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예수의 지혜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젠 그가 인간에게 행하신 능력을 관찰해 보겠습니다. 유년기를 지나 12살 때 예수는 “성전에서 선생들 중에 앉으사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듣는 자가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기더라(눅 2:46).”고 했습니다. 이 일화는 별로 중요하지 않게 보일 수도 있지만 예수가 어릴 때부터 끼친 영향을 잘 설명해 줍니다. 그 후 18년 동안 여러 가지 흥미 있는 사건들이 많이 발생했겠지만 복음서는 그에 관해서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성인이 되신 후에 우리가 처음 보는 장면은 그의 세례입니다. 담력이 세고 과감한 성격의 요한은 예수께 반문했습니다. “내가 당신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는 사람들을 제자로 부르기 위해 매우 특이한 방법으로 그의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갈릴리 해변을 거니시다가 그물을 던지고 있는 성급한 성격의 베드로와 그의 동생 안드레를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요한복음 1:13~42를 보면 이것이 그들의 첫 만남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 예수가 처음 그들을 보신지 약 1년이 지난 후였을 것입니다. 그 일 년 동안 몇 차례 더 만나셨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이 성구는 사람들에게 행사하신 그의 권능을 보여줍니다.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 그 부친 세베대와 한가지로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저희가 곧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예수는 야고보와 요한도 이와 같이 부르셨습니다(마 4:18-22).
예수가 마태를 부르셨을 때, 그는 “세관에 앉아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는 “게으른 자”를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부지런한 자를 불러 제자를 삼으셨습니다. 마태에게 그는 단순히 “나를 따르라.”고만 하셨습니다. 마태가 이전에 예수를 만난 적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경멸의 대상이었던 세리가 즉시 자신의 일터를 떠나서 그를 따랐다고 하는 사실은 흥미롭습니다. 그는 제일 먼저 예수를 자기 집에 초대해서 식사를 대접하였습니다. 거기에 함께 참석하였던 세리와 죄인들은 모두 환희에 가득 찼습니다(마 9:9-11).
예수의 능력은 그의 몇몇 친구들만 사로잡은 것이 아닙니다. 그의 능력은 모든 사람들, 심지어 사회에서 낙오자로 간주되는 사람들에게까지도 미쳤습니다. 우리는 예수가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을 때에 향유를 담은 옥합을 갖고 와 눈물로 예수의 발을 적시며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 맞추며 향유를 붓던 창녀를 알고 있습니다(눅 7:36-38). 그는 사회에서 버림 받고 냉대 받는 불쌍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재물이 많아서 구태여 남의 호감을 얻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는 사람들에게도 그의 능력을 행사하셨습니다. 예를 들어서 부자 삭개오는 예수의 모습을 보기 위해 나무 위로 기어올랐습니다. “예수가 우러러 보시고,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눅 19:1-10).”고 하셨을 때 그의 놀라움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는 “급히 내려와서” 기쁨으로 예수를 맞이하였습니다.
그를 따르는 큰 무리들에게 능력을 행사하신 예도 수없이 많습니다. 그가 공적 활동을 시작하신 첫 해, 너무나 많은 무리들이 운집해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여전히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에게 나아왔습니다(막 1:45). 며칠 후에 - 아마 몇 주 후에 - 예수는 베드로의 가정을 조용히 방문하시려고 가버나움에 다시 들어가셨습니다. 그러나 곧 그가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퍼지자 운신하기 어려울 정도로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막 2:1,2). 몇 달 뒤, 그가 다시 동네에 돌아오자 많은 무리들이 그의 교훈을 듣기 위해서 찾아왔습니다. 이 때 무리들의 수가 너무 많아서 그는 바다 위에 있는 배에 올라가 앉으셔서 말씀을 가르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마 13:1).
