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많은 약속을 하지는 않으셨지만 그의 약속들에는 모두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인간적인 면에서 본다면 실현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것도 있습니다. 약속 중에는 축복보다는 위협같이 느껴지는 것도 있습니다.
그는 가끔 하늘나라의 설립에 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공생애 초기에 예수는 제자들에게 이런 기도를 가르치셨습니다. “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시며.”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불과 몇 달 전에는 열두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막 9:1).” 그가 잡히시던 날 밤 만찬을 베푸신 후에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눅 22:29).” 비록 다른 사람들은 그가 말씀하신 “나라”의 뜻을 정확히 포착하지 못했으나 예수는 그것을 분명하게 알고 계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던 날 그는 총독 빌라도 앞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요 18:36).” 이 말씀을 분명히 이해한다면 하늘나라에 관한 다른 교훈까지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들과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그들에게 하늘나라와 “안식 후 첫날에” 그의 나라에서 만찬에 참예할 수 있는 특권을 주시겠다는 예수의 약속을 실현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행 20:7). 골로새서에서 바울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신” 아버지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골 1:13). 계시록의 저자는 “나 요한은 너희의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계 1:9).”라고 하였습니다. 지상 왕국을 기대했던 사도들은 왕국에 대한 관점을 바꾸어 주님의 영적 주권에 완전히 복종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죽기 전에” 왕국이 세워지리라는 예수의 약속이 교회를 통해 실현되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성령은 그가 우리에게 주신 약속 가운데 가장 특별한 것입니다. 이에 대한 그릇된 이해가 많으므로 살펴보겠습니다. 잡히시던 날 밤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원수들에게 잡혀가게 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예수는 그들을 격려하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6-17).” 만약 보혜사가 “언제” 오셔서 “무엇”을 하실 것이며 “왜” 그 일을 하시는지 예수께서 친히 설명을 해주신다면 누구나 그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그의 설명을 조심스럽게 경청해 보겠습니다.
그는 성령의 임재시기에 관해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예수가 떠나신 후에 성령이 오시리라는 이 말씀을 가지고는 그 시기를 분명히 알 수 없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더 들어보겠습니다. “그(보혜사)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 16:7-8).”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 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요 16:13,14).”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내가 아버지께 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 15:26).”
우선 이 말씀들을 요약해서 성령이 오셔서 어떤 일이 하실 것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① 세상의 죄, 의,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십니다. ② 사도들을 모든 진리로 인도하십니다. ③ 사도들에게 장차 올 것을 미리 보여 주십니다. ④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십니다. ⑤ 사도들에게 그리스도가 맡기신 임무 수행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⑥ 예수가 이 땅에 계실 동안 가르치신 교훈을 사도들에게 기억나게 하십니다. ⑦ 그리스도를 증거 하십니다.
이제 위의 약속들이 어떻게 실현되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교회의 기원을 설명하면서 누가는 말합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1-4).” 이러한 일이 있기 열흘 전, 그러니까 예수가 승천하시기 직전에 그는 사도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예루살렘)에 유하라(눅 24:49).” 또, 그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으리라(행 1:8).”고도 하셨습니다. 하늘나라의 약속을 공부해 보면 그것이 권능으로 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막 9:1). 여기서 우리는 권능과 성령이 불가분의 관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부의 약속(성령)이 그들에게 주어지기까지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아니한 사실도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사도들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된 사실을 배웁니다. 성령이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하신 예수의 말씀과 일치됩니다. 또한 능력으로 옷 입고 각종 방언을 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의 말씀에 따르면 이 때에 “나라”가 임한 것입니다. 나라와 능력과 성령은 동시에 임재 한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날 일어난 사건을 좀더 관찰해 봅시다.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여기에 대하여 베드로는 이렇게 설명 하였습니다.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행 2:15-17).” 물론 “모든 육체”에는 어떤 제한이 있습니다. 모든 새와 짐승과 물고기 등은 제외되며 이교도와 불신자들까지도 성령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무리들이 몰려와서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자 했을 때 그는 입을 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행 2:22-24).”
이 짧은 이야기에서 베드로는 네 가지 사실을 설명합니다. ① 하나님께서 예수로 하여금 큰 권능과 기사와 이적을 행하게 하셨습니다. ②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시는 대로 예수는 우리에게 내어준 바 되었습니다. ③ 설교 듣는 그들 자신이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예수를 못 박아 죽였으므로 정죄를 당했습니다. ④ 하나님께서 그를 죽음의 권세에서 풀어 살리셨습니다. 그는 이 사실에 대하여 사도들 모두가 증인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구약성경을 인용하였습니다. 그는 이 네 가지 근본적인 사실에다 다음 두 가지를 덧붙였습니다. ⑤ 하나님이 오른 손으로 예수를 높이셨습니다. ⑥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예수께서 받으셔서 지금 그들이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주셨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즉각 반응이 일어났습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행 2:37-41).”
이제 성령의 사역에 관한 예수의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1) 그는 세 가지 일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십니다(요 16:8~11).
