요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미 그 이유를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한 어린아이를 그들 앞에 세우시면서 겸손을 가르치셨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
예수가 중풍병자를 고치셨을 때 거기에 있던 서기관들은 속으로 생각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한 분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예수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의논하느냐?”고 말씀 하셨습니다. 서기관들은 그들의 죄를 부인하지 못했습니다(막 2:5-12).
예수가 바리새인과 함께 식사하실 때 있었던 일입니다. 타락한 여인이 와서 눈물로 예수의 발을 씻고 머리털로 닦았습니다.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이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였다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예수는 육성으로 들으신 것처럼 바리새인의 생각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한 여인의 행위가 의롭게 된 비유를 말씀하셨는데, 바리새인들도 이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눅 7:36-50).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 대적자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를 잡으려 하였습니다. 그 때마다 예수는 그들의 간교한 술책을 밝혀내셨습니다. 이혼에 관한 그의 교훈이 모세의 가르침과 모순이 된다고 생각하고 그들은 예수로 하여금 모세를 부인하거나 그의 교훈을 취소하라고 강요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예수)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갈 3:19).”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7-18).” 예수는 율법과 예언을 성취(완성)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율법시대의 모든 희생제물은 못 박히신 예수의 그림자였습니다. 모든 제사는 “만인의 죄를 걸머지신” 그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예수의 대적자들은 그가 “율법의 완성”이심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롬 10:4). 오늘날에도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예수가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고 말씀하셨으므로 바리새인들은 이혼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을 배척할 근거를 찾았다고 생각했습니다(마 5:32). 그들은 와서 어느 경우에 아내를 버리는 것이 합당하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는 그들의 간계에 빠지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바리새인들이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증서를 주어서 내어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이 질문을 통해 그들은 예수가 이혼 문제에 관해 전에 했던 말을 확인해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께서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고 하셨을 때 진퇴양난에 빠져 버렸습니다(마 19:3-9).
요한복음 8:3-11에서 우리는 그들이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애쓴 흔적을 뚜렷하게 볼 수 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예수를 시험하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그들은 예수가 모세의 율법을 부인하거나 아니면 자비에 관해서 가르치신 그의 교훈을 취소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확신했습니다. 예수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대답으로 그들이 만든 함정 속에 그들 스스로가 빠지게 하셨습니다. 이 땅에 계실 동안 예수는 모세의 율법을 굴레로 보셨습니다. 율법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런 자를 죽임에는 증인이 먼저 그에게 손을 댄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댈지니라. 너는 이와 같이 하여 너희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신 17:7).” 예수는 율법을 존중하셨으나 그들이 간과한 조건 하나를 거기에 추가하셨습니다. 그들 자신이 범하고 있는 율법을 타인이 범했다고 해서 그를 정죄한다면 이것은 그들 자신을 정죄해 버리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여기서 맹목적으로 율법을 지킨다고 떠드는 자들의 우매함이 드러납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교훈을 트집 잡으려고 헤롯당과 합세하였습니다(마 22:15-22). 그 음모가 탄로 날 것이 두려워 자신이 의롭다고 자처하는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그는 교활하게 예수께 접근하였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 하심이니이다.” 음모를 숨기려고 화제를 엉뚱한 곳으로 돌린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보낸 첩자들은 이제 예수를 함정에 빠트리려는 의도가 감추어졌으리라 생각하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그 당시 조세는 유대인들에게는 못마땅한 일이었습니다. 세금 징수원은 경멸의 대상이었습니다. 예수는 한때 세금 징수원과 식사를 나누었다고 해서 심한 비난을 당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지상 왕국의 실현을 기다리는 혁명가로 알았습니다. 따라서 예수가 조세에 대하여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첩자들은 예수가 성전 안에서 무리들에게 강론하고 계실 때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가 만일 긍정적으로 대답하면 이틀 전에 그를 왕으로 추대하려던 군중들이 실망하여 모두 그를 떠나 버릴 것입니다. 그들은 바로 이런 결과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군중들이 그를 비난하게 된다면 더 이상 예수로 인해 신경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설령 그들이 예수를 정죄하더라도 군중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가 긍정적인 대답만 하신다면 무리들은 그를 불신하게 될 뿐만 아니라 왕으로 추대하려던 생각마저 취소해 버릴 것입니다. 반대로 예수가 부정적으로 대답한다면 로마 통치에 대한 문제가 다시 불거질 것입니다. 20여 년 전 갈릴리의 유다가 세금 내는 것을 반대하여 민중들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로마 관헌에게 사형을 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유대인들의 가슴속에는 증오심이 불타고 있었습니다. 