사람들을 사로잡는 그의 능력은 무리를 떠나 다른 곳으로 가실 때조차 적지 않은 무리가 따랐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음식이 떨어지고 몸이 고달파도 그들은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피곤에 지쳤을 때 그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깐 쉬어라.” 마가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쌔(막 6:31,32).” 그러나 예수는 이런 방식으로는 무리들을 떠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저희인 줄 알고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 곳에 달려와 저희보다 먼저 갔기” 때문입니다. 배가 게네사렛 건너편 언덕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거기서 예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 때 거기에 모인 무리들의 수는 장정만 5천 명으로 추산됩니다. 만일 부녀자까지 모두 합친다면 2만 명이 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큰 무리”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는 날이 저물 때까지 가르치신 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그 많은 무리들을 먹이셨습니다. 그들을 먹이시기 전에 저녁이 될 때까지 가르치신 것을 주목해 보십시오. 오늘날 전도자들 가운데 청중 앞에서 1시간 이상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이 때에 무리들은 예수를 억지로 왕으로 모시려고 하였습니다(요 6:15). 그러한 무리들을 해산시키기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유대의 통치자들이 그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게 된 것은 이러한 그의 능력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의 능력이 증가하는 것과 반대로 그들 자신의 능력은 감소해 가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만일 그를 제거해 버리지 않으면 자신들의 권위가 와해되고 말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얼마나 우매한 일입니까! 이렇게 해서 예수를 죽이려는 시도는 점점 그 절정에 다다르고 있었습니다.
그를 따르던 무리들을 피하기 위해서 예수는 며칠 동안 베니게에 가서 머무셨습니다. 그러나 그가 돌아오자 따르는 사람들이 여전히 열광적으로 예수를 맞이했습니다. 부녀자를 제외하고도 4천 명이나 되는 장정들이 그에게 몰려온 사실을 마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즈음에 또 큰 무리가 있어 먹을 것이 없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막 8:1,2).”
유대 통치자들이 예수를 싫어했지만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몇 달 전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것을 보고 수많은 유대인들은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의 영향력이 너무나 커서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공회를 모으고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요 11:45-48). 이 같은 열광적인 추종은 그의 수난주간이 시작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처형되기 전 그는 예루살렘에 승리의 입성을 하셨습니다. 무리들은 이제 예수의 때가 왔으므로 그가 왕권을 잡으시고 이스라엘의 주권을 회복해 주시리라 믿었습니다. 예수가 입성하실 때, 그의 왕권을 기대하던 수많은 인파들이 겉옷과 나뭇가지를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외쳤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그를 환영하는 사람들의 표현도 각양각색이었습니다. 그것은 거대한 개선행진과도 같았습니다. 바리새인 가운데 있던 통치자들은 예수에 대한 환호성을 보고 들은 후에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없다. 보라!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요 12:19).”
그러나 예수는 단순히 그를 찬양하며 따르는 사람들만을 만드신 것은 아닙니다. 그의 가르침과 사명을 잘 모르거나 무관심한 사람들에게도 예수는 큰 영향을 끼치셨습니다. 예수가 시대의 신기원을 일으킨 산상수훈을 가르치실 때 그는 그때까지 전승되어 오던 율법의 벽을 뛰어 넘는 금자탑을 세우셨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교훈을 비판하는 대신 그 교훈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의 가르침에는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례 받으시고 몇 개월 후에 예수는 처음으로 성전을 깨끗이 청소하셨습니다. 그는 여간해서 공중 앞에 나타나시는 일이 없었습니다. 이때만 해도 그에게는 한 사람의 추종자도 없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유월절을 맞이하신 예수는 혼자 성전에 들어가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과 돈 바꾸는 사람들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셨습니다. 비둘기를 파는 사람도 내어 쫓으시면서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요 2:14-16). 유대인들은 그의 대담한 행위에 너무나 당황하여 그들의 수입 근원이 무너지는 데도 불구하고 사태를 관망만 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고 물어 볼 따름이었습니다. 이 질문에 그는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의 대답은 어려운 수수께끼 같았습니다. 그들은 그가 헤롯의 큰 신전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이 알기 어려운 대답은 그가 세상에 오신 목적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는 아무런 해도 받지 않고 성전을 나오셨습니다.