①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이것은 실제로 사도들이 성령을 받던 바로 그날의 일이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베드로의 설교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던 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를 믿었습니다. 그날 3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의 권위에 굴복하였습니다.
②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을 때, 비로소 그들 자신들이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살인했음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③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부활 사건을 통하여 예수는 죽음의 권세를 잡은 마귀에게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새로 왕위를 회복하신 예수께서 원수인 사단을 심판하는 것은 그의 당연한 특권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성령께서 사도들을 진리로 이끄신 이후부터 사도들이 잘못된 교훈을 가르치지 아니한 사실로 보아 성령의 이러한 역할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무리들에게 행한 첫 번째 설교에서 볼 수 있듯이 그들은 이제 구약성경의 진리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쓴 글을 보면 스승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갖추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이 가르친 복음에 대하여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갈 1:1)”
(3) 성령은 사도들에게 “장차 올 일”들을 보여주십니다. 이것이 실제로 성취된 사실임은 몇 가지 실례로도 충분히 증명이 될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붙잡힐 것은 미리 바울에게 알려진 사실이었습니다(행 20:21-23). 종말론적 세상에 대한 베드로의 묘사와 새 예루살렘에 대한 요한의 묘사, 그 밖의 수많은 예언서들을 우리는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4) 성령은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십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첫 번째 설교를 했을 때 이루어진 사실입니다.
(5)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리라.”고 한 것은 본질적으로 “그가 너를 모든 진리로 인도하시리라.”는 것과 동일합니다.
(6) 성령은 예수가 그들에게 가르치신 교훈을 다시 기억나게 하십니다. 베드로도 이 사실을 인정합니다(행 1:15-16).
(7) 성령은 그리스도를 증거하십니다.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 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 하셨느니라(히 2:4).”
이러한 관찰을 통해 예수가 사도들에게 주신 성령의 약속이 성취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설립된 이래,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모두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신자들이 성령의 이적적인 은사를 받았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도 모든 신자들이 그와 같은 이적적인 성령의 은사를 받을 것이라고는 약속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교회가 설립된 초창기에는 주의 말씀이 이러한 이적적인 성령의 계시를 통해서 격려 받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이 사업은 성취되었고 복음서 저자와 사도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쓴 기록도 완성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성경을 읽고 신자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요 20:30-31), (롬 10:17). 성령의 이적적인 임재가 끝없이 계속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시대마다 사회 개혁가와 지상낙원을 꿈꾸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불행도 없이 모든 사회악을 치유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예수는 그런 이상주의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한번도 달콤하기만 한 잔을 건배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제자들을 속이신 일도 없습니다. 그의 공적활동 초기에 어떤 서기관이 와서 말했습니다.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눅 :9:57).” 이 불쌍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왕국이 무엇인지를 몰랐고 그가 당하시게 될 수난과 곤욕을 이해하지도 못했습니다. 예수는 그의 환상을 다 깨뜨려 버리신 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예수는 지상의 정치적 권력에 대한 꿈을 산산이 부숴버리셨습니다.
모든 유대인들의 마음속에는 정치적 권력에 대한 개념이 너무나 깊이 박혀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영적 왕국의 뜻을 파악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대로 제자들은 왕국에서 누가 제일 크냐 하는 문제로 수없이 논쟁했습니다. 그들의 궁극적 관심사는 이 땅에서의 영화였습니다. 성격이 급한 베드로는 그들이 장차 받게 될 상이 무엇인지 너무나 알고 싶은 나머지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예수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 10:29-30).” 이 보상의 약속은 두 가지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금생과 내생”을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딤전 4:8).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이 말씀은 예수의 제자는 모두 이런 혈연을 갖게 된다거나 재산을 소유하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는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마 12:50). 예수가 하신 약속은 모든 사도들에게 직접 베푸신 축복입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 축복을 나누어 가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속적인 모든 관심사 즉 그들의 가족과 재산을 희생하고 세상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는 자만이 그 약속의 뜻을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예수는 이러한 축복이 반드시 “핍박과 함께” 주어질 것임을 명시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를 인하여 너희가 관장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저희에게 증거 되려 함이라(막 13:9).” 그는 또 “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을 인하여 너희에게 손을 대어 핍박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주며……. 너희 중의 몇을 죽이게 하겠고(눅21:12-16).” 이러한 약속이 그들의 용기를 떨어뜨리는 것임은 사실입니다. 이는 단순한 이상주의자로서는 감히 생각해 낼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의 예언대로 사도들과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수많은 박해를 당했습니다. 사도행전의 기록을 살펴보겠습니다. 4장에서는 옥에 갇힌 베드로와 요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7장에서는 순교자 스데반, 13장에는 야고보의 죽음과 베드로의 두 번째 투옥사건, 14장에서는 돌에 맞는 바울, 16장에는 매를 맞고 투옥된 바울과 실라, 21장에는 예루살렘에서 붙잡힌 바울의 오랜 투옥생활이 적혀 있습니다. 일찍이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다른 사람들이 공회와 총독과 왕들 앞에 끌려갔었습니다. 후에 바울도 그런 일을 당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박해를 받은 사람들을 찾기 위해 1세기 경까지 되돌아 가 살펴볼 볼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가 못 박힌 이후 늘 그리스도인들은 핍박의 대상이었습니다. 교회사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서 박해 당한 순교의 역사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또 예수는 “내세에 영생을 받으리라”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내세란 용어가 현세 이후를 의미한다는 것은 이 용어를 금생에 베푸신 축복과 대조해서 쓰신 것을 볼 때 더욱 확실합니다. 금생이 그의 죽음 이전을 의미하는 것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약 두 달 전에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용어는 죽음을 넘어서는 영원한 삶의 약속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입니다.