헤롯 왕을 섬기는 헤롯당들은 예수가 세금을 반대하기만 하면 그를 체포하려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 두 적대적인 당파들이 공모했다는 것은 그들이 얼마나 예수를 시기하고 질투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렇게 종교적 당파와 정치적 선동세력이 악마적으로 합세하게 되면 목적 달성을 위해서 수단의 정당성 여부를 가리지 않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한 순간도 이들의 간교한 음모에 속아 넘어 가시지 않았습니다. 마치 그 당원 가운데 하나라도 된 것처럼 그들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꿰뚫어 보셨습니다. 그들의 표리부동을 간파하시고 그 책략에서 능히 빠져 나올 수 있었던 그의 지혜를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라고 말 할 수 있을까요? 그가 역경에서 빠져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는 그들의 악랄한 음모에서 빠져 나오기 위한 대비책을 미리부터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그들의 계획이 아무리 비상하더라도 예수가 공생애의 첫출발을 하시기 직전에 그에게 찾아온 마귀의 수법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속을 꿰뚫어 보시는 듯한 눈초리로 그는 질문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예수가 그들의 음모를 미리부터 통찰하고 계셨음을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셋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 이 동전에는 가이사의 초상과 글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성 아우구스도의 아들 아우구스도 디베랴 가이사.” 그 동전을 들어 보이신 후에 예수는 반문하셨습니다. “이 형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그는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 아셨습니다. 이 질문은 단지 그들의 음모를 지적하기 위해서 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대답하였습니다.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예수는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셨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이 대답은 그들의 음모를 완전히 좌절시키고 말았습니다.
각 나라는 그들만의 고유한 동전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데나리온은 유대가 그들의 속국이라는 것을 가리키는 증서와 같았습니다. 그들이 로마의 화폐를 쓰는 한, 그들이 로마 정부에 종속되어 있을 뿐 아니라 거기에 충성을 바치겠다고 시인하는 표시가 됩니다. 헤롯당원들은 예수의 대답에 만족하였습니다. 바리새파의 첩자들은 아무런 반박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경청하던 자들은 그 대답에서 트집 잡을 만한 근거를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라는 말을 덧붙이심으로써 그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셨을 뿐만 아니라 공모자들을 꼼짝 못하게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이히 여겼다.”고 해서 놀라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신 예수의 말씀을 주목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으나 매주 하루씩은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대신 그 하루를 하나님께 바쳐서 예배드리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임무가 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이 물러간 후에,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교묘한 질문을 던졌습니다(마 22:23-33). 그들이 여기서 예로 들었던 이야기가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말 가운데는 예수를 함정에 빠트리려는 의도가 깔렸던 듯 합니다. 그들은 한 여인에게 장가 든 일곱 형제의 예를 설명한 후 질문했습니다.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사두개인은 부활과 천사와 영의 존재를 부인하는 자들임을 기억해 두십시오(행 23:8). 아마 그들은 이 문제로 바리새인들과 수없이 논쟁하였을 것입니다. 그들이 “풀 수 없는“ 질문에 답하시기 전에 예수는 그들의 간교한 술책을 먼저 밝혀내셨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모세의 오경만을 권위 있는 경전으로 신봉하였는데 예수는 이를 이용하셨습니다.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 하였도다.” 그들은 두 가지 함정에 빠졌습니다. 우선, 자신들이 신봉하는 성경에 대하여 무식했습니다. 예수는 모세가 불타는 떨기나무에 접근했을 때 하나님이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출 3:6).”고 하신 말씀을 상기시키셨습니다. 이 세 족장들은 오래 전에 죽었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지적하셨습니다. 이 논증에서 내린 그의 결론은 반박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즉, 인간의 일부 속성은 육체가 죽은 후에도 여전히 살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두개인들의 주장대로 인간에게 만일 영이 없다면 그들의 육체가 죽을 때 아무 것도 아닌 비존재가 되어버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셨을 때 이것은 그가 “비존재”의 하나님이시라는 주장과 다름이 없습니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이런 미묘한 일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다루시는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조잡한 추리력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어 예수는 사두개인들의 낡아빠진 질문에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의 대답은 무리들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특히 “선생이여, 말씀이 옳으니이다.”라고 말한 서기관들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큰 승리였습니다. 예수는 그의 논리를 전개하심에 있어서 궁극적인 결론을 내리실 필요도 없었습니다. 사람이 죽은 후에도 영은 살아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심으로써 부활의 문제는 해결된 셈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자들이 어떻게 몸이 죽은 후에도 영은 살아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이상한 일은 부활을 믿는 자들도 여전히 사두개인들이 제시했던 “부활 때에”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는 문제를 풀려고 애쓰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수의 설명은 우리의 사고방식과는 너무나 판이해서 우리의 유한한 생각이 범주가 인간관계의 영역을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그 의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를 믿는 자라면 그가 하신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여야할 것입니다.