복음서에서 특히 흥미로운 사건은 예수살렘 입성을 위해 어린 나귀를 가져오게 하신 일입니다(마 21:1-7), (막 11:1-7), (눅 19:29-35). 그는 제자들과 함께 베다니로 가셨습니다. 두 제자를 마을로 보내시며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를 보게 될 터이니 풀어서 끌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는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그들이 나귀 새끼를 풀고 있을 때 주인이 나타나서 “왜 나귀 새끼를 푸느냐?”고 물었습니다. 예수가 가르쳐 주신대로 대답을 하였더니 주인은 제자들이 나귀새끼를 끌고 가게끔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나귀 새끼의 주인이 예수의 제자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 여부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들의 주장도 단지 추측에 불과합니다. 설령 그가 예수의 제자였다고 하더라도 그 나귀를 가져오시는 방법은 특이할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행사하시는 예수의 능력을 엿볼 수 있게 해줍니다. 이 동물을 사용하시기 위해서 미리 주인과 약속을 하셨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주인은 제자들이 나귀새끼를 풀려고 할 때 왜 이를 제지했을까요? 만일 예수가 나귀새끼를 쓰시기 위해 약속을 해두셨다면 그는 제자들이 나귀새끼를 풀고 있는 까닭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그의 초자연적인 지혜로 나귀새끼가 있는 곳을 아셨고 비록 제자들의 입을 통해서이긴 하지만 단지 그의 말 한 마디가 주인으로 하여금 제자들이 나귀새끼를 끌고 가게끔 했다고 보아야 이 사건에 대한 올바른 설명일 될 것입니다.
예수가 법정에 출두했을 때 본디오 빌라도까지도 경외감을 느꼈습니다. 그는 유대인 폭도들을 달래어서 예수를 방면시켜 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요구하는 것은 예수를 사형에 처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예수를 심문하면서 이 로마의 통치자는 냉정해지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이 죄수는 시종일관 침묵을 지켰습니다. 빌라도는 “내게 말하지 아니 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하며 예수의 대답을 재촉했습니다. 예수는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다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말을 듣고 빌라도는 다시 한번 그를 놓아주려고 하였습니다(요 19:10,11). 그러나 그의 노력도 소용없이 오히려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고 말하였습니다(마 27:24).
예수의 원수들까지도 그의 말씀과 행동에 크게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날카로운 질책으로 원수들의 마음에 두려움을 갖게 하셨습니다.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 장막절 때입니다. 산헤드린은 그를 잡아 죽이려는 계책을 꾸미고 있었습니다. 예수는 그들의 음모를 아셨습니다. 그래서 드러내지 않고 비밀리에 조용히 올라가셨습니다. 그들이 장막절 때에 예수를 찾지 못하자 무리 가운데 예수에 대한 수군거림이 많아 혹은 좋은 사람이라 하며 혹은 아니라 무리를 미혹하게 한다 하나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므로 드러나게 말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신” 사실입니다(요 7:10-14).
유대인들이 예수를 미워하게 된 동기는 점점 높아만 가는 그의 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를 반대하는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어둘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내세운 이유는 예수의 교훈이 모세의 율법과 모순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는 그들의 도전에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셨습니다.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그리고는 그들 자신이 범한 이율배반 한 가지를 지적하셨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이에 무리는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백성 가운데 “몇몇 사람들만이” 그를 죽이려고 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죽이려고 한 그 “소수의 사람들”이란 예수와 논쟁을 하고 누가 당신을 죽이려고 하느냐고 반문한 그들 자신이었습니다. 예수는 그들의 거짓 주장에 속지 않으셨습니다.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루살렘 사람 중에서 혹이 말하되, 이는 저희가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 보라, 드러나게 말하되 저희가 아무 말도 아니하는 도다. 당국자들은 이 사람을 참으로 그리스도인 줄 알았는가?(요 7:15-26)”
예수가 무리들을 공공연하게 가르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고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하속들을 시켜서 그를 잡아오게 했습니다. 하속들이 예수를 잡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오자 그들은 “어찌하여 잡아오지 아니하였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하속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대답을 은근히 바랬을 것입니다. “그는 숨어버렸습니다.” “그는 도망 쳤습니다.” “주위의 많은 군중들 때문에 그를 잡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속들의 대답은 실망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이런 고백을 하게 했을까요? 그것은 아마 그의 남자다운 풍모와 힘 있는 음성, 위엄이 깃든 태도, 그들의 음모와 궤변을 곧 알아낼 수 있는 그의 능력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그들로 하여금 경외와 찬탄을 불러일으키고 결국 그를 잡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이것이 다만 일시적인 호감에 불과하며 하속들이 그에게 속임을 당한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들은 하속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아마 그들은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나이다.”라는 대답의 깊은 뜻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요 7:45-47).