예수는 영생을 큰 축복으로 간주하셨습니다. 그는 이런 의미 선상에서 자주 영생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약속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영생”의 뜻을 몰라서 적지 않게 고민했습니다. 그러나 이 뜻은 명백합니다. 내세에 주어질 영원한 삶이 영생입니다. 이것을 다른 뜻으로 곡해할 까닭이 없습니다. 우리는 개종, 즉 죽음, 장사, 부활로 비유되기도 하는 새로운 탄생의 과정을 통해서 중생을 얻게 됩니다. 이 새로운 삶을 현세에서 잘 가꾸기만 하면 점차 자라고 발전해서 내세에서 영생의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우리는 식물이 독충 때문에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를 종종 보지만 그 식물을 이미 성장한 것처럼 이야기 합니다. 영적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볼 때 우리가 육체의 옷을 입고 있는 동안에는 “영생”이란 말을 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열매를 맺기 전에 말라 죽어 버린다면 그것은 영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계시해 주신 것만 관심을 갖는 것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는 현세를 끝까지 이겨내는 사람에게 영생을 주시기로 약속하셨다는 사실은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독자들의 흥미를 돋우고 영생에 대한 이해를 높여줄 또 다른 약속을 생각해보겠습니다. 돌아가시기 전날 밤, 예수는 비탄에 빠져 있는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1-3).” 그가 가서 예비하실 처소의 성격과 형태를 추측하지는 않겠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영생이 어디 있다거나 그것이 어떤 것이든 거기에는 안전과 안식과 행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라. 내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자여. 그리고 만세 전부터 너를 위해서 예비된 왕국에 들어오너라.”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원히 누리게 될 축복의 상태, 이것이 곧 하늘나라입니다.
다음에 우리는 예수가 제자들에게 하신 “평안”의 약속을 관찰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 10:34).” 그러나 그가 잡히시던 날 밤에는 이런 말씀을 하시기도 하였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요 14:27).” 이 두 가지 말씀은 서로 모순이 되는 듯 보입니다. 예수가 의도하신 뜻을 각각 살펴보겠습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예수가 친히 하신 설명을 듣는 것입니다. 검에 관하여 예수는 이렇게 부언하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마 10:35).”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의 교훈으로 인해서 갈라진 가족들을 수없이 보게 됩니다. 때로는 혈연관계를 완전히 끊어버릴 만큼 사태가 심각한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가 오시기 전에는 가족들이 갈라진 예가 없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가 자기 때문에 가족이 분쟁을 일으킬 것이라고 예언하셨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누가 감히 이렇게 예언 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그가 주신 평화의 약속을 조심스럽게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그것이 “세상에서 얻는 평안이 아니라 내가 주는 평안”임을 밝히셨습니다. 그가 약속하신 것은 내적 평안입니다. 바울은 세상이 주는 평안을 거의 지니지 못했지만 그가 하나님의 내적 평안을 즐겼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곤경에 처한 인간에게 주신 것과 같은 평안을 우리는 이 땅에서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자기를 따르는 모든 자에게 베푸신 축복의 약속입니다. 수없이 많은 의인들이 이 평안을 체험하고 그들의 생활을 통해서 이 평안을 증거 하였습니다. 그러나 “악인들에게는 이러한 평안이 없다.”는 하나님의 말씀도 기억해야할 것입니다.
예수가 주신 약속에는 또 하나의 위안이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안식”이란 용어에는 두 가지 뜻이 있는 듯 합니다. 피곤한 영혼을 위한 안식과 이 삶이 끝날 때의 영원한 정신적 안식입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미 예수에게 가서 안식을 체험했습니다. 죄책감이 제거되고, 그의 사랑 가운데서 안식할 수 있는 축복은 이 세상의 어떠한 상급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생을 소유할 때까지는 그 뜻을 결코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이미 세상에 알려진 것과의 비교를 통해서 미지의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진리를 일시적 진리와 비교한다는 것은 무한을 유한에 비교하는 것만큼 정확성이 없습니다. 어쨌든 예수가 여기서 사람들에게 주시는 안식은 결국 그가 자기에게 오는 자에게 주실 안식으로 간주해도 좋다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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