여전히 자신들의 패배를 인정치 않던 바리새인들은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듣고” 한 율법사를 예수에게 보내 그를 시험하게 하였습니다(마 22:34-40). 그는 예수께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막 12:28)” 마태는 그것을 “가장 큰 계명”으로 표현했습니다. 율법에 기록된 계명은 600조항이 넘는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도 예수가 하신 것처럼 이 질문에 완전무결한 답변을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예수는 넘치는 확신으로 대답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한걸음 더 나아가 예수는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예수는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반복화법을 사용하셨습니다. 첫째 계명은 모든 형태의 우상을 금지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하나님께 범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항상 그 상대를 기쁘게 하기위해 노력하지 마음을 상하게 하려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둘째 계명은 첫째 것과 너무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분리할 수가 없습니다. 사실상 둘째 계명은 첫째 계명의 당연한 귀결입니다. 인간은 자기의 이웃을 사랑치 않고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이 영민한 율법사는 예수의 답변에 완전히 설복당하고 말았습니다. “그 날부터 감히 묻는 자가 없었다.”는 것은 그다지 놀랄 일이 아닐 것입니다.
예수가 자기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온갖 음모를 물리치신 뒤에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마 22:41-46)” 예수가 그리스도이신 줄 알지 못하고 그들은 경전의 가르침대로 “다윗의 자손이니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것은 부분적으로만 옳은 대답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다윗의 자손이신 까닭입니다. 예수는 그들에게 대답을 더 요구하셨습니다. “그러면 다윗이 어떻게 그를 주라 칭하였겠느냐?”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그 당시 유대인들은 문제를 한 단면밖에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곤경에 처한 그들은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이 모든 시험을 물리치신 바로 그 날, 예수를 굴복시키려는 또 다른 시도가 있었습니다. 그가 두 번째로 성전을 깨끗케 하신 다음 날,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장로들이 득의만면해서 백성들을 가르치고 계시는 예수께 물었습니다. “당신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들을 하시는지 우리에게 말씀해 주소서.” 그리고 “당신께 이런 권세를 주신 이는 누구니이까?” 이 땅에 계실 때 예수는 제사장이 아니셨습니다(히 8:4). 그는 제사장의 가계에 속하신 적도 없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가 성전 예배를 규제할 권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에서는 그를 자칭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인물로 간주했습니다. 예수는 분명한 어조로 그들에게 반격을 가하셨습니다.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이것은 참으로 적절한 도전이었습니다. 많은 백성들이 이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마 21:23-27)” 이것은 그들이 던진 질문의 논리적 귀결이었습니다. 예수가 세례 받으실 때 요한은 그를 증거 했습니다. 따라서 산헤드린이 요한의 세례를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것으로 인정한다면 예수의 권위를 재확인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요한의 세례를 부인한다면 예수에게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라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입니다. 예수는 그들이 그렇게 부인하지는 못할 것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은 궁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민했습니다. 한동안 대답을 궁리한 끝에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그들은 이렇게 말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책략이 모두 실패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 하여.” 그들은 그의 질문에 어떠한 대답도 할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진퇴양난의 궁지에서 빠져 나올 것만 생각했지 무엇이 진리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간악한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그렇다면 이처럼 부정직한 사람들에게 예수의 권위 문제를 논의하도록 허용할 까닭이 있겠습니까?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이러한 몇 가지 실례를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예수의 탁월한 지혜를 설명하기에는 충분할 것입니다. 예수의 적대자들은 그를 한 번도 넘어뜨릴 수 없었습니다. 그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서 사용한 그들의 기만적인 수법이 예수에게는 한 권의 펼쳐진 책처럼 명료했습니다. 그들은 예수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한 번도 만들어 내지 못했습니다. 한 번도 그를 자극시켜 과격한 언동을 불러일으킬 수 없었습니다. 이와 반대로 예수는 그들의 교묘한 술책을 낱낱이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지능적으로 잘 꾸며지거나 그 저의가 잘 감추어져 있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그들이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쉽게 만들어 던지기도 하셨습니다. 그들의 저속한 행위를 지적하는 그의 능력이 그들을 너무나 굴욕적으로 만들어 결국 이것이 예수의 죽음을 가져오게 한 큰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진실로 예수는 인간 이상이셨고 지금도 그러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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