한동안 예수는 성전에서 논쟁을 계속하셨습니다. 그는 자기의 메시아 직에 비판을 가하는 자들과 열띤 논쟁을 하신 후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느니라(요 8:42-44).” 이런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그의 초인적인 면모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수난 주간 때, 예수는 다시 성전을 깨끗케 하셨습니다. 그는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 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 도다(마21:12,13).” 이 사건은 그를 죽여 없애려고 음모를 꾸미던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의 분노를 사게 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은 예수를 두려워해서 감히 손을 대지 못했습니다.
다음 날 예수의 신랄한 질책은 그 절정에 달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승리의 입성을 하시기 전에 자기의 때가 온 것을 아셨습니다. 그는 유대교 지도자들의 종교적 부패상을 격렬하게 지적하고 그들을 정죄하셨습니다. 그 날 밤 예수는 그들의 잔인한 음모와 행위의 표리부동성을 낱낱이 드러내신 후 그들의 사악한 행위와 동기를 정죄하셨습니다. 악당들의 정체가 폭로되고 숨겨져 있던 진상이 드러나자 결국 그들은 폭력에 호소하게 됩니다. 첫 순교자였던 스데반도 이와 같은 악당들의 희생자였습니다.
서기관, 바리새인, 사두개인과 헤롯당들이 예수를 함정에 빠트리려고 결탁하였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예수는 그 모든 지도자들에게 신랄한 질책을 퍼부으셨습니다. 역사상 그와 비교될 만한 사건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먼저 그는 무리들에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주의 시키셨습니다.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마 23:1-7).” 예수는 원한으로 가득 차 있는 그의 대적자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은 말씀을 계속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화 있을진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우맹이요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금이냐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예물이냐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그러므로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 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요 또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 도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 됨을 스스로 증거함이로다.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 23:13-33)
이처럼 불꽃 튀는 예수의 말씀과 대담하고 권위 있는 태도는 그들을 공포에 떨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너무나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라 했기 때문에 예수는 아무런 해도 받지 않고 위기를 면한 것입니다. 이전에 그를 잡으러 간 하속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들도 예수처럼 말한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속들이 와서 예수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자의로 몸을 내맡기셨기 때문입니다. 유다가 그의 스승을 가리키기도 전에 그들은 미리부터 안절부절 못하였습니다. 예수가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고 묻자 그들은 “나사렛 예수”라고 대답했습니다. 그가 다시 “내가 그이니라.”고 하셨을 때 물러가 땅에 엎드려졌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인간들에게 행하신 그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체포당하신 일은 불가항력의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성부가 맡기신 임무를 다 마치고 그는 “만민의 죄를 구속”하기 위해서 자기를 그 죄 값으로 지불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는 다시 물으셨습니다.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그들이 다시 “나사렛 예수”라고 대답했을 때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내로라 하였으니(요 18:4-18).” 우리에게는 인간에게 행사하신 그의 초인적 능력을 충분히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예수는 지금도 인간에게 그의 능력을 행사하고 계십니다. 그에게 전적으로 무관심할 수 없게 만드십니다. 무신론자들까지도 그를 예찬하고 그의 생애와 교훈에 매혹당하고 있습니다. 온 세계가 어느 정도는 그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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